타자 인생 3회차! 328화
38. 한국 시리즈는 처음이라(10)
비록 생에 첫 한국 시리즈이긴 하지만.
프로에서만 40년을 뛴 박유성은 낯선 투수를 상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낯선 투수와 낯선 타자가 만나면 투수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애당초 타자는 3할만 쳐도 잘 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꿔 말하자면 10타석 중에 7번은 아웃을 당해도 문제없다는 뜻.
데이터가 없는 낯선 투수를 상대로는 안타를 칠 확률이 더 낮아지다 보니 15승 투수인 코비 아노를 상대로 복잡하게 접근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다양한 구종을 던질 수 있는 투수라고 해도 어차피 절반은 빠른 공이야. 스플리터를 포심 패스트볼처럼 던지는 게 아니라면 빠른 공만 노려도 충분해.’
메이저리그에는 스플리터나 싱커, 커터를 포심 패스트볼처럼 던져대는 투수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코비 아노의 스플리터는 그 정도로 구위가 좋지 않았다.
마이너리그를 초토화시키고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던 당시에는 스플리터의 위력이 어마어마했을지 몰라도.
토미 존 서저리 이후 메이저리그 생존에 실패해서 아시아 시장으로 밀려온 지금은 포심 패스트 볼의 변주 정도에 불과했다.
코비 아노를 여러 번 겪어본 드림 리그 타자들이라면 스플리터를 노려 공략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고작 두 타석 승부한 게 전부인 타자들이 코비 아노의 모든 구종을 대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2회차 시절에 코비 아노를 세 시즌이나 상대했던 박유성은 예외였다.
-이제 스타즈의 1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타자는 박유성. 시즌 타율 0.749에 포스트 시즌에서만 0.850의 맹타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어제 4타수 4안타에 결승 홈런을 때려낸 바 있는데요. 사실상 1회에 터진 홈런이 어제 경기의 결과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송혁 감독도 박유성 선수 때문에 모든 구상이 틀어졌다고 인정했는데요.
-시리즈 스코어 4 대 0으로 한국 시리즈에 선착한 스타즈와 달리 히어로즈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위즈를 잡고 올라왔습니다. 심지어 7차전도 뒤지던 경기를 역전했고요. 그 과정에서 코비 아노 선수가 원 포인트 릴리프로 출전하면서 장진호 선수를 1차전 선발로 내세운 것 같은데요. 결과적으로 다소 무리한 선수 기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100퍼센트 완벽한 컨디션으로도 박유성 선수를 막기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코비 아노 선수에게 하루의 휴식을 더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즌 막판에 다소 지친 모습을 보여주었던 제이슨 마이너 선수와 달리 저스틴 스몰 선수는 오히려 후반기로 갈수록 구위가 좋아지고 있었으니까요. 저스틴 스몰 선수에게 코비 아노 선수를 붙이는 것보다는 제이슨 마이너 선수에게 붙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1회 초 히어로즈의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이 났는데요.
-저스틴 스몰 선수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 지난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경기 초반은 잘 던졌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번 1회 말이 더더욱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히어로즈는 박유성이라는 큰 산을 어떻게든 넘어야 합니다. 실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경기 후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타석에 선 박유성은 평소처럼 느긋하게 루틴을 실행했다.
오른발로 타석 앞쪽을 쓸어낸 뒤에 왼발을 비벼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방망이를 쭉 내밀어 오른쪽 타석 앞선을 가볍게 쓸고 나서 풍차를 돌리듯 방망이를 네 바퀴쯤 돌린 다음에 어깨에 가볍게 안착시켰다.
만약 다른 루키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었다면 곧바로 머리 쪽으로 빈볼이 날아왔겠지만.
데뷔 시즌에 대한민국 야구 시즌 기록을 전부 갈아 치운 박유성에게는 20년 차 구심조차 함부로 굴지 못했다.
“너 그거 매번 하기 안 지겹냐?”
“지겹죠.”
“그럼 좀 줄여라. 너무 길다.”
“루틴 없이 타석에 서면 사인 내기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뭐야? 너 때문에 고생하는 상대 배터리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벌어주는 거야?”
“겸사겸사죠. 이런 게 바로 동업자 정신 아니겠어요?”
“허, 졌다. 졌어.”
오늘도 어떻게든 박유성을 긁어보려 했던 나경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통 저 나이 때 야구를 잘하면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거나 혹은 지나치게 건방져지게 마련인데 박유성은 적당히 예의를 차리면서 또 적당히 건방졌다.
물론 야구를 터무니없이 잘해서 좋게 보이는 것도 없지 않겠지만.
다른 신인급 선수들처럼 시비를 걸어봐야 자신만 손해일 것 같았다.
게다가 박유성은 고분고분 당해주는 성격도 아니었다.
“오늘은 어제처럼은 안 될 거다.”
“어이구 무서워라.”
“이 녀석이?”
“형. 경기 전에 우리 팀 타자들에게 스플리터 치는 팁을 알려줬거든요? 그러니까 스플리터 던질 생각 하지 마세요.”
“뭐? 무슨 팁을 알려줘?”
“스플리터요. 코비 아노 스플리터 분석 끝났어요.”
“뭐라는 거야?”
“못 믿겠으면 스플리터 줘봐요.”
“짜식이 어디 하늘 같은 선배한테 입을 털어? 앞 봐. 앞 보라고.”
실실거리는 박유성을 무시한 채 나경석은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유성이 녀석이 지난번에 스플리터를 쳤던가? 아니야. 골라내기는 했는데 치진 않았어. 그렇다면 스플리터에 완벽하게 대처하지는 못할 텐데. 한번 테스트해 봐야겠어.’
판단을 내린 나경석이 이내 손가락을 움직였다.
‘바깥쪽 빠른 공이라.’
사인을 확인한 코비 아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좌타자 주제에 좌투수가 던지는 몸쪽 공을 기가 막히게 받아치는 박유성을 상대로 초구부터 몸 쪽으로 붙이는 건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른 코비 아노는 곧바로 투구판을 박찼다.
후앗!
코비 아노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한복판을 지나 바깥쪽으로 빠져나갔고.
박유성은 그 공을 눈으로 확인한 뒤에 타격 자세를 풀었다.
-초구는 볼. 146㎞/h의 빠른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났습니다.
-지금 공이 한 개 반 정도 빠진 것으로 보이는데요. 사실 저 정도면 구심에 따라 스트라이크를 잡아주기도 합니다.
-오늘 구심은 스트라이크 존을 빡빡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이제 초구를 봤으니까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무래도 단기전이니까요. 바깥쪽 승부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은 구심의 성향을 빨리 체크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나경석은 다시 한번 바깥쪽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후앗!
코비 아노가 자신 있어 하는 구종답게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걸치듯 들어오다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퍼억!
박유성의 방망이가 덤벼들지 않자 나경석은 팔을 쭉 뻗어 공을 붙들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구심의 콜은 들리지 않았다.
“빠졌어요?”
“빠졌어.”
“에이. 이 정도는 잡아주셔야죠.”
“네가 구심 해라.”
나경석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구심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박유성이 미동조차 하지 않은 공을 잡아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포스트 시즌에 들어가기 직전.
심판 위원장은 프로 야구 심판들을 전부 소집해 판정 시비가 일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일단 정규 시즌에 지나치게 스트라이크 존이 넓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포스트 시즌 때는 스트라이크 존 좌우 폭을 타이트하게 잡아주세요.”
“그러면 일관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일관성 있게 욕먹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리고 시즌 초반에 스트라이크 존을 넓힌 것도 박유성 선수 때문이잖아요?”
박유성이 4월에 이어 5월에도 월간 타율 7할을 달성하자 심판 위원장은 스트라이크 존을 좌우로 반 개 정도 넓히자고 주문했다.
박유성이라는 슈퍼 스타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지만.
4할도 5할도 아닌 7할 맹타를 휘두르는 바람에 대한민국 야구의 수준이 폄하되고 있다는 일각의 우려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넓은 스트라이크 존으로도 박유성의 뜨거운 방망이를 막지는 못했다.
오히려 무더위가 겹치는 시기에 스트라이크 존이 넓어지면서 거의 매 경기 판정 시비가 불거졌고 심판의 권위만 추락하고 말았다.
“스트라이크 존을 좁히라니. 너무 애매하잖아?”
“그렇다고 홈플레이트 좌우로 몇 ㎝라고 못 박을 수도 없는 거 아냐?”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각 팀에 공 잘 보는 타자들 있잖아? 그 타자들 기준으로 조금씩 좁히면 돼.”
“그럼 스타즈 경기는 편하겠네. 박유성을 기준으로 잡으면 되잖아?”
“박유성이 반응하면 재량껏 판단하고 반응을 안 하면 볼 판정 내리면 돼. 그게 가장 깔끔해.”
“하기야 볼넷만 202개를 골라냈는데 박유성보다 정확한 기준은 없지.”
초구가 아슬아슬하게 들어왔을 때.
구심은 눈을 돌려 박유성의 반응을 살폈다.
박유성이 조금이라도 안도하면 스트라이크를 잡아주려 했지만.
정작 박유성은 미트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괜히 잡아줬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초구를 볼이라 판정하고 나니까 초구보다 살짝 빠진 2구를 잡아줄 수가 없었다.
“하아. 이건 아닌데.”
나경석이 들으라는 듯이 구시렁거렸지만 구심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경석이 아니라 박경호가 똑같이 따졌어도 박유성이 반응하지 않는 한 방금 공은 잡아줄 수가 없었다.
‘좋아. 걸려들었어.’
그런 구심의 반응에 박유성은 씩 웃었다.
코비 아노는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쓰는 스타일이었다.
특히나 좌타자를 상대할 때는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유인구를 통해 불리한 볼 카운트를 극복해 나갔다.
그래서 일부러 바깥쪽 공을 외면했던 건데 자신의 의도대로 구심이 볼 판정을 내려줬으니 오늘 경기도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반면 코비 아노는 애꿎은 공을 바꿔가며 불만을 드러냈다.
“젠장할. 왜 안 잡아주는 거야?”
지난 챔피언십 시리즈 때부터 구심들이 바깥쪽 공에 인색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존에 정확하게 걸쳐 들어갔고.
2구 역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만했는데 둘 다 볼이 되고 나니까 짜증이 치밀었다.
그 와중에 나경석이 또다시 바깥쪽 사인을 내자 코비 아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치겠네. 또 왜 저래?’
이맛살을 찌푸리던 나경석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코스는 그대로 바깥쪽으로.
대신 구종은 빠른 공에서 체인지업으로.
하지만 코비 아노는 아예 투구판에서 발을 빼버렸다.
“잠깐 타임이요.”
“이번이 첫 번째야.”
구심에게 허락을 구한 뒤 나경석은 벤치 쪽으로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전문 통역사가 마운드 쪽으로 뛰어왔다.
-지금 통역까지 대동하고 마운드에 올라갔는데요. 무슨 일일까요?
-초구와 2구 판정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요. 글쎄요. 지금 정규 시즌도 아니고 한국 시리즈입니다. 오늘 경기마저 내주면 히어로즈는 큰 부담을 안고 홈으로 가야 하는 만큼 코비 아노 선수가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통역을 통해 코비 아노를 어르고 달랜 나경석은 다소 지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얘기는 잘 끝났어요?”
“몰라, 인마.”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요.”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인마.”
툴툴거리는 나경석을 보며 박유성이 씩 웃었다.
나경석의 반응을 보아하니 결국 코비 아노에게 맞춰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승부가 들어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