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326화 (326/412)

타자 인생 3회차! 326화

38. 한국 시리즈는 처음이라(8)

반대로 한국 시리즈라는 중압감에 눌려 있던 김석률 감독은 숨통이 트였다.

“장진호가 지난 경기 때 몇 개를 던졌지?”

“87구 던졌습니다. 아마 40개 전후로 교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0구면 이제 25구 남았네.”

“이대로 조금만 몰아붙이면 다음 이닝 때 투수가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1회에 최대한 점수를 뽑아보자고.”

김석률 감독은 긴장을 풀 겸 직접 사인을 냈다.

손동작은 화려했지만 두 번의 사인 취소가 들어간 주문은 간단했다.

강공.

그런데 송혁 감독이 갑자기 더그아웃 밖으로 나오더니 3루수 김하선을 앞으로 당겼다.

“뭐지?”

“감독님이 기습 번트 사인을 냈다고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습 번트 사인을 내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텐데?”

“블레이크 테일러가 용병치고는 번트를 많이 댔으니까요.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 같습니다.”

올 시즌 블레이크 테일러가 성공시킨 희생번트는 21개.

외국인 타자 중에서는 압도적인 1위지만.

2번 타자치고는 그렇게까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중 절반은 한여름에 기록한 것이었다.

상대 팀들의 집중 견제로 박유성이 마음 편히 방망이를 휘두를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자 블레이크 테일러에게 과부하가 걸렸고.

블레이크 테일러의 타율 관리와 박유성의 체력 관리를 위해 작전을 걸다 보니 희생타 수가 늘어난 것이었다.

“이거 외국인 타자에게 번트나 시키는 감독이 되어버렸네.”

“아마 히어로즈도 숫자로만 파악했을 겁니다. 리그가 다르니까 저희 경기를 전부 다 챙겨보지는 않았겠죠.”

“어쨌거나 오해를 하는 것 같으니까 장단을 맞춰줘야겠지?”

김석률 감독은 다시 앞으로 나와 손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취소 사인 없이 간결하게 강공.

그러자 송혁 감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사인이야?”

“사인이 짧은 걸 보니까 기존 사인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유성이 상대로 공을 많이 던지긴 했지만 블레이크 테일러도 타격 컨디션이 바닥이라서요. 기습 번트 쪽이 조금 더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거 같습니다.”

트윈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가장 뜨거운 타격감을 선보인 건 박유성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가장 타율이 낮았던 타자가 바로 블레이크 테일러였다.

16타석에 들어서 15타수 2안타. 타율 0.133.

후반기 들어 타석에서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정규 시즌 종료 후 일주일 만에 실전 경기를 치르면서 타격감은 땅으로 떨어졌고.

3차전과 4차전에서 땅볼 안타를 하나씩 때려내는 데 그쳤다.

애당초 타격을 보고 뽑은 선수는 아니지만.

주자 없는 가운데 타석에 들어설 경우 타율이 1할대로 추락할 만큼 블레이크 테일러의 타격은 기대 이하였다.

김석률 감독도 박유성이 15구 승부 끝에 선제 홈런을 때려냈는데 블레이크 테일러가 허무하게 아웃을 당하길 원치 않을 터.

“경석이한테 맞춰 잡으라고 해.”

“네. 감독님.”

송혁 감독의 지시가 배터리 코치를 통해 나경석에게 전달됐고.

나경석은 곧바로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타격감이 떨어지는 타자가 번트를 대기에는 몸쪽 공보다 바깥쪽 공이 편했다.

또한 빠른 공보다는 충분히 궤적을 읽을 수 있는 변화구가 나았다.

‘일단 번트를 주자.’

나경석의 사인을 확인한 장진호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올 시즌 134개의 도루를 성공시킨 박유성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기습 번트 안타를 성공시키긴 힘들 터.

1회 투구 수도 많은 만큼 가능하면 초구에 번트를 대게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타석에 선 블레이크 테일러는 번트를 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난 챔피언십 시리즈가 끝나고.

블레이크 테일러는 박유성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블레이크. 타석에서 조급하게 굴지 마.”

“내가 조급하다고?”

“내가 봤을 때 체력적인 문제는 아냐. 네가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유인구에 약점을 보이니까 투수들이 계속 유인구 승부를 걸잖아? 넌 그것 때문에 투 스트라이크 전에 타격을 하려 들고. 그걸 투수들이 파악했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외국인 타자답게 블레이크 테일러는 몸쪽 공에 강했다.

빠른 공은 물론이고 낮게 떨어지는 유인구에도 쉽게 당하지 않았다.

반면 바깥쪽 보더 라인을 노리는 공에는 헛스윙이 많은 편이었다.

몸쪽 공에 대비하기 위해 홈플레이트에서 떨어져서 자리를 잡다 보니 무브먼트가 큰 유인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투 스트라이크를 먹고 나면 바깥쪽 유인구가 날아들자 블레이크 테일러는 나름의 해결책을 마련했다.

바로 투 스트라이크가 되기 전에 적극적으로 타격하는 것.

테이블 세터란 본래 최대한 공을 오래 지켜봐야 하지만 박유성 혼자서 두 사람 몫을 충분히 해주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자 상대 팀 투수들도 전략을 바꿨다.

투 스트라이크를 선점한 뒤에 유인구를 던지는 방식에서 벗어나 초구부터 과감하게 칠 만한 공을 던져 범타를 유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투 스트라이크까지는 지켜보는 테이블 세터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바깥쪽 유인구에 부담이 큰 블레이크 테일러는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방망이를 휘둘렀고.

그 결과 상대하기 쉬운 타자로 전락해 버렸다.

스타즈가 정규 시즌에서 우승하긴 했지만 박유성 버프를 받고도 3할에 미치지 못하는 타율(0.275)과 외국인 타자로서 살짝 아쉬운 장타력(20홈런)으로 내년 시즌 재계약을 확신하기란 힘든 상황.

게다가 포스트 시즌에서조차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있으니 타석에서 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블레이크. 넌 올 시즌 네 역할을 다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타격은 천천히 보완해 나가면 돼. 그러니까 편하게 즐겨. 축제잖아?”

“그래. 포스트 시즌은 축제지.”

“블레이크 너는 포스트 시즌을 겪어본 적 있어?”

“아니. 팀이 포스트 시즌에 나가는 걸 지켜본 적은 있지만 선수로서 직접 뛴 적은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난 이번 한국 시리즈에서 제대로 놀아볼 생각이야. 그러니까 너도 마음을 편하게 먹어.”

“후우…….”

“그래도 불안하다면 스트라이크 존을 최대한 타이트하게 잡아. 넌 지금 더그아웃으로 들어갈 공도 쫓아다니고 있으니까.”

박유성과 상담을 마친 블레이크 테일러는 전략분석실로 가서 챔피언십 시리즈 타격 영상을 살폈다.

박유성의 말처럼 완전히 빠지는 공을 쫓아다니진 않았지만 시즌 초에 비해 히팅 존이 넓어진 게 사실이었다.

“이게 시즌 초의 히팅 존이고 이게 시즌 막판의 히팅 존. 그리고 이게 챔피언십 시리즈의 히팅 존. 점점 넓어지고 있어.”

“후우……. 이걸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죠?”

“기술적인 부분은 코치에게 조언을 받는 게 좋을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공을 최대한 오래 지켜볼 것.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을 끝까지 보지 않고 일찍 방망이가 나오는 것 같아.”

자신의 문제점을 확인한 블레이크 테일러는 다시 최윤석 타격 코치를 찾아갔다.

그리고 최윤석 타격 코치와 함께 휴식일도 반납해 가며 타격 밸런스를 재조정했다.

“블레이크! 점수는 내가 낼 거니까 편하게 쳐. 편하게.”

홈런을 치고 들어온 박유성의 독려까지 받은 블레이크 테일러는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부담 갖지 말자.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만 치면 되는 거야.’

그때 장진호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고.

후앗!

새하얀 공이 겁도 없이 한복판을 파고들다가 바깥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건 쳐야 해!’

판단을 내린 블레이크 테일러가 빠르게 허리를 돌렸다.

챔피언십 시리즈 때처럼 공을 쫓아갔다면 방망이 끝에 걸려 파울이 됐겠지만.

최윤석 타격 코치의 조언대로 머리를 고정한 채 히팅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일 힘껏 때려내자 타구가 총알처럼 뻗어 나갔다.

-블레이크 테일러가 밀어 친 타구가 우중간을 완전히 가릅니다!

-이거 완전히 빠졌는데요?

-블레이크 테일러가 1루를 돌아 2루로! 2루에서 멈추지 않고 3루로 내달립니다! 공 3루로! 3루에서…… 3루에서 아웃! 히어로즈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잔뜩 긴장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장진호는 3루심이 크게 주먹을 휘두르자 글러브를 두드리며 환호했다.

그러자 블레이크 테일러가 흙을 털고 일어나 1루 쪽 더그아웃을 향해 사인을 보냈다.

-지금 블레이크 테일러 선수는 태그가 안 됐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타이밍상으로는 아웃입니다. 3루 베이스에 도착하기 전에 공이 먼저 3루수 김하선 선수의 글러브에 들어왔습니다.

-김석률 감독이 일단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는데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비디오 판독이 진행되는 동안 박유성은 박준수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형. 판정 뒤집힐 거예요.”

“진짜? 봤어?”

“저 3루심 오심 많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블레이크 테일러가 몸을 비틀었어요. 하선이 형은 포구하느라 블레이크 테일러가 들어오는 걸 제대로 체크하지 못했고요.”

“근데 이게 사각도 잡히려나?”

“포스트 시즌에는 카메라 추가로 설치하잖아요. 걱정 마요. 무조건 잡아낼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암튼 타석에 서면 초구부터 시원하게 휘둘러요.”

“초구부터?”

“경석이 형 성격에 절대 안 뺄 거예요. 공 16개 던지고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 잡았잖아요. 뺄 공이 없어요. 무조건 초구는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온다고 생각해요.”

“그래. 알았다.”

잠시 후.

비디오 판독 센터에서 결과가 도착했다.

-아, 지금 구심이 세이프를 선언하는데요. 판정이 뒤집혔습니다.

-아까 본 리플레이 화면으로는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아마 다른 카메라에 태그가 안 된 게 찍혔던 모양입니다.

-타이밍상으로는 무조건 아웃이니까 세이프가 되려면 태그 실패로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블레이크 테일러 선수가 마지막 순간에 몸을 비틀어 슬라이딩을 한 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빼앗겼던 3루타를 되찾자 스타즈 팬들은 경기장이 떠나갈 듯 함성을 내질렀다.

-이제 3번 타자 박준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시즌 타율은 0.365 54개의 홈런과 157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커리어 하이 시즌인데요. 박유성 선수가 없었다면 생애 첫 MVP도 가능한 성적입니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박유성 선수 다음으로 높은 4할의 타율을 기록 중인데요. 홈런 2개에 7타점을 올렸습니다.

-초구가 중요합니다. 박준수 선수 상대로 성급하게 승부에 들어가면 얻어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럴 땐 무조건 공 하나 빼고 시작해야죠.

중계석에서 신중한 승부를 주문했지만 나경석의 생각은 달랐다.

사흘 만에 등판한 장진호의 체력을 감안했을 때 볼을 낭비하는 건 무리였다.

‘준수 다음에 다니엘 브리토야. 한 점 더 준다고 생각하고 맞춰 잡는 게 최선이야.’

스타즈에 홈런 타자가 박준수 한 명뿐이라면 모르겠지만.

대기 타석에 45개의 홈런을 때려낸 다니엘 브리토가 서 있었다.

그다음 타자는 36개의 홈런을 때려낸 장영호.

이동엽과 장태수도 한 방을 갖추고 있으니 점수를 안 주겠다고 용을 쓰는 건 바보짓이었다.

나경석이 몸쪽 투심 패스트볼 사인을 내자 장진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스트 컨디션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 몸 상태로 박준수와 어렵게 승부해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준수 성격상 초구는 지켜볼 거야.’

잠시 뜸을 들이던 장진호가 박준수의 몸쪽을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그러자 박준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휘둘렀고.

따악!

찍히듯 방망이에 걸린 공이 그대로 오른쪽 담장 밖으로 넘어가 버렸다.

-홈런! 투런! 박유성 선수에 이어 박준수 선수까지 홈런포를 가동합니다!

-아, 이건 아닌데요. 너무 성급한 승부였습니다.

박준수에게 홈런을 얻어맞은 장진호는 아웃 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한국 시리즈 1차전은 스타즈의 13 대 0, 대승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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