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325화 (325/412)

타자 인생 3회차! 325화

38. 한국 시리즈는 처음이라(7)

-이번에도 파울! 박유성 선수가 다시 한번 장진호 선수의 공에 반응합니다.

-이건 완전히 빠지는 공이었는데요. 한국 시리즈라서일까요? 박유성 선수가 조금 욕심을 낸 것 같습니다.

장성오 해설위원은 박유성이 투 스트라이크에 몰려서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잡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유희완 해설위원의 생각은 달랐다.

-유희완 해설위원. 투수 입장에서 저런 공을 건드려 주면 기분이 어떤가요?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 볼이 될 공을 건드려서 스트라이크가 된다면 솔직히 기분 좋습니다. 하지만 방금처럼 일부러 뺀 공을 타자가 건드려 주면 글쎄요. 조금 무서울 것 같습니다.

-무서워요?

-방금은 사실 때리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은 코스였잖아요? 저걸 엉겁결에 건드린 것도 아니고 타이밍에 맞춰 의도적으로 때려냈다면…… 등골이 오싹할 것 같은데요?

투수인 장진호와 타자인 나경석도 입장이 갈렸다.

“유성아. 방금 타격은 좀 심했다.”

“그러게요.”

“살살 해. 그러다 들어오는 공은 다 치겠다?”

나경석은 박유성이 안타를 치고 싶은 욕심이 과했다고 판단했지만 막상 장진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미쳤네. 어떻게 저걸 치지?”

방금 던진 몸 쪽 공은 치라고 던진 공이 아니었다.

위협구로 느낄 정도로 얼굴 쪽에 바짝 붙여서 박유성의 집중력과 타격 밸런스를 흐트러뜨리려는 목적구였다.

이 공을 던질 때 장진호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결과는 둘 중 하나였다.

박유성이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혹은 박유성이 태연하게 넘기거나.

공을 피하는 과정에서 방망이를 휘둘러 주면 참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게 봤다.

그런데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파울이 났다.

그것도 엉겁결에 방망이에 맞은 게 아니라 제대로 방망이를 휘둘러서 걷어냈다.

나경석이 무슨 말을 걸었는지 박유성이 잠시 웃긴 했지만.

다시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진중해 보였다.

그렇다는 건 방금 타격이 실수가 아니라 의도였다는 의미.

“후우…….”

머릿속이 복잡해진 장진호가 투구판에서 발을 뺐다.

그러자 나경석이 타임을 외치고는 마운드 위로 올라갔다.

“왜? 어디 불편해?”

“그냥 유성이 거르고 가면 안 돼요?”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는데 거르고 가자고? 진심이야?”

“제가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건지 유성이가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주고 시작한 건지 모르겠어서 그래요.”

“뭐야? 천하의 장진호가 왜 이렇게 소심해졌어? 힘들어서 그래?”

“그게 아니라…….”

“그런 거 아니면 약한 소리 하지 마. 삼진 외치는 팬들 입장을 생각해 봐. 여기서 다시 볼넷으로 내주면 기분이 어떻겠어?”

나경석의 말에 장진호는 고개를 들어 3루 쪽 관중석을 바라봤다.

1차전은 던진 경기나 다름없었지만.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은 많은 팬들이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 있었다.

“진호야. 힘들겠지만 유성이 잡고 가자.”

“후우…….”

“여기서 유성이 잡으면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어.”

1회 초 히어로즈의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이 났다.

드림 리그 최고의 톱타자로 불리는 안현우는 2루수 앞 땅볼로 물러났고.

2번 타자 유진혁과 3번 타자 콜빈 볼프는 연속 삼진을 당했다.

스타즈의 선발 저스틴 스몰은 경기 초반이 약한 투수였다.

어느 정도 몸이 풀리고 나야 제구가 잡히는 편이라 경기 초반에 볼넷도 많고 실점도 많은데 1회 초를 고작 공 10개로 틀어막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저스틴 스몰의 다소 기복 있는 피칭에 희망을 걸었던 히어로즈 팬들로서는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런 때에 박유성을 잡아낸다면 스타즈 쪽으로 넘어갔던 흐름을 다시 되찾아올 수 있었다.

“알았어요.”

장진호도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한국 시리즈 1차전 선발 투수로 올라왔으니 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상황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8할을 친 박유성을 상대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상태였다.

볼 카운트 자체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만큼 조금만 더 집중하면 박유성을 범타로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경석 선수가 다시 포수석으로 돌아왔는데요. 장진호 선수와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요?

-아마 볼 배합에 대한 얘기를 했을 겁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해도 상대는 박유성 선수니까요.

-유희완 해설위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상황에서 나눌 대화는 하나뿐입니다. 승부를 하느냐 마느냐죠.

-그렇다면 어떤 결론을 냈을까요?

-그건 이번 공을 보면 알게 되겠죠.

나경석의 사인을 확인한 장진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몸쪽으로 체인지업을 떨어뜨렸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좌타자를 상대로 자주 써먹던 레퍼토리라 자신 있게 팔을 내던졌지만.

따악!

이번에도 박유성의 방망이를 피하지 못했다.

-또다시 파울! 박유성 선수가 3연속 파울을 때려냅니다.

-몸쪽으로 잘 떨어진 체인지업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잘 걷어냈습니다.

-사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저 공을 때려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가볍게 걷어내는 걸 보니까 역시 박유성 선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볼 카운트는 여전히 투 스트라이크인 상황에서 장진호 선수가 6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바깥쪽! 이 공도 박유성 선수의 방망이에 걸립니다!

따악, 하는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3루 쪽 관중석으로 휘어 나가자 히어로즈 팬들은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X발. 맞는 줄 알았네.”

“진짜 박유성 타석은 간 떨려서 못 보겠다.”

“그런데 장진호 이틀 쉬고 올라온 거 아니야?”

“구속 보면 몰라? 평소보다 10㎞/h나 빠졌잖아.”

“그런 공을 박유성이 못 치는 게 말이 돼?”

“한국 시리즈 첫 타석이잖아. 안타 치고 싶나 보지.”

“장진호도 잘하고 있어. 사흘 만에 다시 선발로 나와서 저만큼 던지는 게 쉬운 일이야?”

“그래도 토종 에이스인데 저 정도는 해야지.”

“진호야! 삼진 잡자!”

“장진호 파이팅!”

경기를 직관하던 히어로즈 팬들은 장진호가 투지로 박유성을 밀어붙이는 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중계를 통해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의 반응은 달랐다.

└박유성 놀이 시작된 거 맞죠?

└100퍼 박유성 놀이임. 이대로 가다간 장진호 1회도 못 버티고 강판될 거임.

└박유성 삼진 외치는 애들은 뭐냐? ㅋㅋㅋ

└경기장 가면 외야로 타구만 뻗어 나가도 다들 벌떡벌떡 일어나요. 해설이 없으니까 공 쫓아다니기 바쁨.

└볼카운트만 보고 장진호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팬들 많나 봄. ㅋㅋㅋ

└박유성에게는 볼 카운트가 무의미하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야알못들 많네요.

└그냥 지금이라도 자동 고의4구로 내보내는 게 맘 편할 듯.

└인정. 이대로 10구 넘어가서 안타나 볼넷 나오면 분위기 작살남.

└10구 넘어가면 박유성도 볼 고르기 시작할걸?

└볼 고르고 풀카운트 만든 다음에 장진호 멘탈 탈탈 털 듯.

└진짜 박유성 저럴 때마다 사이코패스 같음.

└하지만 국제 대회 때는 역시 우리 박유성이쥬? ㅋㅋ

중계를 지켜보는 야구팬들의 예상대로 박유성은 7구와 8구까지 연달아 걷어내며 장진호의 투구 수를 늘렸다.

“유성아. 너 때문에 진호 팔 빠지겠다.”

“공이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걸 어떻게 해요?”

“평소보다 스트라이크 존을 너무 넓게 잡는 거 아니냐?”

“형이 포수인데 어쩔 수 없잖아요.”

“……?”

“국대 포수 상대로 정신 바짝 차려야죠.”

“…….”

나경석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국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은 사이이고 한참 선배인데 한마디를 안 져줘서 얄미웠는데 이제는 하다 하다 자신의 핑계까지 대고 있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경호가 시켰지?”

“뭘요?”

“나한테 이러라고 경호가 시킨 거지? 그렇지?”

“제가 시킨다고 할 놈인가요?”

“하아……. 알았다. 그래. 내가 졌어. 그러니까 너도 그만 괴롭히고 꺼져주라.”

“좋은 공 던져주면요.”

“어휴. 진짜 이놈을 쥐어박을 수도 없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헤드락을 걸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나경호는 바깥쪽 사인을 냈다.

애매한 코스들은 전부 파울이 나고 있으니 아예 확실히 빼서 박유성의 타격 밸런스를 흩뜨려 놓을 생각이었다.

주문을 확인한 장진호도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이것도 걷어내 봐.’

장진호는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7구와 8구째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던졌으니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빠른 공에 박유성의 방망이가 끌려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160㎞/h의 빠른 공도 잘만 골라내는 박유성이 150㎞/h도 나오지 않은 공에 속을 리 없었다.

‘볼.’

일찌감치 공의 궤적을 읽은 박유성은 그대로 방망이를 멈춰 세웠고.

퍼억!

공은 프레이밍조차 시도할 수 없을 만큼 멀찍이 빠져서 들어갔다.

-바깥쪽으로 크게 벗어나는 볼. 박유성 선수가 9구 만에 첫 볼을 골라냅니다.

-이번 공은 너무 빠졌는데요. 장진호 선수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안일하게요?

-이게 한 번 유인구에 속아주잖아요? 그럼 투수들은 점점 공을 더 뺍니다. 이 공에도 속았으니까 공 하나 정도 더 빼도 속겠지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먼저 속았던 공에 완벽하게 속았을 때나 통하는 겁니다.

-완벽하게 속지 않는 경우도 있나요?

-긴가민가해서 일단 때리는 경우도 있고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더라도 안타를 만들 자신이 있어서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슬럼프에 빠진 타자들이야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저런 공이 들어오면 방망이가 딸려 나가겠지만 상대는 박유성 선수예요. 저런 공은 아니죠.

-저도 장성오 해설위원의 말에 공감합니다. 방금은 사실 공 하나 버린 건데요. 지금 박유성 선수 한 명을 상대로 9개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을 빼야 할 이유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지금껏 계속 파울을 만들어냈으니 이번에도 건드려 줄 거라고 생각하고 던진 건 아닐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박유성 선수를 너무 쉽게 본 거죠. 호의가 계속되니까 권리인 줄 아는 거예요.

나경석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유성이 이 자식, 진짜 칠 만한 공이라 쳤던 거야?’

구심에게 새 공을 요청하며 나경석이 힐끔 박유성을 바라봤다.

이틀 만에 등판한 장진호의 투구 수를 늘리려고 일부러 파울을 내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볼을 골라 버리니까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장진호는 그저 헛웃음만 났다.

“이건 또 안 쳐? 아주 날 죽일 생각이네.”

투구 수라도 적었다면 그냥 걸렀을 텐데.

이제 10구를 앞둔 상황에서 볼 3개를 연달아 던진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

마음을 다잡은 장진호는 다시 보더 라인으로 공을 붙였다.

박유성이 파울을 내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박유성 한 명만 잡아낸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고 던졌다.

하지만 야구의 신은 그런 장진호의 집념을 바라봐 주지 않았다.

따악!

장진호가 15번째로 던진 투심 패스트 볼이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말려 들어오자 박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휘둘렀고.

날카롭게 뻗어 나간 타구는 그대로 오른쪽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홈런! 박유성! 한국 시리즈 첫 타석에서 선제 홈런을 때려냅니다!

-진짜 박유성 선수, 대단한 집념입니다. 무려 11개의 파울 끝에 홈런을 만들어냈어요.

-이번 공은 실투 같은데요.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가니까 여지없네요.

-지금 장진호 선수가 웃고 있는데요.

-아마 시원섭섭할 겁니다. 장진호 선수도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하아. 저 녀석을 어찌한다…….”

그라운드를 도는 박유성을 보며 송혁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틀 만에 등판한 장진호가 박유성을 잡아줄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15구 승부 끝에 홈런을 얻어맞고 나니까 오늘 경기를 이길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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