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22화
38. 한국 시리즈는 처음이라(4)
“후우…….”
눈으로 1루 주자 최일준을 묶은 뒤 황인석은 이를 악물고 공을 내던졌다.
후앗!
손 끝을 빠져나가는 공의 감촉은 좋았다.
1차전과 2차전에서 등판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푹 쉰 덕분에 체력은 충분한 상황.
앞서 던진 공들도 원하는 대로 날아가줬으니 이번 공도 이용기의 미트 속에 정확하게 꽂혀 줄 것 같았다.
하지만 잘 날아가던 공은 벼락같이 나타난 방망이에 걸려 방향이 꺾이고 말았다.
“X발…….”
머리 뒤쪽으로 솟구친 타구를 보며 황인석은 홈런인 걸 직감했다.
어지간한 좌타자들은 걷어내는 것조차 버거워할 만큼 꽉 찬 코스로 공을 찔러 넣었지만.
불행이도 타석에 서 있는 타자는 좌투수를 상대로도 7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중인 슈퍼 루키였다.
그 예상대로 쭉쭉 뻗어나간 타구는 트윈스 파크 오른 쪽 담장 밖으로 크게 넘어갔다.
-홈런! 투런! 박유성 선수의 방망이가 다시 한 번 폭발합니다!
그라운드를 돌아 박유성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선발 투수인 송찬우가 냉큼 가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유성아. 고맙다.”
“고마우면 오늘 완투해요.”
“그건 좀…….”
“농담이에요. 무조건 4차전에서 끝낼거니까 편하게 던져요.”
박유성의 너스레에 송찬우가 피식 웃었다.
7전 4선승제로 진행되는 챔피언십 시리즈를 4차전에서 끝낸다는 건 4전 전승으로 한국 시리즈에 올라가겠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속에는 오늘 경기의 승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송찬우. 즐기자. 5점이면 충분하잖아?”
1회 말 살짝 제구가 흔들렸던 송찬우는 2회부터 자신만의 리듬감을 되찾았다.
완벽하게 던져야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박경호의 리드대로 공을 던지자 자연스럽게 아웃 카운트가 쌓였다.
-헛스윙 삼진 아웃! 송찬우 선수가 오늘 경기 4개 째 탈삼진을 잡아 냅니다.
-송찬우 선수가 완전히 감을 잡았네요. 완벽한 유인구로 마이클 라모스 선수를 잡아 냈습니다.
-앞서 송찬우 선수도 생애 첫 포스트 시즌 선발 등판에 대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하셨는데요.
-포스트 시즌도 포스트 시즌이지만 시즌 마지막 등판 이후 2주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자체 청백전을 소화했다 하더라도 실전 감각이 떨어지는 게 당연한데 국가 대표 에이스 답게 빠르게 경기력을 끌어올렸습니다.
-아무래도 경기 초반에 타자들이 점수를 뽑아내준 게 큰 도움이 됐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특히나 박유성 선수의 투런 홈런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윤지현 감독이 박유성 선수를 잡기 위해서 선발 투수를 조기 강판하고 황인석 선수를 올렸는데 좌완 스페셜리스트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냈어요. 이러면 트윈스 입장에서는 맥이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5회 초 스타즈의 공격이 이어지는데요. 선두타자가 하필 박유성 선수입니다.
-오늘 박유성 선수의 컨디션으로 봐서 이번 타석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트윈스 팬들에게는 힘겨운 한 회가 될 것 같습니다.
박유성이 타석에 들어서자 윤지현 감독은 평소보다 길게 끌고갔던 황인석을 내리고 방용천을 올렸다.
“볼넷을 내줘도 좋으니까 무조건 어렵게 승부해. 알았어?”
홈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동 고의4구를 요청할 수 없었던 윤지현 감독은 제구가 불안한 방용천에게 박유성을 거르라고 주문했고.
방용천도 무리해서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밀어넣지 않았다.
-아, 이 공도 빠집니다. 스트레이트 볼넷. 무사에 박유성 선수가 출루합니다.
박유성이 1루로 나가자 김석률 감독은 곧바로 희생번트 사인을 냈다.
박유성의 빠른 발이라면 단독 도루도 가능했지만.
쌀쌀한 날씨에 5대 0으로 앞선 상황에서 박유성을 무리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루 사인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박유성이 뛸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볼 카운트 원 볼에서 방용천 선수가 2구를 던집니다. 블레이크 테일러 선수가 이번에는 번트를 댔습니다! 3루수 브랜든 포토가 공을 잡아 1루로! 아아, 박유성 선수가 2루를 돌아 3루로 내달립니다!
블레이크 테일러가 초구부터 번트 자세를 취했지만 3루수 브랜든 포토는 딱히 전진 수비를 하지 않았다.
단독 도루가 가능한 박유성을 상대로 스타즈가 정말 번트 사인을 내진 않았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무조건 페이크야.’
페이크 번트 앤드 슬러시라고 확신하고 있던 브랜든 포토는 일부러 라인 선상 쪽에 머물렀다.
그러다 블레이크 테일러가 정말로 번트를 대자 화들짝 놀라 앞으로 달려들었고.
공을 잡기가 무섭게 1루로 송구하느라 박유성이 3루로 뛴다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뒤늦게 유격수 박찬희가 3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갔지만.
박유성과 동선이 겹친 탓에 1루수 마이클 라모스가 3루에 공을 던질 수가 없었다.
-3루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재치 있는 주루 플레이로 3루를 훔쳐 냅니다.
-역시 박유성 선수는 타석에 있을 때 가장 얌전합니다. 루상에 내보내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어요.
박유성의 허를 찌르는 플레이에 제대로 당한 트윈스는 5회에만 5실점을 하며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여파는 4차전까지 이어졌다.
윤지현 감독이 무조건 1승을 따내겠다며 각오를 밝혔지만.
사흘만에 선발 등판한 임민호의 구위로는 3차전에서 18안타를 몰아친 스타즈 타선을 막을 수가 없었다.
-큽니다!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거 넘어간 것 같은데요?
-중견수 뒤로! 중견수 뒤로! 이 타구가 전광판 상단을 맞추고 떨어집니다! 홈런! 박유성 선수가 포스트 시즌 첫 그랜드 슬램을 작렬합니다!
1대 0으로 스타즈가 한 점 앞서 나가던 2회 초.
2사 만루 상황에서 박유성의 홈런이 터지자 트윈스 팬들은 우르르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하아. 젠장할. 이게 뭐야?”
“임민호 볼질로 만루 채울 때부터 알아봤다.”
“까놓고 말해서 임민호가 무슨 죄냐. 사흘만에 등판시킨 감독이 문제지.”
“포스트 시즌인데 그럼 어떻게 해? 임민호 대신 강윤수 낼까?”
“김혜성 상대로 강윤수? 장난해?”
“왜? 강윤수도 고교 시절에는 김혜성만큼 던졌는데.”
“고교 시절에 잘 하면 뭘해? 올 시즌 성적은 더블 스코어인데.”
“하아. 우리는 왜 투수가 없냐.”
“작년까지만 해도 토종 10승 트리오가 나왔다고 좋아했는데 참…….”
“오늘 경기 뒤집긴 어렵겠지?”
“집에 도착할 때 쯤 되면 경기 끝나 있을 걸? 더 빡치기 전에 우리 집 가서 술이나 마시자.”
타자들의 맹타를 앞세운 스타즈는 트윈스를 11대 3으로 제압하고 4전 전승으로 창단 첫 한국 시리즈에 진출했고
챔피언십 시리즈 MVP는 만장일치로 박유성에게 돌아갔다.
“박유성 선수. 생에 첫 포스트 시즌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소감 한 마디 해 주세요.”
“아직 4승 남았거든요. 4승을 더 채울 때까지 긴장 풀지 않고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한국 시리즈 우승을 돌려 말한 박유성의 인터뷰에 베이스볼 파크가 왁자지껄해졌다.
└포스트 시즌은 모른다고 하던 사람들 다 어디갔음?
└ㅋㅋ 내 말이요.
└진짜 전문가들부터 포스트 시즌 DNA 찾는 거 보고 어이가 없었음.
└경험 타령도 사람 봐 가면서 해야죠. 7할 타자에게 그게 통합니까?
└메이저리그에도 포스트 시즌만 되면 죽쑤는 선수들 은근 많습니다. 마크 스테리도 포스트 시즌 타율은 3할 언더임.
└마크 스테리는 집중 견제 때문에 못치는 겁니다.
└그럼 박유성은??
└박유성도 집중 견제 때문에 10할 달성 실패함. ㅋㅋ
└갓유성 챔피언십 시리즈 성적. 0.813에 홈런 4개, 10타점, 14득점, 4도루. 출루율 0.850 장타율 2.063 OPS 2.913
└무슨 게임 스탯임? ㅋㅋㅋ
└게임에서 저렇게 치면 바로 밸런스 패치 들어갑니다.
└그런데 박유성 무슨 4승 드립임? 그냥 한국 시리즈 잘 하겠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님?
└이젠 하다하다 인터뷰 내용 가지고 난리네. ㅎㅎ
└아직 한국 시리즈 파트너 안 정해졌잖아요. 상대가 누구건 한국 시리즈 우승이 목표라는 걸 말 한 거죠.
└박유성이 말 한 4승은 단순히 한국 시리즈 우승을 말 하는 게 아닙니다. 1승 1승 최선을 다 하겠다는 각오의 표현이에요.
└꿈보다 해몽이 좋네요. ㅎㅎ
포스트 시즌이 시작됐을 때 대다수 전문가들은 드림 리그 플레이오프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1위 히어로즈와 4위 베어스가 고작 4경기 차이입니다. 2위와 3위, 4위는 정규 시즌 마지막 시리즈 때 확정이 됐어요. 그만큼 전력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이글스와의 최종전을 스윕하고 포스트 시즌 막차를 탄 3위 다이노스와 4위 베어스는 1경기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베어스가 위즈를 상대로 위닝 시리즈를 거두었다면 다이노스 대신 베어스가 3위로 포스트 시즌에 올라올 수 있었던 상황.
“플레이오프는 솔직히 누가 이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올라가던 5차전까지 갈 겁니다. 위즈와 다이노스 모두 홈에서 강하기 때문에 5차전에서 승부가 갈릴 가능성이 높아요.”
“그나마 히어로즈는 마음이 편할 겁니다. 시즌 막판까지 고생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까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푹 쉬면서 팀을 재정비 할 수 있습니다.”
리그 1위로 챔피언십 시리즈에 직행한 히어로즈가 조금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른 가운데 위즈와 다이노스 간의 플레이오프가 펼쳐졌다.
전문가들 열에 아홉은 5차전까지 갈 거라 단언할 만큼 박빙의 승부가 예상됐지만 결과는 위즈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외국인 선발 듀오인 존 소렌토와 그리핀 콥이 1차전과 2차전에서 신들린 호투를 선보인 데 이어 올 시즌 FA로이드를 제대로 맞은 3선발 김영준이 플레이오프에서 생에 첫 완투승을 달성해버린 것이다.
누가 올라오든 서로 치고받고 싸우며 체력이 빠지길 바랐던 히어로즈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 셈.
그렇게 4일간의 휴식일을 거쳐 시작된 드림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는 서로 경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7차전까지 이어졌다.
“유성아. 누가 올라올 거 같아?”
“글쎄요. 그래도 홈 경기인데 히어로즈가 조금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스타즈 입장에서는 히어로즈보다 위즈가 더 낫지 않아?”
“히어로즈나 위즈나 별 반 차이 없어요. 이기면 그만이니까요.”
스타즈는 올 시즌 위즈를 상대로 7승 3패를 거두었다.
히어로즈는 1패 많은 6승 4패.
시즌 0.820의 승률을 기록한 스타즈 입장에서는 승률 7할의 위즈와 승률 6할의 히어로즈가 다소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누가 올라오더라도 상관 없었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위즈나 히어로즈를 만났다면 또 모르겠지만.
트윈스를 상대로 예열을 마쳤으니 상대가 누구건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한 팀 골라야 한다면 어디야?”
“붙고 싶은 팀이요? 그럼 히어로즈요.”
“왜? 복수하고 싶어서?”
“그것보다는 하선이 형 은퇴하기 전에 한국 시리즈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거든요. 기왕이면 하선이 형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붙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