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17화
37. 어나더 레벨(8)
ESPM의 간판 스포츠 프로그램인 <월드베이스볼>에서는 아예 박유성 관련 특집 편성을 잡았다.
“오늘은 특별히 세 분의 전문가를 모셨습니다. 세 분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레전드인데요. 한 분씩 자기 소개를 해주세요.”
진행자 애니 카브너의 요청에 왼쪽에 앉은 덩치 좋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래니 워커입니다.”
“래니. 오랜만에 나왔는데 그게 끝이에요?”
“오늘은 저보다 더 대단한 선수들이 나와 있어서요. 최대한 말을 아낄 생각입니다. 하하하.”
2020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래니 워커는 캐나다 역사상 최고의 야구 선수로 꼽히는 강타자였다.
1989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17년간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며 통산 타율 0.313에 출루율 0.400, 장타율 0.565를 기록했다.
강타자의 기준이라 불리는 3할 타율과 4할 출루율, 5할 장타율을 무려 통산 성적으로 달성해 낸 것이다.
커리어 하이인 1997년에는 49개의 홈런과 33개의 도루, 타율 0.366을 기록하며 9.8이라는 WAR을 기록했다.
통산 홈런은 383개.
거기에 230도루까지 기록하며 두 자릿수 도루만 11번이나 달성했으니 이 정도면 호타준족의 대명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래니 워커는 은퇴 후 해설가로 활동 중일 만큼 청산유수였다.
여느 때처럼 단독 패널로 출연했다면 애니 카브너에게 적당히 하라는 주의를 받을 때까지 열심히 입담을 자랑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오늘은 자신보다 유명한 레전드가 두 명이나 더 나와 있었다.
“제 소개를 할 차례인가요? 반갑습니다. 스즈키 이치이로입니다.”
“스즈키 씨는 오늘 방송을 위해 일본에서 오셨는데요.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의미 있는 방송에 초대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월드 베이스볼>에서 준비한 두 번째 패널은 일본 역사상 최고의 야구 선수로 꼽히는 스즈키 이치이로.
일본 프로 야구에서 9시즌을 뛴 뒤 다소 늦은 나이인 27살에 메이저리그에 도전했지만.
역대 2번째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거머쥔 것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에서만 무려 19시즌을 소화하며 통산 타율 0.311과 3,008개의 안타, 509도루를 기록했다.
2019년 은퇴 후 2025년 아시아 선수들 중 최초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아시아 선수들 중 최초로 영구결번(매리너스)이 된 리빙 레전드였다.
비록 오타니 쇼헤 이후로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하긴 하지만 박유성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바라는 주요 언론들이 비교군으로 가장 자주 언급하는 게 다름 아닌 스즈키 이치이로였다.
하지만 그런 스즈키 이치이로도 맞은편에 앉은 사내의 아성은 넘보기 어려웠다.
“이제 제 차례군요. 반갑습니다. 에릭입니다.”
“에릭도 저희 방송에 엄청 오랜만에 출연했는데요?”
“하하. 이런저런 일들로 바쁘게 지내는 중이지만 이런 자리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마지막 패널의 정체는 에릭 지터.
현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메이저리그가 낳은 슈퍼스타였다.
메이저리그에서 20년을, 그것도 양키즈 한 팀에서 뛰며 0.310의 타율과 3,465개의 안타를 때려냈다.
래니 워커나 스즈키 이치이로와 다르게 신인상 이외에 별도의 타격 타이틀은 없지만 꾸준하게 좋은 활약을 펼친 근면함의 아이콘이었다.
이 대단한 세 명의 레전드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바로 박유성.
세계 최초로 시즌 7할 타율을 달성한 대한민국의 슈퍼 루키를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자,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하는데요. 일단 자신을 기준으로 썬을 평가해 볼까요?”
화제를 바꾼 애니 카브너가 다시 래니 워커를 바라봤다.
대다수 언론들은 같은 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스즈키 이치이로를 자주 언급하지만.
올 시즌 박유성과 가장 유사한 활약을 펼친 건 다름 아닌 97시즌의 래니 워커였다.
오늘 초대받은 세 명의 레전드 중에 유일하게 시즌 30-30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래니 워커는 단 한 번도 박유성과 자신을 비교해 본 적이 없었다.
“글쎄요. 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제가 너무 초라해지지 않을까요?”
“래니. 너무 겸손한 발언 아닌가요?”
“천만에요. 제가 제일 잘했던 시즌은 1997년입니다. 0.363의 타율과 49홈런, 33도루를 기록했죠. 하지만 그 시즌에 저는 타격왕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타격왕은 이듬해 받았죠.”
“자기 자랑 시간인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썬은 이번 시즌 타격 8관왕을 차지했습니다. 타율이 7할이 넘으니까 출루율과 장타율 1위는 기본적으로 따라가는 것이겠지만 타점이나 안타, 홈런은 이야기가 다르거든요. 올 시즌 전 경기를 출전하면서 기복 없이 엄청난 활약을 펼쳤으니 저를 한참 뛰어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래니 워커는 1998년과 1999년, 2001년 세 차례 내셔널리그 타율 1위를 달성했다.
커리어 최고 타율은 1999년의 0.379.
162경기 중에 127경기를 출장하고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누적 스탯으로 순위를 가리는 안타나 홈런, 타점, 득점, 도루와 달리 타율과 출루율, 장타율은 비율 스탯이기 때문에 경기 수가 늘어날수록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규정 타석을 채웠으니 타석 수가 적더라도 기록으로 인정받아야겠지만.
150경기를 전부 뛰며 723타석에 0.749의 시즌 타율을 기록한 박유성의 기록과 비교하기란 여러모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스즈키 씨는 어때요?”
애니 카브너의 시선이 스즈키 이치이로에게 향했다. 그러자 스즈키 이치이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건 단일 시즌 최다 안타뿐입니다. 262개를 때려냈는데요. 그때는 이보다 더 잘 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즈키 씨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을 포함해서 말이죠?”
“솔직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올 시즌 박유성 선수를 보니까 제 기록은 금방 깨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리그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리그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한국 리그의 수준은 일본은 물론이고 메이저리그보다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톱클래스 선수만 놓고 보자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한국이 국제 대회에서 선전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그 톱클래스 선수들의 기량이 좋기 때문이니까요.”
“스즈키 씨는 썬이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할 거라고 얘기하고 있는데요. 에릭의 생각은 어때요?”
스즈키 이치이로가 같은 아시아 출신인 박유성을 편애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애니 카브너가 다시 에릭 지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에릭 지터라고 해서 박유성에 대한 평가가 다를 리 없었다.
“애니. 올 시즌 썬이 때려낸 안타가 몇 개인 줄 알아요?”
“390개 아닌가요?”
“맞아요. 390개. 하하. 정말 터무니없지 않나요?”
“솔직히 그런 기록이 나온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썬 다음으로 안타를 많이 때려낸 타자가 350개쯤 쳤다면 리그가 이상한 거겠죠. 하지만 한국에서 썬 다음으로 안타를 많이 때려낸 선수는 고작 188개밖에 치지 못했어요. 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거죠.”
“리그 타율은 어떤가요?”
“썬의 등장으로 한국의 리그 타율이 폭등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작년에 비해 고작 4리 정도 올랐을 뿐이에요. 그것도 썬이 소속된 팀이 엄청난 성적을 거두면서 타율을 끌어올린 결과죠.”
“썬의 타격은 경이롭지만 한국에도 프로 야구 선수가 많으니까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거네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리그 성적이라는 게 재미있는 게 홈런 타자들이 예년보다 홈런을 더 때려낸다고 해서 리그 전체 홈런 수가 확 늘거나 하지 않아요. 많이 때려내는 타자가 있으면 또 그만큼 활약이 줄어든 타자가 나오게 마련이니까요.”
“원래 이건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꺼낼 질문이었는데요. 썬이 내년 시즌에 메이저리그에 온다면 안타를 몇 개쯤 때려낼 수 있을까요?”
박유성에 대한 평가가 후하다 못해 넘치자 애니 카브너가 질문 순서를 바꿨다.
그러자 에릭 지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최소 300개.”
“300개요?”
“참고로 150경기 기준입니다. 아무래도 신인이라 소속 팀에서 전 경기를 출전시키지 않을 거라서요.”
현재까지 메이저리그 최다 안타 기록은 262개.
에릭 지터의 맞은편에 앉은 스즈키 이치이로가 2004년에 세운 기록이었다.
당시 스즈키 이치이로가 161경기에 출전했으니 경기당 안타 수는 1.63개.
박유성이 162경기를 전부 뛰어서 300안타를 때려낸다고 해도 경기당 1.85개인데 150경기로 잡은 거라면 경기당 2개의 안타를 때려낼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예상이 나온 근거가 뭘까요?”
“간단하게 생각했어요. 보통 아시아 리그에서 뛰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타자들은 안타 수가 20퍼센트 이상 줄어들더라고요. 썬은 아시아 최고의 타자니까 390개의 안타에서 20퍼센트를 뺐죠. 그랬더니 최소 300개는 치겠다 싶더라고요.”
“래니. 이 의견에 동의하나요?”
“저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썬은 올 시즌 단 하나의 삼진도 당하지 않았어요. 불리한 볼카운트에서도 투수의 실투를 유도해 안타를 때려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고요. 올해 데뷔한 신인이긴 하지만 타격적으로는 완성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스즈키 씨의 생각은 어때요?”
애니 카브너가 마지막으로 스즈키 이치이로를 바라봤다.
에릭 지터나 래니 워커와 달리 스즈키 이치이로는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보유한 당사자.
조금 더 냉정한 평가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스즈키 이치이로가 오늘 방송에 출연한 건 그야말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사실 박유성 선수에 대한 전망이 나올 때마다 가장 자주 언급되는 비교 대상이 저일 겁니다. 처음에는 재능 있는 선수의 기준점이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6월까지 시즌 타율 7할을 유지하는 걸 보고 위험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위험해요?”
“오타니 쇼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농담처럼 그런 말을 했었죠. 다른 건 다 괜찮지만 안타 기록은 안 돼! 오타니 쇼헤가 웃으면서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많은 안타를 때려낼 수 있는 타자는 저뿐일 거라고요. 그런데 6월에도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버티는 박유성 선수를 보니까 그 기록을 지킬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스즈키 이치이로가 쓴웃음을 흘렸다.
일본 언론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언론에서조차 박유성의 하락세를 언급하던 시절이었지만.
스즈키 이치이로는 그런 압박을 견디고 이겨낸 박유성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한국 야구의 전반기가 끝날 때쯤 누군가 저한테 물었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7할을 지킬 수 있겠냐고 말이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나요?”
“7할은 물론이고 시즌 후반에 성적을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대로 박유성 선수의 방망이가 다시 뜨겁게 타올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