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08화
36. 기록의 사나이(10)
“와, 씨X. 또 넘어갔어?”
“하아. 진짜 해도 너무한다. 박유성.”
5 대 0이던 스코어가 단숨에 9 대 0으로 벌어지자 경기장을 찾아온 이글스 팬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경기도 쉽지 않을 거라 각오하긴 했지만 박유성에게 연타석 만루 홈런을 얻어맞고 나니까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박유성이 잘하는 거냐, 우리 팀 투수들이 병X인 거냐?”
“뭘 물어. 당연히 우리 팀 투수들이 문제지.”
“더블 비를 잡았어야 했어.”
“장난해? 포시 때만 잠깐 잘했는데 잡길 뭘 잡아?”
지난겨울.
이글스는 드림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우승을 견인한 외국인 원투 펀치와 재계약을 포기했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준우승을 핑계로 다니엘 브리토 수준의 계약을 원하는 에이전트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브랫 존슨하고 브룩 브레드릭이 2년간 챙긴 승리가 얼마인데? 고작 43승이야. 연평균 10승 수준이라고. 그런데 300만 달러?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에이전트가 이글스 구단에서 재계약을 원치 않는다는 언론 플레이를 늘어놓자 이글스 구단도 곧바로 요구 사항을 오픈하며 맞불을 놓았고.
이글스 팬들도 과도한 연봉을 요구하는 두 선수보다 새로운 선수를 데려오는 게 낫다며 이글스 구단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체 선수로 데려 온 잭 홀리데이와 카일 핸더슨의 기량은 지난해 준우승 팀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잭 홀리데이 봐라. 걔가 어떻게 에이스냐?”
“에이스 아니고 1선발. 가장 먼저 등판하는 선수.”
“그러니까. 다른 구단은 그래도 외국인 1선발을 에이스 취급해 주는데 우린 어디 가서 말도 못 하잖아.”
“파이터즈도 마찬가지잖아.”
“파이터즈는 빼. 어디까지 내려가자는 거야?”
“브랫 존슨하고 브룩 프레드릭도 첫 시즌엔 10승 겨우 채웠어. 그래서 마지못해 재계약했던 거잖아.”
“차라리 걔들이 낫지. 잭 홀리데이하고 카일 핸더슨은 10승도 못 찍게 생겼잖아.”
“후반기에 파이터즈 상대로 승리 좀 챙기면 10승은 가능할 거라던데?”
“하아. X발. 이럴 거면 작년에 준우승을 하지 말든가.”
“내 말이 그 말이야. 계속 5위 할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코시 맛보다 다시 5위 하니까 진짜 야구 볼 맛 안 난다.”
4회 초에 9 대 0까지 점수가 벌어졌지만 이글스 팬들 중에 자리를 떠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워낙에 구단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데다가 박유성이 한 경기 최다 타점 타이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앞서 박유성 선수가 연타석 만루 홈런을 때려내면서 한 경기 최다 타점 타이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기존 기록이 9타점이었나요?
-네. 2027년에 송현민 선수가 기록 경신에 도전했다가 타이 기록으로 끝냈던 경기를 이선철 해설위원과 함께 중계했었습니다.
-아, 그 얘기를 들으니까 생각나네요. 마지막 타석 때 홈런성 타구가 담장에 맞고 떨어지면서 2루타로 끝났었죠?
-네. 그 경기에서 송현민 선수가 5타수 5안타에 2홈런, 9타점을 기록했는데요. 박유성 선수는 세 타석 만에 9개의 타점을 신고했습니다.
-지금 한 경기 연타석 만루 홈런 기록도 역대 두 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3연타석 홈런에 연타석 만루 홈런은 박유성 선수가 세계 최초라고 합니다. 아, 지금 채팅창으로 최다 타점도 코앞이라고 하는데요.
-한 시즌 최다 타점 말하는 것 같은데요. 146타점까지는 조금 더 남지 않았나요?
-오늘 경기에서 9타점을 추가하면서 이제 7개가 남았는데요. 스타즈가 초공이니까 최소한 두 타석은 더 들어가지 않을까요?
-두 타석을 더 선다고 하더라도 오늘 경기에서 7타점을 추가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4연타석 홈런은 어떨까요?
-개인적으로는 그 기록이 조금 더 현실성이 있지 않나 싶네요. 오늘 박유성 선수는 홈런을 노리고 치는 중이거든요. 아마 다음 타석 때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4회 초 스타즈의 공격은 타자 일순을 코앞에 두고 끊겼다.
박유성의 홈런 이후 2번 타자 블레이크 테일러가 3유간을 꿰뚫는 안타를 때려냈고.
박준수까지 볼넷을 골라 나가 무사 1, 2루 상황이 되자 손진우 감독이 우완 언더핸드인 최윤준으로 투수를 교체했다.
땅볼 요정이라는 별명답게 최윤준은 4번 타자 다니엘 브리토를 병살타로 유도하며 급한 불을 껐다.
이후 5번 타자 장영호에게 볼넷을 허용했지만 6번 타자 이동엽을 땅볼로 잡아내고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다.
하지만 스타즈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따악!
멀티 히트 시 120퍼센트 광고를 꽂아주겠다는 박유성의 말에 꽂힌 장태수가 풀카운트 접전 끝에 1, 2루간을 꿰뚫는 안타를 때려내며 포문을 열었고.
따악!
후속 타자 박경호가 잡아당긴 강습 타구가 3루 베이스를 맞고 튀어 오르면서 행운의 안타로 연결됐다.
무사 1, 2루 상황에서 최일준이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지만.
따악!
다시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이 최윤준의 초구를 잡아당겨 오른쪽 펜스를 넘기면서 신기록 달성에 성공했다.
-이 타구가 또다시 담장을 넘어갑니다!
-박유성 선수. 정말 대단하네요. 지금 최윤준 선수가 몸 쪽으로 싱커를 떨어뜨렸거든요? 저건 잘 쳐도 땅볼인데 저 공을 저렇게 멀리 날릴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중계 카메라에 최윤준 선수의 표정이 잠깐 잡혔는데요. 우익수 플라이일 줄 알고 있다가 넘어가니까 헛웃음을 흘렸네요.
경기를 지켜보던 기자들도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뭐야, 이거? 오늘 박유성 진짜 미쳤는데?”
“방금 공은 사실 볼 아니었어?”
“볼이지. 거의 무릎 밑으로 빠지는 공이었잖아.”
“그런데 저걸 어떻게 때려낸 거야?”
“그러니까 미쳤다는 거야. 평소에는 저런 공 잘 안 치잖아?”
“저런 공뿐만 아니라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은 거의 건드리지도 않았지.”
“그럼 오늘은 왜 저러는 거야?”
“난들 알아?”
기자들은 갑작스러운 박유성의 연속 홈런포가 당혹스러웠다.
평소 7할 맹타를 휘두를 때도 장타 욕심은 거의 내지 않았는데 오늘은 마치 시즌 막판 홈런왕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리해서까지 장타를 때려내고 있었다.
“왕선배님은 이유를 아세요?”
구석에서 선배 기자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한지선 기자가 나영진 기자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나영진 기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왕선배는 뭐야?”
“공윤경 선배님의 선배님이시잖아요. 그래서 왕선배님이요.”
“표현하고는.”
“아니면 왕사수님이라고 부를까요?”
“그냥 선배님이라고 해.”
“넵. 선배님.”
“왜 그렇게 바라봐?”
“공윤경 선배님이 알려주신 대로 하고 있는데요?”
“공 기자가 뭘 알려줬는데?”
“모르는 거 있을 때 예쁘게 웃으면서 바라보면 알려주신다고요.”
“너 공 기자하고 그만 다녀라. 아주 애를 버려놨네.”
무겁게 한숨을 내쉬던 나영진 기자가 주변을 쓱 둘러봤다.
박유성의 4연타석 홈런 때문일까.
다들 기사 초안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기자들 어때 보여?”
“그냥 좀 분주한 느낌이요?”
“왜 분주할까?”
“가장 먼저 기사를 올리기 위해서이지 않을까요?”
“그래. 지금 다들 유성이 때문에 눈이 뒤집혔어. 우리처럼 기사의 퀄리티로 인정받는 매체가 아니라면 일단 먼저 올려야 하거든.”
“역시 믿고 보는 베이스볼 패치인가요?”
“자화자찬이긴 하지만 우리처럼 야구에 진심인 매체가 어디 있어? 심지어 취재 분야를 넓혀도 사명은 그대로잖아. 안 그래?”
야구 전문 매체로 출발한 베이스볼 패치는 현재 스포츠 전 분야를 다루는 종합 스포츠 전문 매체로 성장했다.
하지만 사명은 계속해서 베이스볼 패치를 유지했다.
야구판에서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양질의 기사를 쓰겠다는 다짐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그럼 우리 때문에 저러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 우리는 기사를 일부러 느긋하게 내잖아? 그사이에 기사만 올리면 야구 팬들이 알아서 봐줄 텐데 뭐 하러 저러겠어?”
“그러면요?”
“오늘 경기 전에 최대 이슈가 뭐야?”
“박유성 선수 여동생 건이요?”
“그래. 지금 공 기자가 매달린 그 건 때문에 다들 난리였잖아? 그럼 기자들 입장에서는 어떤 결과가 최선이었을까?”
“박유성 선수가 부진한 경기가 최선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야 여동생 건과 엮어서 기사를 확장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유성이가 저렇게 미쳐 날뛰고 있는데 여동생 건을 엮을 수가 있을까?”
“그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이상하지. 그것도 많이 이상해. 물론 유성이 못 잡아먹어 안달인 기자들이야 어떻게든 엮을 거야. 그 인간들은 유성이가 뭘 해도 까고 보는 인간들이니까. 하지만 적당히 조회 수만 빨면 그만인 기자들은 그럴 수가 없어.”
“섣불리 커밍아웃 했다가 안티 박유성으로 엮이면 안 되니까요?”
“바로 그거야. 그래서 지금 다들 새로 기사를 쓰는 중이야. 대기록 작성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말이야.”
“역시. 윤경 선배님 말씀처럼 대단하세요.”
나영진 기자의 분석에 감탄한 한지선 기자가 양손 엄지를 들어 올렸다.
공윤경 기자가 갑작스럽게 신화 여자 중학교로 뛰어가면서 나영진 기자에게 자신을 맡길 때만 해도 내심 섭섭했는데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영진 기자는 이런 상황을 만든 박유성이 더 대단해 보였다.
“칭찬의 대상을 잘못 골랐어.”
“네?”
“내가 아니라 판을 바꾼 유성이를 칭찬해야지. 대한민국에서 한 경기 4홈런이 나온 게 몇 번인 줄 알아?”
“그것까진 저도 잘…….”
“다 해서 6번이야. 박병오 선수가 두 번 기록했으니까 달성한 선수는 5명이고. 그런데 그 선수들 중에 누구도 7타점 이상을 넘기지 못했어. 그게 무슨 의미일까?”
“주자가 없는 가운데 홈런을 쳤다는 거 아닐까요?”
“그래. 주자가 없어서 투수도 편하게 승부를 걸 수 있는 상황에서 추가 홈런이 나온 거야. 그런데 유성이는 지금 타점이 몇 개야?”
“12점이요.”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7할 타자를 상대로 투수가 좋은 공을 던져줄 확률은?”
“없죠?”
“그래서 더 대단한 거야. 투수를 억지로 승부하게 만들었으니까.”
첫 번째 홈런과 방금 전의 홈런은 초구를 공략했지만.
두 번째 홈런과 세 번째 홈런에서는 무려 17개의 파울 타구를 만들어내며 승부를 강요했다.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계속 파울이 나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한 투수들이 평정심을 잃고 덤벼들도록 유도한 것이다.
“원래 제구가 좋은 투수들도 다섯 개에 하나 정도는 실투성 공이 나와. 그래서 실투만 놓치지 않고 쳐도 좋은 타자라고 하는 거고.”
“투수 입장에서 실투란 타자 입장에서 치기 좋게 몰린 공이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방금 전 홈런을 봐. 좌타자 몸쪽에 낮게 떨어지는 싱커는 최윤준 선수 전매특허거든. 건드리면 열에 아홉은 땅볼 나는 그 공을 퍼 올려서 홈런을 쳤어. 이러는데 기자들이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여동생 건에 관심 두겠어?”
“못 두죠. 바로 앞에 대기록이 있는데요.”
“한 경기 4홈런은 7번째고 4연타석 홈런은 통산 3호야. 만약에 말이야. 여기서 홈런 하나가 더 나오면 어떻게 될까?”
“엄청나겠죠?”
“그래서 유성이가 이 악물고 홈런 치는 거야. 딴 데 정신 팔지 못하도록 대기록으로 기자들의 펜을 묶어놓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