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07화
36. 기록의 사나이(9)
손진우 감독도 곧바로 마운드에 올라 신정욱을 달랬다.
“정욱아. 이번만 잘 넘기면 돼. 알지?”
“네. 감독님.”
“그렇다고 덤비진 말고. 한 점 줘도 되니까 최대한 까다롭게 승부 걸어. 1회 때처럼 몸쪽 던지면 안 된다.”
“네. 감독님.”
“근수 너도 리드 확실히 하고.”
“알겠습니다.”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손진우 감독은 타석 쪽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박유성이 알아서 눈을 맞추고 목례를 했는데 만루 상황이라 그런지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게 느껴졌다.
“유성이가 평소와는 좀 다른데요?”
그 모습을 더그아웃에서 지켜보던 최민태 수석 코치가 김석률 감독에게 말을 붙였다. 그러자 김석률 감독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게 진짜 모습이야.”
“네?”
“유성이 맘먹으면 원래 저래.”
“그래요? 그런데 왜…….”
“평소에는 다르냐고?”
“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지. 야구는 팀 스포츠잖아. 저 녀석이 나이는 어려도 분위기 맞추는 건 잘해. 혼자 너무 튀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아는 거지.”
김석률 감독의 말에 최민태 수석 코치는 헛웃음이 났다.
현재 박유성은 대한민국 야구계는 물론이고 스포츠 전체에서 가장 튀는 선수였다.
야구를 배 나와도 하고 술 먹어도 하는 스포츠라며 비아냥거리는 축구 팬들조차 박유성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절제한 모습이었다니.
새삼 7할은 아무나 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올림픽 때하고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도 비슷했어. 어깨에 모든 책임감을 다 짊어진 느낌이랄까?”
“에이스의 숙명 같은 거네요.”
“나이는 어리지만…… 유성이가 우리 팀 간판인 건 사실이잖아?”
“어디 우리 팀뿐이겠습니까? 대한민국의 간판 스타죠.”
“암튼 잘 봐. 유성이가 마음먹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이야.”
김석률 감독의 말처럼 박유성은 루틴부터 신경을 썼다.
오른발로 타석 앞쪽을 꼼꼼하게 고른 뒤에 왼발을 타석 뒤쪽 끝 선 앞에 단단히 파묻고.
방망이를 쭉 뻗어 오른쪽 타석 안쪽 라인을 제대로 긁은 다음 마치 홈런 타자처럼 방망이를 두 바퀴 돌렸다가 어깨에 걸쳤다.
“뭐야, X발. 왜 저렇게 똥폼을 잡고 난리야?”
박유성의 기세가 평소와 다르자 신정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동생 기사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까지는 알겠지만 그 감정을 자신에게 표출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그때 이근수가 가랑이 사이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슬라이더를 빼라고? 하아……. 이럴 거면 그냥 자동 고의4구를 줘버려.’
이근수의 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신정욱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진우 감독이 마운드까지 올라온 상황에서 사인을 거부할 만큼 신정욱은 간이 크지 않았다.
앞서 초구에 얻어맞은 홈런도 몸이 덜 풀렸다는 핑계로 겨우겨우 넘어간 상황.
“운 좋은 줄 알아. 박유성.”
슈퍼 루키와의 대결을 허락받지 못한 다른 투수들처럼 신정욱도 선심 쓰듯 주절거렸다. 그러고는 이근수의 미트를 향해 대충 공을 내던졌다.
후앗!
손끝에서 빠진 공이 예상보다 조금 더 바깥쪽으로 빠지자 신정욱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차피 피할 승부라 해도 한참 어린 후배를 상대로 너무 빠지는 공을 던지는 건 도망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당연히 거를 줄 알았던 그 공을 박유성이 건드렸다.
-초구는 파울. 바깥쪽 공에 박유성 선수가 반응합니다.
-확실히 빠지는 공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타격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계진은 물론이고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박유성이 2구와 3구를 연달아 건드리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뭐야? 스트라이크야?”
“스트라이크면 파울이 나겠냐?”
“볼이지?”
“완전히 빠지는 공이었어.”
“그런데 왜 쳐?”
“그걸 내가 아냐?”
“뭐야, 박유성? 동생 기사 나서 빡쳤나?”
“X발.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그래. 박유성 빡쳐서 연타석 홈런 때려내면 어쩌려고 그러냐?”
프로 야구가 양대 리그 체제로 접어든 것도 벌써 6년째였다.
같은 리그의 팀들끼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18차전을 치르는 반면 리그가 다른 팀끼리는 인터 리그라고 해서 전반기와 후반기, 두 번에 걸쳐 5경기씩 총 10경기를 치르는데 오늘 경기는 양팀 간 8차전이었다.
앞선 7번의 경기 결과는 7승 0패.
스타즈는 이글스를 만날 때마다 승리를 챙겼고.
이글스는 지난해 상대 전적 6승 4패로 우위를 점했던 게 맞나 싶을 만큼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상대 전적이 확 기울어 버린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박유성이었다.
박유성이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적시타를 때려내며 경기를 터뜨려 버리니 불펜이 약한 이글스 전력으로는 버텨내질 못했다.
“이번 3연전 중에 한 경기는 잡아야 해. 스타즈 상대로 1승도 못 하고 있는 건 우리하고 파이터즈뿐이라고.”
“그러려면 유성이가 여기에서 삼진 당해줘야 해.”
“유성아! 제발!”
“형이 네 국대 유니폼도 샀거든? 그러니까 이번엔 그냥 죽어줘라.”
이글스 팬들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을 걷어냈다.
-6구도 파울! 박유성 선수가 6연속 파울을 때려냅니다.
-이번에는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는데요. 저걸 저렇게 치는 것도 대단하네요.
-체인지업이 제대로 구사가 되지 않았던 걸까요?
-방금 공은 던지는 순간부터 볼이었습니다. 어지간한 타자라면 절대 방망이가 나가지 않을 공이었는데 박유성 선수는 끝까지 공을 지켜보다 걷어냈습니다.
-아무래도 투 스트라이크에 대한 압박이 있는 것 같은데요.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그만큼 욕심도 날 테고요.
-지금 채팅창으로 진즉 밀어내기 볼넷이 나와야 정상이라는 글이 올라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타석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몹시 궁금해집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이 기다리던 답은 5분이 더 지나서야 나왔다.
10구 연속 파울로 짜증이 치민 신정욱이 몸 쪽으로 붙인 공이 한복판으로 몰리듯 들어갔는데.
따악!
그 공을 박유성이 놓치지 않고 잡아당긴 것이다.
-아, 큽니다! 이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것도 넘어간 거 같은데요?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이 타구는 우익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집니다! 스타즈의 슈퍼 루키 박유성 선수가 이번 시즌 두 번째 그랜드 슬램을 작렬합니다!
“젠장할!”
기적의 호수비를 펼쳐주길 바랐던 우익수 마이크 로이가 발걸음을 멈추자 신정욱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마이크 로이가 담장을 밟고 뛰어올랐다 하더라도 잡을 수 없을 만큼 비거리가 나왔지만 신정욱에게는 대충 쫓다가 타구를 포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사이 빠른 발걸음으로 그라운드를 돈 박유성은 홈플레이트 뒤쪽으로 줄줄이 서 있는 동료들과 과격한 하이 파이브를 나누었다.
“나이스 박유성!”
“잘했다. 유성아!”
“오늘 타격감 장난 아닌데?”
“이대로 두 개만 더 쳐라. 알았지?”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박유성은 일부러 장태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장태수가 제 발 저린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욕심부린 거 아냐. 진짜 안타 치려고 그랬어.”
“이 악물고 방망이 돌리는 거 내가 다 봤다.”
“타격을 할 때는 항상 최선을 다해서 힘을 실으라면서? 난 너한테 배운 대로 한 거야. 진짜야.”
“암튼 오늘 경기에서 안타 못 치기만 해. 넌 진짜 앞으로 국물도 없다.”
“홈런을 두 개나 쳐놓고 아직도 모자라?”
“모자라지. 이 갈증을 채우려면 아직 멀었어.”
“120퍼센트 광고 찍냐?”
“너 오늘 멀티 히트 치면 내가 120퍼센트 광고 꽂아준다.”
“뭐? 진짜?”
“대신에 못 치면 너 대신 지원이가 들어갈 거야.”
“야 인마. 그건 아니지.”
신성 제약에서 출시한 에너지 드링크 음료 120퍼센트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자 신성 제약에서는 벌써부터 다음 CF를 준비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박유성을 광고 모델로 쓰고 싶었지만.
나날이 치솟는 박유성의 몸값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
언제고 박유성이 메인 모델에서 하차할 것을 대비해 다른 스타즈 선수들을 출연시키는 단체 CF를 구상 중이었다.
그래서 박유성은 스타즈에서 오래 뛸 가능성이 높은 동기 장태수와 손지원, 그리고 이동엽을 추천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장태수는 다음 타석에서 바뀐 투수 안영욱을 상대로 기어코 안타를 때려냈다.
-좌익수 앞에 안타! 6번 타자 장태수 선수가 오늘 경기 첫 안타를 신고합니다.
-안영욱 선수가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장기인 슬라이더를 던졌는데요. 장태수 선수의 방망이 끝에 제대로 걸렸습니다.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박경호가 다시 한번 볼넷을 골라내며 무사 1, 2루 찬스로 이어졌고.
딱.
9번 타자 최일준이 3유간으로 굴린 기습 번트 타구를 유격수 김영철이 펌블하면서 다시 한번 만루 밥상이 차려졌다.
-만루 찬스가 또다시 박유성 선수 앞에 걸렸습니다.
-오늘 안영욱 선수 구위로는 박유성 선수를 막아내기가 힘들 것 같은데요. 한 템포 빠르게 투수 교체를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손진우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오는데요. 구심에게 별다른 언질이 없는 것으로 봐서 투수 교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안영욱 선수는 볼넷을 준다는 마음으로 공을 던져야 합니다. 앞서 신정욱 선수처럼 무모하게 몸 쪽 승부를 걸었다간 또다시 장타를 허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절대 승부하지 마. 알았어?”
손진우 감독도 안영욱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여기서 또다시 한 방을 허용하면 최소 7 대 0이다.
스타즈 선발 김혜성의 완벽투에 막혀서 3회까지 안타 하나 때려내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얻어맞으면 오늘 경기는 쫓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앞선 타석 때처럼 유인구를 전부 걷어내며 안영욱을 압박했다.
“미치겠네. X발.”
7연속 파울의 늪에 빠진 안영욱이 홈플레이트 대신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상균 수석 코치가 손진우 감독에게 다가왔다.
“그냥 승부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맞으면?”
“이미 분위기는 넘어갔지 않습니까.”
“그래서? 홈 팬들 앞에서 박유성한테 탈탈 털리자고?”
“오늘 관중들 중에 상당수는 박유성 팬입니다. 아마 홈팬들도 박유성에게 얻어맞는 건 이해해 줄 겁니다.”
“하아. 나는 모르겠으니까 이 코치 마음대로 해.”
외통수에 몰린 손진우 감독이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런 손진우 감독을 대신해 이상균 수석 코치가 승부하라는 사인을 냈다.
벤치의 지시를 받은 포수 이근수는 곧바로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비록 완성도는 높지 않았지만 좌타자 바깥쪽으로 흘러 나가는 공이라면 박유성의 범타를 유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그래. 한번 해보자.”
길게 숨을 고른 안영욱이 투구판을 밟았다.
그러고는 이근수의 미트를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내던졌다.
후앗!
안영욱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밋밋하게 바깥쪽으로 날아들자 박유성은 상체를 기울여 골프를 하듯 방망이를 퍼 올렸고.
따악!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걸린 타구는 한참을 비행하다가 왼쪽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이 타구까지 넘어갑니다! 스타즈의 슈퍼 루키 박유성 선수가 3연타석 홈런에 이어 연타석 그랜드 슬램을 작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