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06화
36. 기록의 사나이(8)
박유성은 라커룸 안에 넣어놓았던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곧장 신화 여자 중학교 배구부 백용화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연락이 오는지 계속해서 연결할 수 없다는 기계음만 들렸다.
“참, 코치 전화번호가 있었지?”
박유성은 다시 안인범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인범 코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안 코치님 전화 맞죠? 저 박유성입니다.”
-어이구, 박유성 선수.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드릴까 하던 참이었는데 먼저 전화 주셨네요.
“기사 난 거 봤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아까 낮에 기자란 사람이 몰래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애들 떠드는 소리로 소설을 써 놨는데 참…….
“감독님은 연락이 안 되던데요.”
-말도 마십시오. 지금 감독님도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튼 사고 친 선수들은 징계할 예정이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징계라는 말에 박유성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학교에 몰래 숨어들어 간 홍민호 기자도 문제고 그런 홍민호 기자에게 멋대로 떠들어댄 학생들도 문제지만 이런 식으로 꼬리를 자르려는 학교 측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제 동생이라고 유선이가 특혜받은 게 있습니까?”
-어이구. 그럴 리가요. 유선이 말고도 다 선발 출전했습니다. 유선이가 끝까지 기용된 건 있지만 그건 유선이가 경기를 잘해서고요.
“확실한 거죠?”
-그럼요. 확실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신화 여중 배구부입니다. 학부모 입김에 좌지우지됐다면 국가대표를 꾸준히 배출하지 못했을 겁니다.
“일단 잘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기자님 찾아가시면 잘 말씀해 주세요.”
-그야 당연하죠. 뜬금없이 기사가 나서 지금 저희도 입장이 곤란한 상태입니다.
신화 여자 중학교 배구부는 신화 여자 고등학교 배구부와 마찬가지로 전국 최강이었다.
그렇다 보니 다른 학교들보다 더 철저하게 선수들을 선발하고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감독님께 제가 연락드렸다고 전해 주시고요. 죄송하지만 유선이 한 번만 바꿔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핸드폰 너머로 박유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야.
“유선아. 오빠가 잘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집에 가 있어.”
-나 괜찮은데.
“조금 이따가 기자들 몰려올 건데 네가 학교에 있으면 친구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일단 집에 가 있어. 코치 선생님한테는 내가 시켰다고 말하고.”
-알겠어.
박유선은 애써 담담한 척 굴었지만.
여동생과 60년을 부대낀 박유성은 목소리만 들어도 박유선의 심리 상태를 눈치챘다.
“어머니가 가실 거니까 짐 챙겨놓고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응. 그런데 오빠.
“왜?”
-아니지?
“뭐가? 내가 너 출전 부탁했냐고? 하아. 너 내 성격 모르냐? 내가 부탁을 했으면 빡세게 굴려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만 보충수업 받는 건가.
“아니. 그건 네가 못해서 받는 거지.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면 더 훈련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됐어. 끊어.
제멋대로 끊긴 핸드폰을 보며 박유성이 피식 웃었다.
마지막에 툴툴대는 걸 보니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때 최일준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유성아. 경기 시간 다 됐는데?”
“전화 할 데가 있어서요.”
“암튼…… 힘내라.”
기사를 봤는지 최일준이 박유성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최일준을 보며 말했다.
“형도 오늘 무조건 안타 쳐요.”
“그래. 꼭 안타 치마.”
“제 앞에 밥상 차려 주세요. 저 못 피하게요. 아셨죠?”
“너 인마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
“그동안 별짓 안 해서 오늘 좀 해 보려고요.”
당황한 최일준을 뒤로하고 박유성은 어머니 이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이건 제 일이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무 걱정 마시고 유선이 좀 집으로 데려오세요.”
-그래. 알았어.
“기자들 찾아오면 절대 문 열어주지 마시고요. 에이전시 통해서 연락 달라고 해주세요.”
이선영과 통화를 마치자 이번에는 송광철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슨 전화를 이렇게 오래 하는 거야? 설마 기자야?
“유선이 학교 코치님하고 통화했어요. 유선이는 엄마가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으니까 아저씨는 기자들 좀 막아 주세요.”
-그런데 기사 난 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래. 아닌 줄 알았다. 그럼 사실무근이라고 대응할게. 그보다 경기는 문제없지?
“그럼요. 저 프로입니다.”
-그래. 혹시 경기 결장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결장은요. 오늘 경기 꼭 보세요. 오늘 이 악물고 할 거니까.”
-어이구. 이거 이글스는 무슨 죄냐?
마지막으로 박유성은 나영진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유성아.
“기자님.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
-뭐든 말만 해.
“신화 여중 찾아가서 철저하게 조사해 주세요.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윤경이 신화 여중 갔다.
“윤경이 누나 흥분하면 막 나가니까 기자님이 옆에서 신경 좀 써 주세요.”
-내가 사수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암튼 넌 경기에만 집중해. 이딴 기사에 흔들리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저 박유성이에요.”
-그래.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먹잇감 주지 마라.
통화를 마친 박유성은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다른 선수들은 이미 더그아웃으로 나갔는지 라커룸은 텅 비어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저만치 김석률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통화는 다 했어?”
“네. 감독님.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암튼 아무 일도 아닌 거지?”
“네.”
“그래. 그럼 이제 나가자.”
다른 선수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결장을 시켰겠지만.
김석률 감독은 군말 없이 경기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김석률 감독을 보며 박유성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독님.”
“……?”
“저 오늘 경기 욕심 좀 내려고요.”
“욕심?”
“네. 인터뷰를 꼭 해야 할 거 같아서요.”
김석률 감독은 잠시 박유성을 바라봤다.
감정적으로 내뱉은 말이라면 잘 달래볼 생각이었는데 박유성의 단호한 눈빛을 보니까 말린다고 될 것 같지 않았다.
“죽지 마라. 기왕이면 제대로 보여 줘.”
“네. 감독님.”
“그래. 맘껏 날뛰어 봐라.”
뒤늦게 더그아웃으로 나온 박유성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타석을 준비했다.
-스타즈의 공격은 1번 타자 박유성 선수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경기 전까지 시즌 타율은 0.734. 270안타와 44홈런, 130타점을 기록 중입니다.
-서건찬 선수가 200안타를 넘어선 이후로 여러 타자들이 200안타에 도전했지만 전부 실패했었는데요. 박유성 선수는 지금 200안타를 넘어 300안타에 도전 중입니다.
-지금 페이스대로라면 300안타도 충분히 가능한 것 같은데요.
-가능하죠. 박유성 선수가 지금 경기당 2.5개 정도의 안타를 때려내고 있으니까 12경기를 더 소화하면 300안타가 됩니다.
경기 전 터진 기사 때문에 채팅창이 소란스러웠지만, 장호영 캐스터와 이선철 해설 위원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담담하게 중계를 시작했다.
하지만 마운드에 선 이글스의 4선발, 한정민은 달랐다.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가증스러운 새끼.”
손진우 이글스 감독은 확실하지 않은 기사로 호들갑 떨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야구계도 아니고 배구계의 일인 데다가 가장 먼저 기사를 쓴 당자사가 박유성과 앙숙인 홍민호 기자이다 보니 사실관계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중립을 지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박유성이 이끄는 스타즈에게 올 시즌 전패 중인 이글스 선수들은 홍민호 기자의 기사를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였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그런데 신화 여중이면 여자 배구 쪽에서는 최고 명문 아니야?”
“그건 신화 여고고요. 신화 여중은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그래?”
“신화 여중도 나름 잘 나가긴 하는데 재단에서 신화 여고만 지원해서 굳이 신화 여중 안 간다던데요?”
“어쨌거나 배구 시작한 지 2년밖에 안 된 1학년이 주전으로 뛰는 건 아니지.”
“또 모르죠. 동생도 박유성 같은 케이스일지도.”
“어휴,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유성이 쟤는 언제 메이저리그 가냐?”
“그러게. 빨리 좀 꺼져줬으면 좋겠네.”
지난 세 번의 시리즈에서 무려 두 번이나 등판해 패전 투수가 된 신정욱은 더 이를 갈았다.
“근수 형. 오늘은 정면승부로 가요.”
“뭐?”
“박유성도 멘탈 갈렸을 테니까 우리가 첫 삼진 잡아 보자고요.”
잠시 고민하던 포수 이근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경기 전 미팅 때 박유성에 대한 별도의 언급은 없었다.
앞서 이미 여러 차례 요주의 대상으로 꼽혔던 터라 알아서 조심할 거라 여기고 넘어간 것이다.
‘그래. 성적도 엉망인데 언제까지 박유성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어.’
자리로 돌아간 이근수는 초구에 몸쪽 하이 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박유성을 상대로 보통은 바깥쪽 승부를 거는 만큼 갑작스럽게 몸쪽으로 찌르면 박유성도 당황할 줄 알았다.
하지만 프로 40년 차인 박유성에게 초구부터 몸쪽 높은 공을 던진다는 건 오만한 짓이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처럼 160㎞/h에 육박하는 공을 던지는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147㎞/h의 밋밋한 작대기 속구를 가지고 박유성을 이겨낸다는 건 애당초 꿈같은 일이었다.
후앗!
신정욱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몸쪽으로 날아들자 박유성은 이를 악물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순간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새하얀 공이 센터 쪽으로 뻗어 나갔고.
“젠장할!”
다급히 뒷걸음질을 치던 중견수 조윤권은 몇 걸음 떼지 못하고 멍하니 타구를 지켜봐야 했다.
-박유성 선수가 신정욱 선수의 초구를 받아쳐 솔로포를 때려냅니다!
-역시 박유성 선수네요. 지금 신정욱 선수가 몸쪽 빠른 공을 기습적으로 찔러 넣었는데요. 기다렸다는 듯이 때려냈습니다.
-이렇게 되면 스타즈가 초반 분위기를 잡게 될 텐데요.
-일단 신정욱 선수는 박유성 선수에게 맞은 홈런을 빨리 잊어야 합니다. 그냥 줄 점수를 줬다고 생각하고 다음 타자들에게 집중하는 게 낫습니다.
이선철 해설 위원의 주문대로 신정욱은 블레이크 테일러와 박준수, 다니엘 브리토를 전부 범타로 돌려세우고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틀어막았다.
박유성의 선두 타자 홈런으로 후속 타자들의 스윙이 커지면서 어렵지 않게 아웃 카운트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러자 공수 교대 때 김석률 감독이 모처럼 쓴소리를 쏟아냈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유성이가 홈런을 쳤으면 분위기를 이어 가야지! 리그 1위라고 야구 대충할 거야?”
김석률 감독의 질책이 통했던지 2회 초, 선두 타자로 나선 장영호가 볼넷을 골라 나갔다.
평소 타석에서 참을성이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쉽게 방망이가 끌려 나오는 성격이었지만.
투 스트라이크까지는 스윙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공을 지켜본 끝에 연거푸 들어오는 유인구를 이겨낼 수 있었다.
선두 타자가 출루하자 김석률 감독은 곧바로 번트 사인을 냈고.
딱.
이동엽이 침착하게 3루 쪽으로 타구를 굴리며 1루 주자 장영호를 2루까지 진루시켰다.
1사 2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온 장태수가 중견수 쪽 뜬공으로 물러나면서 추가 득점이 무산되나 싶었지만.
“볼!”
8번 타자 박경호가 다시 한번 볼넷을 골라낸 데 이어 9번 타자 최일준이 중견수 앞에 뚝 떨어지는 안타를 때려내면서 2사 만루의 밥상이 차려졌다.
-이제 다시 박유성 선수의 타석입니다.
-지금 투아웃이긴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섣불리 승부를 걸었다간 대량실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