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03화
36. 기록의 사나이(5)
하다 하다 타석에서의 적극성에 대한 말들이 나오자 이선철 해설위원은 <베이스볼 X 심층분석> 방송을 통해 일각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일단 박유성 선수의 볼넷. 이대로 괜찮은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표현부터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득한데요?”
“그렇지 않아도 담당 PD한테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는데 담당 PD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늘 방송은 박유성 선수를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시선에 맞서는 방송이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질문을 만들었다는 건가요?”
“일본 우익 방송에서 캡쳐해서 쓰기 딱 좋은 질문이라 저도 걱정이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명쾌하게 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짝인 장호영 아나운서의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선철 해설위원은 웃지 않았다.
오늘 방송이 정말로 박유성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이들의 계도를 위한 거라면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선철 해설의 속내를 읽은 장호영 캐스터도 냉큼 웃음기를 없앴다.
“먼저 박유성 선수의 시즌 볼넷이 몇 개인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요. 오늘 경기까지 107경기에서 무려 156개의 볼넷을 골라냈습니다. 경기당 평균 1.45개 수준인데요. 지난 시즌 최다 볼넷 기록이 116개였거든요? 그런데 아직 43경기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보다 40개를 더 얻어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테이블세터의 미덕은 출루입니다. 테이블세터라는 표현처럼 클린업 앞에 밥상을 차리는 거죠.”
“그 기준에서 놓고 본다면 박유성 선수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셈인데요.”
“이미 볼넷 숫자가 프로 야구 한 시즌 최다 볼넷 기록을 갈아 치웠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테이블세터라고 해서 모두가 박유성 선수처럼 볼넷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볼넷은 테이블세터보다 클린업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고요.”
“실제로 시즌 볼넷 기록을 정렬하면 각 구단의 중심타자들이 대부분인데요. 테이블세터 중에서는 유일하게 박유성 선수만 눈에 띕니다.”
“과거 기종범 선수가 4할에 도전했을 때도 시즌 볼넷은 51개에 불과했습니다. 200안타를 처음으로 넘긴 서건찬 선수 역시 볼넷은 59개에 그쳤고요.”
“이유가 뭘까요?”
“큰 틀에서 놓고 봤을 때 박유성 선수와 기종범 선수는 서로 비슷하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무조건 장타를 노리기보다는 정확도 높은 타격으로 보다 많은 안타를 때려내는 데 집중하는 스타일이니까요.”
“두 선수에 비해서는 박유성 선수의 홈런 생산 능력이 조금 더 높지 않을까 싶은데 막상 안타당 홈런 비율을 따지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시죠.”
장호영 아나운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면이 바뀌며 박유성과 기종범, 서건찬의 비교표가 나왔다.
“일단 서건찬 선수가 3.5퍼센트로 낮은 편이고요. 기종범 선수가 9.7퍼센트고 박유성 선수는 16.3퍼센트네요.”
“서건찬 선수야 홈런을 많이 때려낸 타자가 아니니까 차치하고 호타준족의 대명사였던 기종범 선수와 비교를 했을 때 박유성 선수가 조금 더 많은 홈런을 때려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지표가 다른 클린업 타자들만큼 높지 않습니다.”
“프로야구 전체 홈런 1위인 박유성 선수를 제외하고 홈런 2위부터 홈런 10위까지의 안타당 평균 홈런 비율을 뽑아봤는데요. 23.7퍼센트가 나왔습니다.”
“거포의 기준을 20퍼센트 정도로 봤을 때 박유성 선수는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셈이죠.”
“하지만 조건을 바꿔서 타석당 홈런으로 바꾸면 수치가 확 달라집니다.”
장호영 아나운서의 말과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안타당 홈런 비율에서는 홈런 10걸 중에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던 박유성이 당당하게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박유성 선수의 타석당 홈런 비율이 무려 11.4퍼센트입니다. 거의 9타석당 한 번은 홈런을 때려낸다는 거죠. 반면 나머지 선수들은 타석당 홈런 비율이 10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 커리어 하이를 쓰고 있는 박준수 선수조차 9.9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나열해 놓으면 박유성 선수의 홈런 생산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역대 홈런왕들과 비교를 해봤는데요.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승협 선수의 기록이 11.7퍼센트입니다. 박유성 선수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박병오 선수와 신정수 선수 역시 비슷한 수치인데요. 이 선수들 모두 당시에는 투수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홈런 타자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7할 타율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실제 박유성 선수의 홈런 생산 능력은 대한민국 최고의 거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말씀이시네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투수들이 박유성 선수와 정면 승부를 피하는 겁니다.”
대다수 언론들은 박유성의 장타력보다 타율에 초점을 맞췄다.
프로 야구는 물론 세계 야구사에 다시는 없을 7할 타율을 이어가다 보니 다른 세부 지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타율이 높은 타자는 아무래도 장타력이 떨어진다고 평가되게 마련.
일부 야구 전문가들은 박유성의 안타당 홈런 비율을 언급하며 피해갈 이유가 없다고 역설하기도 했지만 타석당 홈런 비율의 결과는 프로 야구 레전드 거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2003년 이승협 선수가 56개의 홈런을 때려냈을 때 타율이 0.301이었습니다. 반면 지금 박유성 선수의 시즌 타율은 0.734입니다. 이승협 선수에게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타율만 놓고 보자면 이승협 선수보다 배 이상 잘 치고 있습니다.”
“이승협 선수처럼 홈런을 뻥뻥 때려낼 수 있는 타자가 이승협 선수보다 배 이상 많은 안타를 때려내면 투수 입장에서는 마운드에서 편히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데요.”
“게다가 박유성 선수는 침착합니다. 좋은 공을 골라서 때려내는 타자예요. 어떤 사람들은 자동 고의4구 때문에 볼넷이 늘어난 거라고 말하는데 박유성 선수가 골라낸 156개의 볼넷 중에 자동 고의4구가 60개 정도입니다.”
“정확하게는 61개입니다. 오늘 하나 추가해서요.”
“그 숫자를 빼도 순수 볼넷이 95개입니다. 다른 타자들의 올 시즌 볼넷보다도 많습니다.”
“까다롭게 승부를 걸어도 박유성 선수가 쉽게 속아주지 않으니까 투구수를 절약할 겸 자동 고의4구로 거르는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단순히 홈런에 집착하는 타자들은 눈에 들어오는 공에 쉽게 방망이가 나가지만 박유성 선수는 다릅니다. 7할이라는 시즌 타율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확도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입니다. 비교 데이터 자체가 없어요.”
“박유성 선수가 정확도까지 갖춘 홈런 타자이다 보니 투수들이 승부를 피하는 것도 당연해 보이는데요. 일각에서 주장하는 적극성 부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헛소리죠. 대답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촬영장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각종 프로 야구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논란을 말 한마디로 이렇게 속 시원하게 정리해 줄 수 있는 건 독설의 아이콘, 이선철 해설위원뿐이었다.
“현장에서 선수들에게 주문하는 게 있습니다. 개인플레이를 하지 말고 팀플레이를 하자. 팀을 위해 싸우자. 그런 얘기를 하면 선수들은 다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막상 경기에 들어가면 다들 개인 기록을 위해 싸웁니다. 요즘 컨디션이 좋은 타자에게 번트 사인을 내잖아요? 그럼 인상부터 씁니다. 안타를 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면 박유성 선수도 볼넷이 남발하는 지금의 분위기에 조바심을 느낄 만할 텐데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시즌 초반 잘나가던 신인들이 시즌 후반에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이유는 하납니다. 조바심. 처음에야 만만하게 보고 승부를 걸어주던 투수들이 더는 쉽게 덤벼주지 않거든요.”
“시즌 후반쯤 되면 어느 정도 분석이 끝났을 테니까요. 철저하게 약점을 파고들겠죠.”
“그럴수록 타석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실투를 기다려야 하는데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신인 선수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신인왕 타이틀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어떻게 참겠습니까?”
“신인왕뿐만 아니라 신인 관련 각종 기록들도 신경이 쓰이겠죠.”
“박유성 선수가 4월에 7할을 쳤을 때 저 역시도 시즌 막판까지 7할을 치지는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박유성 선수의 타격 재능을 의심했다기보다 다른 신인들처럼 결국 분석이 될 테고요. 집중 견제를 당하다 보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게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박유성 선수는 잦은 볼넷으로 타격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8월에도 시즌 타율 7할을 유지 중입니다.”
“그래서 대단한 선수라고 하는 겁니다. 한여름에 매일같이 야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박유성 선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입에서 또다시 박유성에 대한 극찬이 흘러나오자 장호영 아나운서가 냉큼 화제를 돌렸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야구 팬이라면 박유성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에 대해 감히 이견을 보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항간에는 스타즈 구단에서 박유성 선수의 성적 관리를 해주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글쎄요.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장호영 아나운서. 성적 관리의 기본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상대적으로 불리한 투수와의 맞대결을 피하게 해주는 거 아닐까요?”
“그런 방법도 있겠지만 기본은 체력 관리입니다. 매일같이 경기를 치러야 하는 야구의 특성상 체력이 달리면 안타를 때려낼 수가 없어요. 특히나 장기 레이스를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인들은 대부분 시즌 막판에 가면 죽을 쑵니다. 중간 중간에 웨이트를 열심히 해도 한여름만 되면 다들 물먹은 방망이가 돼요.”
“감독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겠네요.”
“당연히 신경 쓰이죠. 구단에서 신인왕이 나오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니까요. 설사 신인왕 경쟁과 멀어졌다 하더라도 팀의 미래로 키울 만한 선수들은 성적이 더 떨어지지 않도록 출전 시간을 조정합니다. 장호영 아나운서가 말한 것처럼 좌투수에게 약하다면 좌투수가 선발로 나올 때 하루 휴식을 주거나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박유성 선수는 올 시즌 단 한 번도 선발 명단에서 빠진 적이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조금 걱정이 됩니다. 박유성 선수도 신인인 만큼 체력적인 부담이 상당할 텐데 지금 계속해서 선발로 나오고 있잖아요?”
“스타즈가 치열한 순위 다툼 중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이미 리그 우승이 확정적인 상황이고요.”
“아직 매직 넘버가 남아 있긴 하지만 사실상 의미가 없죠. 40경기 이상 남은 잔여 일정을 전부 이길 수 있는 팀이 있겠습니까?”
7월 월간 성적을 18승 5패로 마친 스타즈는 77승 19패로 8할 승률을 지켜냈다.
그리고 8월 11경기에서 10승 1패를 거두며 90승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현시점 2위인 타이거즈의 성적은 58승 49패.
매직 넘버가 14경기 남아 있지만 승차가 30경기나 나다 보니 타이거즈의 역전 우승은 사실상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