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302화 (302/412)

타자 인생 3회차! 302화

36. 기록의 사나이(4)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무거운 얼굴로 사장실을 나오자 비서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오래 걸리셨네요.”

“중요한 얘기를 좀 하느라요.”

“그래서 얘기는 잘 끝나셨어요?”

“그럭저럭?”

“다행이네요.”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발걸음을 옮기자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서가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피터 페츠와 브라이언 조던을 담당하는 에이전트, 조쉬 애버튼의 핸드폰에게 전달됐다.

“그럭저럭 얘기가 끝났다? 그럼 대충 결론이 나왔다는 건가?”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조쉬 애버튼이 로이 홀랜드 보좌역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로이 홀랜드입니다.

“조쉬입니다. 로이.”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빠르시네요.

“아시잖습니까. 요즘 이 일에 매달려 있는 거.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6년에 9천만 달러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6년에 9천만이라. 1억 달러가 머지 않았네요.”

-금액을 양보할 생각은 없는 겁니까?

“브라이언에게는 상징적인 금액입니다. 오랜 꿈 같은 금액이죠. 에이전트로서 그 꿈을 이뤄주고 싶습니다.”

-앤드류와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로이.”

-고맙긴요. 대신에 조쉬도 하나는 양보해 주세요.

“어떤 걸 말입니까? 설마 계약 기간이요?”

-계약 기간은 그대로 갈 겁니다. 다만 2년 후 옵션을 걸었으면 합니다.

“옵션?”

-앤드류는 브라이언의 발목 상태를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완쾌됐다 하더라도 심리적인 부담감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경기 중에 펜스에 부딪쳤다가 발목이 완전히 돌아갔습니다. 그날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야구 팬들이 충격으로 심리 상담을 받았을 정도에요.”

-알죠. 저도 그 영상은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으니까요. 브라이언이 완벽하지 않은 발목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압니다. 다만 앤드류는 브라이언이 예전처럼 견고한 수비를 보여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습니다. 옵트 아웃이나 바이 아웃은 어느 계약에나 존재하니까요. 다만 2년은 너무 짧습니다.”

-조쉬. 그건 제가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옵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장기 계약은 내년으로 밀리게 될 겁니다.

“내년이라. 그러다 브라이언이 다른 구단으로 이적하면 어쩌려고요?”

-조쉬. 메이저리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리그입니다. 해마다 수많은 선수들이 나타나고 사라지죠. 브라이언이 그랬던 것처럼 내년 시즌에 괜찮은 루키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다른 팀에서 뛰고 있는 외야수가 다저스행을 희망할 수도 있고요.

“하아. 일단 생각 좀 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조쉬 애버튼이 곧바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마크 우드가 냉큼 말을 붙였다.

“2년 후 바이 아웃 조건을 넣자는 얘기인가요?”

“그래. 아무리 썬에 눈이 뒤집혔어도 그렇지 브라이언을 대체 선수 취급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말이 안 되죠. 말이 안 되는데…… 내년으로 계약을 넘기면 안 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에이전트가 가장 싫어하는 건 관리하는 선수들끼리 부딪치는 것이었다.

브라이언 조던은 내년 시즌까지 잘 마치면 FA 자격을 얻는다.

2027년 말 발목 부상을 당한 이후 예전만큼의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있으니 올해 무리해서 장기 계약을 추진하기보다 내년 시즌 반전을 노리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년 시즌에는 피터 페츠의 장기 계약을 진행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피터 페츠와 브라이언 조던이 서로 다른 팀에서 뛰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두 선수는 전부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다저스 입장에서는 브라이언 조던보다 피터 페츠와의 계약에 집중할 터.

그 과정에서 브라이언 조던의 계약이 뒤로 밀리면 6년에 9천만 달러는커녕 4년 계약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제 생각에는 다저스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2년 후 바이 아웃을 받자고? 제정신이야?”

“조쉬.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요. 썬의 올 시즌 활약상은 일시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의 리그는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수준이 높습니다. 세계에서는 세 번째고요. 썬의 월간 타율이 계속 낮아지는 걸 봐요. 이 추세라면 시즌 타율 7할도 무너질 거예요.”

“그러니까 썬의 거품이 빠지길 기도라도 하자는 거야?”

조쉬 애버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마크 우드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조쉬. 썬을 원하는 건 다저스뿐만이 아닙니다.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이 썬을 원하고 있어요. 하지만 썬은 한 명뿐이죠.”

“모두가 썬을 영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30개 구단 중에 승자는 가장 큰 돈을 쓴 구단이 될 겁니다. 하지만 쓸 수 있는 돈은 결국 한계가 있겠죠.”

“그렇지. 언론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검증되지 않은 아시아 타자에게 5억 달러 계약을 안겨줄 수는 없으니까.”

“그건 진짜 터무니없는 소리죠. 마크 스테리도 5억 달러를 넘기기 힘들 거란 의견이 많잖아요?”

양키즈가 간판 타자인 마크 스테리와 장기 계약을 논의 중인 상황이지만 언론은 빨라야 내후년일 박유성의 계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언론들은 총액 5억 달러 이상도 가능하다는 전망을 쏟아냈다.

물론 지금의 활약상이 계속 유지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덕분에 박유성에게 낀 거품은 꺼질 줄 모르고 점점 더 부풀러 오르는 중이었다.

“다저스를 비롯해 여러 구단들이 돈을 마련할 겁니다. 어쩌면 정말로 5억짜리 계약을 준비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썬은 돈만 좇는 중남미 출신이 아닙니다. 안정적인 걸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 출신이죠.”

“안정적인 것?”

“자리 보장이요. 다저스에서 2년 후 바이 아웃을 원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만에 하나 썬을 영입했을 때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잖아요?”

“그래서 괘씸하다는 거잖아!”

“조쉬. 침착해요. 흥분할 필요 없어요. 썬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가까워지면 아마 다른 구단들도 온갖 방법으로 썬의 자리를 만들려고 할 겁니다. 협상에서 다저스에 밀리고 싶지 않을 거라고요.”

마크 우드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조쉬 애버튼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썬이 도중에 포지션을 바꾸지 않는 한 썬의 영입이 가능한 구단의 중견수들은 파리 목숨이 될 거예요. 하지만 그건 다른 의미로 기회일지 모릅니다.”

“기회?”

“썬 때문에 자리가 위태로워진 선수들이 그대로 팀에 남아 있을까요? 사정상 잔류하는 선수도 있겠지만 분명 상당수는 이적을 선택할 겁니다. 그럼 대혼란이 오겠죠.”

“흠…….”

“만약에 그때 브라이언이 옵트 아웃으로 시장에 나오면 어떨까요? 계약 조건이 남아서 트레이드밖에 할 수 없는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조쉬 애버튼이 홀리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크 우드의 말처럼 다른 빅마켓 구단들이 다저스를 따라 움직여 준다면 계약 문제가 깔끔한 편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다저스에서 썬을 놓친다면 다저스와 재계약을 할 수 있겠지.”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받아낼 수 있을 겁니다. 트레이드를 통해 타 구단의 선수를 받아오는 것보다는 브라이언을 잡는 게 나을 테니까요.”

“다저스에서 썬을 잡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20퍼센트? 30퍼센트?”

“냉정하게 따져서 10퍼센트 미만입니다.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큰돈을 쓰는 걸 싫어하잖아요? 지금은 썬에게 푹 빠져 있지만 추후 거품이 잔뜩 낀 계약서를 보면 정신이 번쩍 들 겁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조쉬 애버튼이 씩 웃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껏 받은 수모를 고스란히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참, 썬은 요즘 어때? 가까스로 7할 타율을 지켰다는 기사는 봤는데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위기 상황입니다.”

“위기?”

“작년에 로비 마르티네즈가 시즌 막판에 부진했던 거 기억하시죠?”

“그래서 막판에 MVP를 놓쳤잖아.”

“그때 레드삭스가 하필 양키즈에게 추월당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 팀들이 엄청 견제했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로비 마르티네즈도 슬럼프에 빠졌고요.”

LA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아메리칸 리그 동부 리그 1위를 달리던 레드삭스는 올스타 브레이크 직후 충격의 8연패를 당하며 양키즈에게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레드삭스와 와일드카드 시리즈에서 맞붙게 될지 모르는 팀들은 레드삭스에 에이스 카드를 총출동시키며 악착같이 싸웠고.

그 과정에서 간판 타자인 로비 마르티네즈와의 승부를 철저하기 패했는데 로비 마르티네즈가 그걸 참지 못하고 나쁜 공을 건드리기 시작하면서 리그 MVP를 마크 스테리에게 뺐겼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지금 썬의 상황이 그렇다는 거야?”

“어제 경기에서 썬은 5타석 중에 4번이나 볼넷을 얻었습니다. 상대 팀에서 아예 상대를 해주지 않았어요.”

“흠…….”

“이 추세로 간다면 썬의 타격 페이스도 뚝 떨어질 겁니다.”

메이저리그 분석가 출신인 마크 우드는 박유성도 조바심에 무너질 거라 단언했다.

하지만 정작 박유성은 좋은 공을 기다리는 데 익숙했다.

2회차 시절 체중을 늘리면서 투수들이 부담스러워하는 타자가 됐고.

정면 승부를 피하는 투수들과 20년간 싸우는 과정에서 인내를 배운 것이다.

-아, 이번 공도 빠집니다. 볼 넷. 박유성 선수가 오늘 경기 세 번째 볼넷을 골라냅니다.

-방금 공은 사실 칠 만했거든요? 그런데 박유성 선수. 독하네요. 반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잘하고 있는 겁니다. 투수들이 승부를 피한다고 무리해서 덤벼들다 보면 타격 밸런스가 흔들리거든요.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자신만의 스트라이크 존을 명확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다.

위즈와의 경기가 도화선이 됐던지 이후 상대하는 팀들은 부담없이 박유성을 걸렀다.

1회 선두 타자로 나섰을 때 승부해 주는 구단은 그나마 양반.

포스트 시즌 티켓에 정신이 팔린 구단은 1회부터 박유성을 고의4구로 걸러 버렸다.

그 과정에서 박유성은 자이언츠의 용병 타자 호르세가 기록했던 127볼넷 기록을 가볍게 넘어 시즌 150볼넷을 돌파했다.

└이 기세면 배리 본드 기록도 깨겠는데?

└배리 본드 기록이 몇 개임?

└232개요.

└농담이죠?

└진짠데요?

└헐, 이왜진? 진짜 232개인데? 심지어 2위 기록과 3위 기록도 배리 본드임.

└배리 본드 전성기 때는 투수들이 피하기 바빴죠.

└응. 약물빨이야.

└그 시절에는 약물 안 한 선수가 드물지 않았음?

└그래서요? 약물 한 게 자랑입니까?

└아직도 배리 본드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네. ㅋㅋㅋ

└그런데 산술적으로 배리 본드 기록 깨는 게 가능해요?

└지금 남은 경기가 50경기인데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박유성 후반기 8경기에서 볼넷 3개 이상 얻어냄.

└남은 경기에서 같은 패턴이면 150개 추가인데? ㄷㄷㄷ

└솔직히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전까지 시즌 최다 볼넷이 124개였는데 200개 넘기는 건 좀…….

└투수들이 승부를 안 해주는 걸 어떻게 합니까?

└자동 고의4구로 거르는 건 이해하지만 나머지는 박유성이 타격할 수도 있잖아요?

└그 개 같은 논리는 뭐죠? 투수가 좋은 공을 안 줘도 타자가 쳐줘야 함? ㅋㅋㅋ

└딱 보니까 박유성 승부 피했다고 요즘 까이는 구단 팬 같은데 정신 차려요. 결국 박유성한테 얻어맞는 게 두려워서 승부 피하는 거잖아요. 그래놓고 박유성이 안 쳤다고 운운하는 건 너무 치졸한 거 아님?

└음주운전 가해자가 피해자더러 피하지 않았다고 탓하는 꼴이죠.

└ㅋㅋ 비유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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