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00화
36. 기록의 사나이(2)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4할 타자는 백연천 단 한 명뿐이었다.
1994년 바람의 아들 기종범이 4할 타율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이후 4할은커녕 0.390을 넘긴 타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야구를 잘 모르는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은 대한민국 야구계를 변방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이언츠의 파르한 제이디 사장도 그런 부류 중 한 명이었다.
“한국에서 7할을 치는 걸 가지고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거 아냐?”
“한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야구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와 일본 다음이죠.”
“시장이 크다고 해서 야구 수준이 높은 건 아니잖아? 지금 한국 출신 메이저리그가 몇 명이야?”
“단순히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출신국을 가지고 야구 수준을 논하긴 어렵습니다. 한국에서도 FA로 1,500만 달러 이상의 계약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1,500만 달러라.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그 정도만 받았으면 좋겠어.”
파르한 제이디 사장이 코웃음을 쳤다.
지난해 자이언츠가 지출한 연봉 총액만 2억 7,700만 달러였다.
그리고 올해는 그보다 800만 달러 많은 2억 8,500만 달러를 선수들에게 썼다.
메이저리그 선수 1명당 1,100만 달러 정도를 받아간 셈(26인 로스터 기준).
아시아 야구 시장이 크다고 해도 감히 메이저리그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다저스 얘기는 뭐야?”
“다저스와 양키즈가 내년 시즌 서울 개막전을 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가능하겠어?”
“메이저리그 일정이 한국 야구 일정보다 1주일 빠른 편이라 사무국에서도 긍정적으로 고려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프로 야구가 양대 리그 체제로 전환되면서 뜸해지긴 했지만.
서울 개막전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그럼 유럽 경기는?”
“서울 개막전과는 별도로 진행되지 않을까요?”
“이럴 거면 그냥 아시아 팀하고 유럽 팀을 메이저리그에 합류시키라고 해.”
파르한 제이디 사장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선수 노조의 욕심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데 메이저리그의 세계화랍시고 허튼 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자 카일러 하셀 보좌역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유치를 희망해야 합니다.”
“어딜? 서울? 미쳤어?”
“다저스와 양키즈는 총대를 멘 것에 불과합니다. 레드삭스와 레인저스, 에인젤스, 메츠, 내셔널스, 애스트로스, 블루제이스까지 전부 서울 개막전을 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돈을 얼마나 주기에 그러는 거야?”
“한국은 야구 불모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야구 최강국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도 안 되는 일에 빅마켓들이 전부 나섰다는 거야? 설마……?”
“네. 그 설마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썬을 데려오려고 서울 개막전까지 감수하겠다는 거야?”
해외에서 치르는 개막전은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일종의 팬서비스 차원으로 진행되는 경기이다 보니 경기료를 많이 받을 수도 없거니와 장거리 비행과 시차 문제로 선수들의 컨디션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었다.
메이저리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이고 세계 최고의 국제 대회인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주관하는 만큼 세계 야구계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하더라도 그 부담감을 자처해서 나눠질 구단은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고작 박유성 하나 때문에 서울 개막전에 열을 올리다니.
“다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파르한 제이디 사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당장 내년에 메이저리그에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2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선수를 두고 세계 야구를 대표하는 빅마켓 구단들이 벌써부터 이런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타니 쇼헤 때도 이랬나?”
“그때도 도쿄 개막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지만요.”
“도쿄 경기가 언제였지?”
“2019년입니다. 매리너스와 어슬레틱스가 경기를 치렀죠.”
오타니 쇼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건 2017년 겨울.
당시 만 25세 미만 선수의 경우 해외 아마추어 계약을 해야 하는 조건에 따라 오타니 쇼헤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늦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왔지만 오타니 쇼헤는 돈보다 도전을 선택하며 에인젤스 유니폼을 입었다.
2018년 0.285의 타율과 22홈런으로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을 받은 오타니 쇼헤는 2019년과 2020년, 다소 부침을 겪다가 2021년에 46홈런과 9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 MVP를 차지했고.
이듬해인 2022년에도 34홈런과 15승을 따내며 오타니 쇼헤 신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런 오타니 쇼헤도 박유성만큼의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만약에 말이야. 오타니 쇼헤와 썬, 둘 중에 한 명을 영입할 수 있다면 누굴 영입하겠어?”
“오타니 쇼헤는 2021년 기준인가요?”
“2021년도 좋고 2022년도 좋아. 가장 좋았던 시즌을 기준으로 하자고.”
“그렇다면 당연히 오타니 쇼헤죠. 썬은 메이저리그에서 보여준 게 없지만 오타니 쇼헤는 아메리칸 리그 MVP 선수니까요.”
“그렇지? 당연히 오타니 쇼헤지?”
“다만 두 선수 다 메이저리그에 오기 전이라면 썬을 선택하겠습니다.”
“어째서? 오타니는 40홈런을 때려낸 강타자인데?”
“오타니 쇼헤가 40홈런 이상을 친 시즌은 2021년뿐입니다. 이후로는 30개 전후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그 자체로도 대단한 활약이겠지만 타자를 평가하는 데 홈런이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카일러. 우리 팀에 30홈런을 치는 타자가 합류했다고 생각해 봐. 루이스 넬슨과 클레버 볼트와 함께 홈런을 뻥뻥 때려내는 타자가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라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자 파르한 제이디 사장이 열을 냈다.
내셔널 리그 최강의 클린업이라 불리는 루이스 넬슨-클레버 볼트-제이슨 보우저 라인에 연평균 30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전성기 시절의 오타니 쇼헤가 합류한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하지만 카일러 하셀 보좌역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타니 쇼헤는 분명 좋은 타자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팀에 오더라도 도움이 되겠죠.”
“지금은 아니야. 실력에 비해 몸값이 너무 비싸다고.”
“오타니 쇼헤는 에인젤스와 4억 5천만 달러에 계약했습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실력에 비해 몸값이 싸다는 평가를 받았고요.”
2023년 시즌 종료 후 오타니 쇼헤와 에인젤스는 10년, 4억 5천만 달러 계약에 합의했다.
한때 계약 총액 5억 달러를 넘길 거라는 예상들이 쏟아졌지만 에인젤스의 자금 사정과 에인젤스에 남고 싶어 하는 오타니 쇼헤의 의지가 절충되면서 기대에 살짝 못 미치는 계약이 이루어졌다.
“오타니 쇼헤 평균 연봉이 메이저리그 전체 1위지?”
“올 시즌에 마크 스테리가 오타니 쇼헤의 계약을 넘어설 거란 전망이 나오고 있긴 합니다.”
“오타니 쇼헤는 투타겸업이잖아. 마크 스테리가 2년 연속 MVP를 받았다 하더라도 오타니 쇼헤를 넘긴 힘들 거야.”
5억 달러를 넘지는 못했지만 오타니 쇼헤는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10년 총액 4억 5천만 달러이니 연평균 4,500만 달러.
거기에 추가로 붙은 옵션들까지 감안하면 거의 5천만 달러 수준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반면 양키즈의 간판 타자, 마크 스테리는 마운드에 설 수 없는 타자였다.
5년 연속 30+ 홈런에 2년 연속 50홈런 이상을 때려내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활약하고 있지만 앞서 엇비슷한 활약을 선보였던 선배 타자들의 전례를 봤을 때 2,000만 달러이던 연봉이 단숨에 배 이상 뛰어오를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마크 스테리의 계약은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글쎄. 어쩌면 오타니 쇼헤가 넘지 못했던 총액 5억 달러도 가능할지 모르지.”
“계약 기간은요?”
“마크 스테리가 2004년생이니까 14년 정도 어때?”
“그럼 연평균 3,500만 달러 정도인데 마크 스테리가 할까요?”
“안 하겠지. 하지만 다른 구단의 제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만약에 우리 구단에 온다면요?”
“나라면 5억 5천만 달러쯤 부르겠어. 계약 기간을 1년 늘리고 말이야.”
“그래도 3,700만 달러가 안 되네요.”
“그 정도면 많이 받는 거지. 마크 스테리가 평생 50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카일러 하셀 보좌역은 타자에게 홈런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파르한 제이디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홈런이야말로 야구의 꽃.
타율이 조금 높은 타자보다는 화끈한 장타로 경기장을 뜨겁게 달궈줄 선수가 더 많은 연봉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마크 스테리가 4천만 달러 이상을 받아내려면 이번 계약은 욕심부리지 말아야 해. 아니면 4년쯤 있다가 옵트 아웃으로 나오든가.”
“지금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한가요?”
“아니. 충분하지. 그래서 문제야.”
“그래서 문제라니요?”
“난 마크 스테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물론 좋은 타자지. 50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힘과 3할 3푼을 치는 정확도. 그리고 100개 이상의 볼넷을 골라내는 선구안까지 나무랄 데가 없어. 그런데 보통은 두어 시즌 잘하면 폼이 떨어지게 마련이잖아? 그런데 마크 스테리는 그런 게 없어.”
“꾸준한 게 문제인가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볼까? 마크 스테리는 작년보다 재작년에 조금 더 잘했어. 그리고 올해보다 작년이 조금 더 낫지. 만약에 말이야. 내가 마크 스테리에게 연평균 5천만 달러를 안겨줬는데 성적이 계속 하락세라고 생각해 봐. 언론이 뭐라고 떠들어댈까?”
“그야…….”
“실패한 계약이라고 떠들어대겠지. 만약에 마크 스테리가 원하는 만큼의 연봉을 받으려면 그 계약이 끝날 때까지 지금처럼 활약해 줘야 해.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부상 없이 매 시즌 풀타임을 소화하면서 50개의 홈런을 때려낼 수 있을까?”
“…….”
카일러 하셀 보좌역은 입을 다물었다.
데뷔 후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만 놓고 보자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지만.
구단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는 확실히 위험부담이 큰 투자 같았다.
“15년에 5억 5천만 달러면 연평균 3,700만 달러가 안 된다고 했지? 틀렸어. 중간에 세 시즌 정도는 부상으로 쉴 테니까 거의 4,600만 달러 수준의 계약이라고.”
“만약에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면요?”
“그렇다면 옵트 아웃을 행사하겠지. 마크 스테리가 계약 이후에도 건강하게 시즌을 소화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면 더 좋은 조건을 제안해야지. 그게 당연한 거 아냐?”
“그때는 연평균 4,500만 달러도 가능한 겁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 물론 계약 기간은 줄어들겠지만.”
잠깐 이야기가 새긴 했지만.
카일러 하셀 보좌약은 파르한 제이디 사장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번 시즌 다소 주춤하긴 하지만 마크 스테리는 아메리칸 리그 MVP 3연패에 도전하는 홈런 타자다.
그런 마크 스테리의 계약조차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메이저리그도 아닌 자국 리그에서 7할을 치는 박유성에게 거액을 투자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중견수 알렉스 카리오의 대체 선수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박유성을 포기하는 건 성급해 보였다.
“썬은 단순히 7할 타자가 아닙니다. 홈런도 41개를 때려내고 있습니다.”
“그래봐야 한국에서잖아. 메이저리그에 와서 몇 개나 치겠어?”
“레인저스의 쏭은 지난 시즌 19개의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올 시즌에는 20개 이상의 홈런이 유력하고요.”
“쏭도 한국 선수지? 메이저리그에 오기 전까지 몇 개나 쳤는데?”
“45개입니다.”
“45개? 그런데 메이저리그에서 20개를 친다고?”
“한국의 리그 수준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키와 캄, 쏭 모두 한국에서 최고의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썬처럼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진 못했죠.”
“흠…….”
“썬이 메이저리그에 오면 성적이 떨어질 거라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키와 캄, 쏭의 성적 추이와 비교했을 때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