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98화
35. 리얼 올스타(13)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선두 타자 이동엽 선수가 출루합니다.
-지금 한복판으로 공이 몰렸는데요. 신인이라 해도 이동엽 선수가 저런 공을 놓칠 타자가 아닙니다.
-최현준 선수가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있는데요.
-투 스트라이크까지 잘 잡아 놓았으니까요. 연달아 유인구를 던질 게 아니라 과감하게 빠른 공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선두타자 이동엽이 불리한 볼카운트를 극복하고 안타를 치고 나가자 김석률 감독은 즉시 장태수를 빼고 대타를 기용했다.
-첫 타석에서 결승 홈런을 때려낸 장태수 선수를 대신해 오진욱 선수가 대타로 나옵니다.
-확실하게 번트를 대겠다는 얘기겠죠. 경기 초반이라면 장태수 선수로 밀고 가겠지만 8회 말이니까요. 여기서 한 점은 의미가 다를 겁니다.
김석률 감독의 지시대로 오진욱은 1루 쪽으로 예쁘게 번트를 대서 이동엽을 2루로 보냈다.
그러자 이강천 감독도 곧바로 마운드로 향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최대한 어렵게 승부해. 볼넷을 내줘도 좋으니까 낮게 던지라고. 알았지?”
오늘 경기에서 박경호는 단 한번도 출루를 하지 못했다.
3타수 무안타에 희생번트 한 번.
후반기 시작 이후 타율이 2할이 되지 않을 만큼 타격감이 확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고작 한 점 차이인 만큼 박경호로 밀고 갈 거라 여기고 최현준을 다독였건만.
이강천 감독이 내려가기가 무섭게 김석률 감독이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왔다.
-아, 또 대타인가요?
-대단합니다. 김석률 감독이 여기서 승부수를 꺼내 드네요.
-지금 박경호 선수를 대신해서 홍원희 선수가 타석으로 나옵니다. 올 시즌 56경기에 출전해 0.265의 타율을 기록 중입니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좌익수로 자주 기용이 됐습니다만 올 시즌에는 주로 경기 후반에 대타로 나오고 있는데요. 타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7개의 홈런과 21타점을 올렸습니다.
-확실히 찬스에 강한 느낌인데요.
-이렇게 되면 공은 다시 위즈 쪽으로 넘어간 느낌입니다.
-이강천 감독이 지금 코치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요. 지금 불펜에 몸을 풀고 있는 투수가 마무리 한용민 선수뿐이거든요.
-이강천 감독 입장에서는 최현준 선수를 최대한 길게 끌고 가고 싶을 텐데요. 그 구상대로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2026년 드래프트에서 우선 지명으로 데려온 최현준은 미래의 선발 자원이었다.
188㎝의 건장한 체격에 160㎞/h까지 나오는 포심 패스트 볼에 매료된 이강천 감독은 최현준에게 빠른 군복무를 주문했고.
구단의 도움으로 경찰청에 입단하게 된 최현준은 퓨처스 리그에서 빠르게 성장하며 작년 말 위즈로 돌아왔다.
퓨처스 리그에서의 경기를 빠지지 않고 챙겨 본 이강천 감독은 최현준이 충분히 선발진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하지만 스프링 캠프 도중에 팔꿈치 부상을 당하면서 모든 구상이 틀어졌다.
다행히 수술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당분간은 긴 이닝을 던질 수 없다는 말에 이강천 감독은 최현준을 불펜으로 돌렸다.
경기 경험도 쌓으면서 최현준의 약점으로 지적받던 위기관리 능력을 키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올 시즌 롱릴리프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최현준이다 보니 이강천 감독도 섣불리 바꾸기가 애매했다.
“이번 이닝까지는 현준이에게 맡기자고.”
이강천 감독은 다시 마운드에 오르는 대신 불펜에 투수를 한 명 더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최현준이 이번 이닝을 잘 막아주고 9회 초에 타자들이 경기를 뒤집어준다면 바로 한용민을 투입하겠지만.
만에 하나 동점에서 9회 말을 맞는다면 한용민 카드를 바로 쓸 수가 없었다.
본래 연장까지 고려해 최현준을 올린 거지만 최현준의 컨디션으로 봐서 긴 이닝을 소화하기란 쉽지 않을 터.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투수를 준비시킨 건데 최현준은 그런 이강천 감독을 오해했다.
‘날 못 믿으시는 건가?’
괜히 불안해진 최현준은 다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 이닝을 잘 틀어막고 이강천 감독에게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정신을 지배하면서 투구 밸런스가 흔들렸고.
“볼!”
홍원희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고 말았다.
-루상에 주자가 두 명으로 늘어납니다.
-최현준 선수로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최일준 선수를 병살로 잡아내지 못한다면 박유성 선수까지 차례가 돌아옵니다.
-지금 이강천 감독이 다시 코치들을 불러 모았는데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3루 쪽 더그아웃을 비추던 중계 카메라가 다시 대기 타석으로 들어선 박유성에게 향했다.
오늘 경기에서 4타석 연속으로 볼넷을 골라서일까.
허공을 가르는 스윙에 한껏 날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보던 이강천 감독이 서영빈 수석코치를 보며 물었다.
“투수를 바꿔야 할까?”
“일준이가 언더핸드 투수 상대로 강합니다. 신인급 투수들의 공은 잘 공략하지 못하고요.”
“현준이가 일준이를 땅볼로 유도할 수 있을까?”
“땅볼이 아니더라도 범타로 잡아내기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 다음에 유성이는 거르면 되는 거고요.”
“유성이로 만루를 채우자고?”
“욕은 제가 먹겠습니다. 그러니까 현준이로 밀고 가시죠.”
“흠…….”
이강천 감독의 시선이 다시 최용필 투수 코치에게 향했다.
그러자 최용필 투수 코치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투수를 바꾸려면 좌완인 용민이를 올려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현준이로 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현재 위즈는 불펜 투수들이 과부하에 걸린 상태였다.
앞서 치른 랜더스-트윈스-타이거즈와의 홈 6연전에서 3승 3패를 거두는 동안 필승조를 총동원한 탓에 오늘 경기에 내세울 수 있는 투수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좌완 불펜 투수를 다시 준비시키기도 어려운 상황.
언더핸드를 상대한 경험이 많은 최일준 앞에 이정신을 올리느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최현준으로 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 지금 그대로 가는 것 같은데요?
-글쎄요. 좌완 투수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급한 대로 한용민 선수라도 올려서 불을 꺼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일단 최일준 선수까지 상대한 다음에 박유성 선수 타석 때 투수를 바꾸려는 생각일까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최현준 선수를 바꿔 줄 때입니다. 스트라이크를 전혀 던지지 못하고 있어요.
이선철 해설위원이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경기는 그대로 속행됐다.
‘욕심부리지 말자. 무조건 오래 보자.’
타석에 들어선 최일준은 길게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최선의 결과를 떠올렸다.
가장 좋은 건 여기서 최현준을 상대로 안타를 때려내는 것이었다.
홈런을 치면 더 좋겠지만 싹쓸이 2루타만 때려내도 오늘 경기를 수월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위즈는 박유성을 거를 것이다.
‘우리 유성이가 기자들의 먹잇감이 되도록 놔둘 수는 없어.’
최일준은 위즈에서 최현준을 그대로 내버려 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불펜에서 몸을 푸는 언더핸드 이정신을 상대로는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 중이었다.
그렇다고 지고 있는 상황에 마무리 투수 한용민을 투입하기도 부담스러울 터.
결국 최현준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저 녀석의 공을 제대로 공략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한창 컨디션이 좋을 때 최현준은 상대하기 쉽지 않은 투수였다.
155㎞/h가 넘는 빠른 공을 겁 없이 몸쪽으로 찍어 던지면 방망이 중심에 맞춰도 타구가 멀리 뻗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제구가 흔들리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제아무리 빠른 공도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와야만 의미가 있는 법.
특히나 공을 정확하게 맞추는 데 초점을 맞춘 최일준의 타격 스타일상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만루를 만들자. 그래서 유성이를 피하지 못하게 만들자.’
최일준은 일부러 방망이를 짧게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초구와 2구째 연달아 날아든 낮은 코스의 유인구를 전부 참아냈다.
“젠장할.”
볼 카운트가 투 볼로 몰리자 최현준도 숨이 가빠졌다.
여기서 최현준이 볼넷으로 나가 버리면 1사 만루에서 박유성이 타석에 들어선다.
그 상황에서 박유성을 직접 상대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만에 하나 강판이 되어서 다음 투수가 주자를 전부 불러들인다면?
2점대로 잘 유지하던 평균 자책점이 폭등하게 될 것이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른 최현준은 포심 패스트볼 그립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고 한복판으로 공을 내던졌다.
하지만 최일준도 눈을 질끈 감고 그 공을 무시해 버렸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라면 몰라도 투 볼에서 이 공을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최현준 선수가 한복판에 빠른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아냅니다.
-지금 실투였는데요. 최일준 선수가 이 공을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놓친 게 아니라 흘려 보낸 건가요?
-최일준 선수 정도 되는 베테랑이 한복판 빠른 공을 놓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최현준 선수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타격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마도 최일준 선수는 안타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예상대로 최일준은 4구와 5구를 연거푸 골라내며 기어코 볼넷을 얻어냈다.
특히나 5구째 들어온 바깥쪽 슬라이더는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만했지만 최일준은 과감하게 타격을 포기했고.
그런 최일준의 단호한 대처가 고민 중이던 구심에게 확신을 주었다.
-아, 지금 이강천 감독이 나와서 강하게 어필을 하고 있는데요.
-S존 상으로는 사실 스트라이크를 줘도 될 만한 공이었습니다. 다만 최현준 선수의 슬라이더가 바깥쪽으로 돌아서 들어갔으니까요. 구심에게는 백도어 슬라이더보다 바깥쪽으로 공을 뺀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렇게 되면 1사 만루에 박유성 선수의 타석인데요.
-이제는 투수를 바꿔 줘야 합니다. 최현준 선수로는 박유성 선수를 막기 어렵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이 다시 한번 투수 교체를 주장했지만.
이강천 감독은 마운드 쪽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타석으로 박유성이 들어왔다.
-오늘 경기 박유성 선수의 다섯 번째 타석입니다. 앞선 네 타석은 전부 볼넷. 단 한 번도 타격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최현준 선수는 박유성 선수를 거른다는 각오로 공을 던져야 합니다.
-여기서 박유성 선수를 거르면 밀어내기인데요?
-설사 밀어내기로 한 점을 주더라도 쉽게 승부해서는 안 됩니다. 박유성 선수는 7할 타자예요. 게다가 득점권 타율은 9할대입니다. 여기서 얻어맞으면 오늘 경기는 더 이상 쫓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주문을 듣기라도 한 듯 이강천 감독도 포수 이진태에게 어렵게 승부하라는 사인을 냈다.
하지만 최현준은 여기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박유성을 거르고 나면 블레이크 테일러 타석 때 강판이 될 터.
이정신이 블레이크 테일러를 병살로 처리해 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박준수 타석까지 이어질 경우 실점만 늘어날 것 같았다.
‘내가 싼 똥이야. 내가 치워야 해.’
포수 이진태가 몸쪽 낮은 공 사인을 냈지만.
최현준은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코스를 향해 공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 공은 최현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높게 날아들었고.
따악!
타격에 굶주려 있던 박유성의 방망이가 그 공을 그대로 물어뜯어버렸다.
-아, 큽니다!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건 넘어갔어요.
-중견수 뒤로! 중견수 뒤로! 이 타구가…… 그대로 전광판을 맞고 떨어집니다!
따악 하는 파열음과 함께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던 스타즈 팬들은 계속해서 뻗어나가는 타구를 보며 함성을 내질렀고.
그렇게 경기는 9 대 4, 스타즈의 승리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