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96화
35. 리얼 올스타(11)
“기부처 말이야. 아직 안 정해졌지?”
“네. 회장님. 비서실에서 적당한 곳을 추려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거기 어때? 민아가 후원한다는 곳 말이야.”
“아! 그곳이 있었네요.”
“같은 날에 민아도 같이 후원을 한다면 유성이가 싫어할까?”
“현아 자동차 홍보 모델이 되는 것보다는 좋아할 것 같습니다.”
다른 재벌가들처럼 신성 그룹도 재벌 3세들의 경영 참여가 하나둘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장손인 신주승은 신성 건설 본부장으로 올라갔고.
차손인 신민철은 신성 호텔 미국 지사를 총괄하며 경험을 쌓고 있었다.
외손녀인 유세영도 대학교를 다니며 신성 쇼핑에 재직 중이라 한 살 어린 신민아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에 민아가 헌옷들을 고쳐서 기부를 한다고 했을 때 현주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돈으로 주면 알아서 옷을 사 입을 텐데 헛짓거리를 한다고 하더라고. 처음에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 리폼이니 뭐니 해도 결국 남이 입던 옷이잖아? 그런데 민아가 그러더라고. 인간에게 필요한 건 의식주라고. 먹고 자는 건 국가가 지원해 주니까 입는 걸 도울 생각이라고.”
“저도 몰랐는데 요즘 애들은 입는 것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옷차림으로 서열이 나뉘고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고 하고요.”
“게다가 싼 게 비지떡인 건 불문율이잖아? 싸면서 질도 좋고 예쁘고 멋진 옷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안 그래?”
대학교 동기들과 함께 소소하게 시작한 신민아의 재능 기부는 몇몇 디자이너들의 합류로 규모가 커졌고.
신성 재단의 후원까지 이루어지면서 얼마 전 성공적인 1주년을 맞았다.
“손녀들 차별하는 건 아니지만 민아가 제일 나아.”
“박유성 선수 짝으로 말씀이시죠?”
“경영이야 나 죽고 나면 현준이가 알아서 할 테고. 한 이불 덮고 살려면 운동선수라고 구박은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신상욱 회장의 말에 한용준 비서실장이 쓰게 웃었다.
지난번에 박유성과 함께 식사를 했을 때.
신민아는 물론이고 신주희와 신주연, 유세영까지 참석을 했다.
신상욱 회장 앞이라 다들 조심스러운 분위기였지만 그 와중에도 신주희와 유세영은 박유성에 대한 배려 없는 질문을 던져 신상욱 회장과 한용준 비서실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선수 생활은 언제까지 할 수 있어요? 10년? 15년?”
“메이저리그 가면 수입은 좋아져요?”
“은퇴 후에 뭘 할 생각이에요?”
“밖에서 일하는 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막내이자 고등학생이었던 신주연이 적당히 좀 하라고 핀잔을 줬을 만큼 신주희와 유세영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시선으로 박유성을 바라봤다.
다행히 박유성이 잘 웃어넘겨 줬지만.
신상욱 회장은 박유성과 짝지어줄 손녀 명단에서 신주희와 유세영의 이름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주연이도 나쁘지 않지만 아직 고등학생이니까.”
“일찌감치 약혼을 시키는 게 아니라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도 조만간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야 하고요.”
“그럼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민아를 밀어주는 게 낫겠지?”
“다른 손녀 분들의 반발이 있겠지만 회장님께서 교통 정리를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고.”
현아 자동차 기부처는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한아름 복지 재단으로 확정이 됐다.
베어스 원정 2연전을 시작으로 후반기 일정에 들어간 박유성은 휴식일인 월요일, 한아름 복지 재단을 찾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같은 날.
신민아도 리폼한 옷 500벌과 함께 재단을 찾았다.
“어, 박유성 선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올스타전 때 받은 차를 기부하려고 왔는데 민아 씨는요?”
“어머, 저도 의류 기부하려고 왔어요.”
서로 언질을 받았던 박유성과 신민아는 자연스럽게 재회했고.
현아 자동차의 요청으로 취재에 나섰던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셔터를 터뜨렸다.
한아름 복지 재단 이사장을 사이에 두고 박유성과 신민아가 함께 찍은 사진이 기사로 나자 베이스볼 파크가 난리가 났다.
└헐, 뭐야? 박유성 신성 그룹 사위 됨?
└벌써 결혼 기사 났나요?
└결혼 기사는커녕 사귄다는 기사도 없습니다. ㅋㅋ
└그냥 우연히 만났다잖아요. 우리 유성이 품절남 만드지 마세요. ㅠ.ㅠ
└정말 우연일까요? ㅋㅋ 신성 그룹 신상욱 회장이 박유성 손주사위 삼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재벌가에 시집간 연예인들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엮였다는 건 안비밀. ㅋㅋ
└그런데 박유성은 아직 연애하기는 이르지 않나?
└이르긴 뭐가 이릅니까. 요즘은 초딩들도 연애하는데.
└이분 기사 못보셨네. 드래프트로 뽑힌 선수들 중 여자 친구 있는 비율이 75퍼센트입니다.
└나이 때문이 아니라 올 시즌 성적이 좋으니까 경기력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임.
└난 이 결혼 찬성이요.
└저도요. 연예인들하고 스캔들 터지느니 차라리 신성 그룹 손녀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분 진짜 손녀 맞아요? 너무 예쁜데?
└ㅇㅂㅇ 일반인치고 괜찮은 정도.
└사진 보니까 메이크업도 안 한 거 같은데 저 정도면 연예인급 아님?
└연예인은 무슨 ㅋㅋㅋ 신성 그룹 홍보팀에서 나오셨나? ㅋㅋㅋ
└그러게요. 저 정도면 그냥 평범한 편인데 다들 진짜 예쁜 여자를 못 본 듯.
야구 팬들의 긍정적인 반응과는 별개로 스타즈 구단은 박유성과 신민아의 만남이 열애설로 번지는 걸 경계했다.
“언론사에 협조문 돌렸습니까?”
“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기사를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도 불을 지피는 기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잘 체크해 주세요.”
“그런데 단장님. 에이전시도 있는데 구단에서 선수 연애 문제까지 관여를 하는 건 좀 과하지 않을까요?”
커뮤니티 반응을 핑계로 기자들이 박유성과 신민아에 대한 기사들을 쏟아낼 때 안재희 운영팀장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컴백하는 아이돌은 물론이고 배우, 예능인, 스포츠 선수들 할 것 없이 박유성을 입에 올렸고 언론에서는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소설을 써대는 마당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신민아가 나타났으니 구단 입장에서도 당분간은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재식 단장의 생각은 달랐다.
“박유성 선수는 야구 선수이고 신민아 양은 재벌가 사람입니다. 오래 만나온 것도 아니고 데이트 한 번 못 해본 사이인데 주변에서 떠들어대면 잘될 일도 안 될 겁니다.”
“그 말씀은…… 단장님도 두 사람이 잘되길 바라고 계신다는 거죠?”
“사진으로 봤는데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습니다. 물론 정말 사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반대할 이유는 없죠. 다만 열애설을 핑계 삼아 언론에서 박유성 선수를 흔들까 봐 걱정입니다.”
“하긴. 박유성 선수 흔드는 기사에 정작 다른 선수들이 동요하는 게 문제죠.”
1회차와 2회차를 통틀어 박유성은 프로에서만 40년을 버텼다.
자기 관리를 잘해도 15년 이상 뛰기 어려운 프로 야구 판에서 20년을 머무르다 보면 온갖 말들이 쏟아지게 마련인데 그 과정을 두 번이나 겪다 보니 이제는 별 감흥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스타즈 선수들은 달랐다.
박유성만큼의 경험이 없다 보니 언론의 흔들기에 덩달아 동요하곤 했다.
“선수단이 젊어진 만큼 외부에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SNS를 통해 박유성 선수 열애 관련 얘기들을 듣다 보면 경기에 집중 못 할 겁니다.”
“그렇다고 SNS를 못 하게 할 수도 없으니 참…… 답답합니다.”
“그러니까 미리 구단의 입장을 확실히 밝혀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추후에 정말 두 사람이 연인 사이로 발전하더라도 공식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선을 그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만에 하나 두 사람이 잘 안 되더라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단장님.”
전반기와 후반기에 나눠 진행되는 인터 리그 첫 주에서 스타즈는 5승 1패를 거두었다.
베어스와의 원정 2연전을 쓸어담은 뒤 히어로즈 원정길에서 1승을 나눠 가졌고 곧바로 전주로 내려가 파이터즈와의 2연전을 잡아내며 76승 19패로 정확하게 8할 승률을 맞췄다.
원정 6연전 동안 박유성은 17타수 12안타로 0.706의 타율을 기록했다.
3연속 볼넷으로 타격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경기 막판에 안타를 친 목요일(히어로즈전, 패배) 경기를 제외하고 5경기에서 멀티 히트를 때려냈고 3안타 경기도 한 차례 달성하며 타격감을 계속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때 아닌 열애설이 터져서일까.
일부 기자들은 박유성의 7할 신화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오늘 경기에서 한 번만 아웃당해도 6할대지?”
“무조건이야. 7월 월간 타율 7할로 끊으려면 전 타석 안타 쳐야 해.”
“만약에 전부 볼넷이면?”
“그럼 0.693으로 끝나는 거지.”
“설마 위즈가 박유성하고 정직하게 승부하지 않겠지?”
“그럴 리가 있겠어? 위즈도 포스트 시즌이 간당간당하잖아.”
스타즈가 압도적인 승률로 우승을 확정 짓다시피 한 나눔 리그와 달리 드림 리그는 포스트 시즌 진출을 두고 치열한 순위 다툼이 진행 중이었다.
5월 이후 히어로즈가 1위를 달리고 있지만 2위 베어스와의 격차는 1경기 반에 불과했고.
3위 위즈는 베어스를 1경기 차이로 따라붙는 중이며 4위 다이노스도 위즈와 2경기 차이를 유지 중이었다.
만에 하나 위즈가 스타즈와의 3연전을 전부 내주고 다이노스가 자이언츠와의 3연전을 잡아낸다면 3, 4위가 뒤집히는 상황.
그렇다 보니 위즈도 전력을 다해 박유성을 봉쇄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위즈의 이강천 감독도 에이스인 존 소렌토를 붙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경기를 잡기 전까지는 유성이와 성급하게 승부하지 마. 스타즈 홈 경기야. 유성이가 분위기를 주도하면 경기가 어려워져.”
존 소렌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해 17승 6패로 아쉽게 투수 부분 골든 글러브를 놓쳤을 만큼 실력도 좋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지만 위즈에서만 3년째 뛰는 상황에서 팀의 사정을 최대한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아, 볼입니다. 박유성 선수가 첫 타석부터 볼넷으로 출루합니다.
-아무래도 위즈 벤치에서 지시가 나온 것 같은데요. 공 4개가 전부 다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습니다. 이 정도면 고의 4구나 다름없을 것 같습니다.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4개월 연속 월간 7할 타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타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박유성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일단 선취점이 중요해.”
많은 팀들이 볼넷 작전으로 타격 기회를 봉쇄하고 있지만 박유성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안타를 치고 나가나 볼넷으로 나가나 똑같은 출루였다.
오히려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타율을 까먹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지게 마련인데 꾸준히 고의4구를 주고 있으니 오히려 경기를 치르기가 편했다.
그렇다고 해서 4개월 연속 월간 7할 타율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사진 한 번 찍힌 걸로 소설을 쓰고 있는데 먹잇감을 줄 수는 없어.’
2번 타자 블레이크 타일러가 타석에 들어오자 박유성은 성큼성큼 리드를 넓혔다.
그러다 존 토렌토의 초구가 바깥쪽으로 빠지자 박유성은 곧장 스타트를 끊었다.
-박유성 선수 뜁니다! 공 2루로 연결됩니다! 2루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여유롭게 2루 베이스를 훔쳐냅니다!
-박유성 선수. 벌써 시즌 103개째 도루인데요. 이제 아시아 최다 시즌 도루 기록까지 3개 남았습니다.
단숨에 2루 베이스를 훔친 박유성은 3루로 뛰지 않고 존 토렌토의 신경을 긁었다.
“빌어먹을!”
짜증이 난 존 토렌토가 몇 번이고 투구판에서 발을 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볼넷으로 내보내래?”
박유성에게 정신이 팔린 존 토렌토는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지 못했고.
따악!
블레이크 테일러에게 1, 2루간을 빠지는 적시타를 얻어맞고 말았다.
-박유성 선수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홈인! 경기 시작 3분 만에 스타즈가 리드를 가져갑니다.
홈으로 들어온 박유성을 향해 스타즈 관중들이 함성과 박수를 쏟아냈고.
후드 티와 모자를 쓴 채로 관중석 한편에 앉아 있던 신민아도 덩달아 그라운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자 채팅장이 난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