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93화
35. 리얼 올스타(8)
“뭐야? 박유성 빼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거야?”
“갑자기 자존심 확 상하네.”
박유성은 오늘 경기에서 세 타석 연속 볼넷으로 출루했다.
그리고 세 번 모두 홈을 밟았는데 하나같이 경기 분위기를 바꾸는 결정적인 득점이었다.
첫 번째 득점은 현시점에서 결승타였다.
1회 초 첫 번째 볼넷으로 나갔을 때는 연속 도루에 이은 2루 땅볼로 홈을 밟았다.
두 번째 득점은 2 대 0으로 앞선 2회 초에 나왔다.
선두 타자 박경호의 2루타와 박찬희의 희생 번트로 1사 3루 상황이 만들어지자 박정우는 박유성과의 승부를 피했고.
그렇게 1루로 나간 박유성은 민병규의 1루수 앞 강습 타구 때 적극적인 베이스러닝으로 더블 플레이를 저지시켰다.
평소였다면 베이스 커버에 들어오는 유격수에게 송구해 1루 주자를 잡고, 다시 그 공을 1루수가 돌려받아 타자 주자를 잡아내는 3-6-3 더블 플레이로 연결했겠지만.
박유성의 빠른 발을 의식한 조윤중이 홈으로 공을 던졌고.
박경호가 홈에서 런다운에 걸린 사이 박유성이 다시 3루까지 파고들면서 2사 1, 3루 찬스를 연결했다.
-박유성 선수, 정말 대범하네요. 보통 3루에서 런다운이 걸리면 어지간해서는 3루까지 못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3루수 이종률 선수가 공을 잡기가 무섭게 3루로 파고들었습니다.
발 빠른 박유성이 다시 눈앞에서 알짱거리자 박정우는 낮은 코스의 변화구를 던질 수가 없었고.
따악!
노림수에서 우위를 점한 박준수가 1, 2루간을 꿰뚫는 안타를 때려내면서 3루 주자 박유성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3 대 0으로 앞선 4회 초에 박유성은 다시 볼넷을 골랐다.
선두타자 박찬희가 바뀐 투수 임태규의 초구를 밀어 쳐 1루수 옆을 스치는 2루타를 때려내자 임태규도 박유성과의 승부를 포기했다.
그렇게 다시 무사 1, 2루 찬스가 만들어지자 박전권 감독은 민병규에게 희생번트 사인을 냈다.
첫 타석과 두 번째 타석에서 연속 땅볼을 친 민병규가 또다시 욕심을 부릴까 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하지만 박전권 감독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표팀에 이어 올스타전에서도 2번 타자로 출전하긴 했지만 민병규는 작전 수행에 능한 타자가 아니었다.
다른 테이블세터였다면 일찌감치 번트 자세를 취해 밸런스를 잡거나 스트라이크 존 주변으로 공이 들어올 때 기습적인 번트를 시도했겠지만.
민병규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희생 번트 작전이 나왔다는 걸 들켜 버렸고.
2구째 날아든 하이 패스트 볼에 방망이를 내밀었다가 포수 앞으로 공을 띄우고 말았다.
“내가 잡아!”
타구를 확인한 포수 나경석은 서둘러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눈으로 1루 주자와 2루 주자의 움직임을 체크했다.
2루 주자 박찬희와 1루 주자 박유성 모두 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주루의 달인.
그래서 당연히 신중하게 움직일 줄 알았는데 박찬희의 의욕이 과했다.
박유성은 1루 베이스 쪽에 조금 치우쳐서 상황을 지켜본 반면 박찬희는 일부러 공을 떨어뜨릴 거라고 확신한 듯 3루 쪽으로 절반 이상 넘어와 있었다.
‘찬희 형을 잡아야 해.’
원바운드로 타구를 처리하려 했던 나경석은 서둘러 공을 붙잡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2루로 돌아오는 민찬희를 잡아낸 뒤에 단숨에 2개의 아웃 카운트를 올렸다.
-아, 최악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통 올스타전에서는 번트 작전을 잘 안 쓰는데요. 박전권 감독이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점수 차이는 3점밖에 나지 않았지만 지금 경기 분위기는 나눔 리그 올스타가 주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더블 플레이로 드림 리그 올스타 쪽으로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급해진 박전권 감독은 박유성에게 도루 사인을 냈고.
박유성은 1회에 이어 연속 도루를 성공시키며 투수 임태규를 압박했다.
“야 인마. 살살 좀 해라.”
“작전 나와서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너 설마 홈스틸 하는 건 아니지?”
“그건 안알랴쥼.”
“어우, 저 얄미운 놈.”
국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은 박유성이 깐족거리자 임태규도 평정심을 찾지 못했다.
하필이면 상대는 멀티 히트에 타점까지 있는 박준수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몸 쪽 빠른 공을 붙이려다 폭투를 던지고 말았다.
-아, 공이 빠집니다! 3루 주자 박유성 선수가 여유롭게 홈을 밟습니다. 스코어 4 대 0. 나눔 리그 올스타 팀이 기어코 한 점을 더 뽑아냅니다.
-이번 득점은 뭐 박유성 선수가 다 했네요. 다 했습니다.
-느린 화면이 나오고 있는데요. 나경석 선수는 바깥쪽 사인을 냈던 것 같은데 공이 정반대로 갔습니다.
-올스타전에서는 종종 있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같은 팀 선수가 아니다 보니까 사인을 어렵게 내면 헷갈릴 때가 많아요.
-게다가 3루에서 박유성 선수가 계속 임태규 선수를 자극했으니까요. 임태규 선수도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6회까지 나눔 리그가 뽑아낸 4점 중에 3점은 박유성이 만들어낸 점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TV에서 볼 때는 대견했는데 막상 당하니까 진짜 짜증 나네.”
“유성이 쟤는 빨리 메이저리그 보내야 해. 국내에서 뛰는 게 반칙이라고.”
“협회에서 리그 재편한다고 하지 않았나?”
“리그 재편? 설마 스타즈 드림 리그 온다는 소리는 아니지?”
“정신 차려. 올스타전은 한 경기지만 같은 리그면 18경기야.”
“어차피 인터리그도 10경기인데 뭘. 8경기 더 치른다고 달라질 거 있겠어?”
“유성이 오면 타격 타이틀은 독식인데 그런 말이 나오냐?”
“아, 그렇지 참.”
“올스타전은 그냥 즐겨. 유성이 메이저리그 갈 때까지는 그냥 포기하고 살자고. 아마 팬들도 이해해 줄걸?”
“그래도 영봉패는 면해야 하는데 참……. 유성이는 안 바꾸겠지?”
“바꾸겠어? 중견수가 유성이 하나뿐인데.”
박유성을 뺄 상황도 아니었고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드림 리그 선수들은 박유성이 경기 끝까지 뛸 줄 알았다.
그런데 6회 말이 되자마자 억지로 박유성을 빼버리니까 갑자기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들 이대로 끝낼 거야?”
“어림없죠. 우리도 올스타인데.”
“박유성 빼고도 이겼다는 소리 듣고 싶은 모양인데 절대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우리 다들 안타 하나씩은 챙겨요. 안타 못 치면 베팍에서 콩이 되도록 까일 겁니다.”
나눔 리그에 맞춰 추천 선수들을 내보내려 했던 손진우 감독도 계획을 바꿨다.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봅시다. 유성이도 빠졌는데 기왕이면 이기는 게 좋지 않겠어요?”
코치로 합류한 다른 감독들이 동의하자 손진우 감독은 감독 추천으로 뽑힌 선수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쩌면 오늘 경기 타석에 서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대신 대수비로 무조건 그라운드를 밟게 할 테니까 이해 좀 해줘. 알았지?”
일부 선수들의 반발이 나올 줄 알았지만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손진우 감독이 이기기 위해서 실력 있는 선수들 위주로 추천 선수 명단을 짰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감독님.”
“이기는 게 중요하죠.”
“저는 못 나가도 상관없습니다.”
박유성 덕분에 한마음이 된 드림 리그 올스타 팀은 6회부터 확 달라졌다.
-이 타구가 좌중간을 완전히 갈랐습니다. 3루 주자 이세찬 선수가 홈으로. 1루 주자 안현우 선수는 3루까지! 스코어 4 대 1. 드림 리그 올스타가 드디어 한 점을 따라붙습니다!
-제가 아까도 J.B. 미첼 선수의 타격감이 좋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세 번째 타석에서 결국 적시타를 때려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박민재 선수의 수비가 아쉽습니다. 사실 다니엘 브리토 선수였다면 충분히 잡았을 타구였거든요?
-만약에 박유성 선수와 다니엘 브리토 선수가 외야를 지키고 있었다면 방금 타구는 잡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박유성 선수는 교체됐고 다니엘 브리토 선수는 중견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허점을 노려 장타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야구인 거죠.
6회에 한 점을 만회한 드림 리그 올스타는 7회와 8회에도 점수를 추가하며 나눔 리그 올스타를 바짝 추격했다.
“헐, 이러다 지는 거 아니냐?”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형이 제일 문제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걱정하는 거잖아.”
“걱정 맞아요? 은근히 뒤집히길 바라는 눈치인데? 설마 이대로 역전패당하고 모두가 함께 욕먹는 그림을 상상하고 있는 거 아니죠?”
“크흠. 그런 거 아니거든?”
더그 아웃 분위기가 제법 심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병규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까지 억누르진 못했다.
“조용조용히 떠들어. 듣겠다.”
함께 교체가 된 박경호가 넌지시 주의를 줬지만.
박유성을 옆에 낀 민병규는 입을 쉬지 않았다.
“솔직히 난 우리 감독님 이해 안 가.”
“뭐가요?”
“경호 형 그냥 보낸 것도 그렇고. 너 교체한 것도 그렇고.”
“7회부터 교체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도 넌 아닐 줄 알았지. 우리 팀 유일한 중견수인데.”
“올스타전에 무슨 포지션을 따지고 그래요?”
“와, 진짜 넌 속도 좋다. 짜증 안 나?”
“짜증을 내면 뭐가 달라져요? 선수 기용은 감독 고유 권한이에요. 감독하고 싸워서 좋을 게 없다고요.”
물론 박유성도 6회 말 대수비로 교체가 됐을 때 헛웃음이 났다.
김석률 감독이 따로 불러서 다니엘 브리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민병규와 나란히 앉아 경기를 지켜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형. 감독은 경기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이에요. 이기면 칭찬받고 지면 욕먹어요.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요. 박 감독님이 경기 지려고 선수 바꿨겠어요?”
“드림 리그 봐라. 어떻게든 이겨 먹겠다고 포수 빼고는 그대로 가고 있잖아?”
민병규의 말처럼 역전의 분위기를 잡은 드림 리그 올스타 팀은 계속해서 선발 출전 선수들로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반면 성급하게 선수를 교체한 나눔 리그 올스타는 수비 곳곳에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좌익수 자리에 들어간 박민재는 민병규보다 크게 낫다고 말하기 어려운 수비를 보여주는 중이고.
2루수 자리에 들어간 장영호도 평범한 땅볼을 펌블해 더블 플레이 기회를 날렸으며.
박경호 대신 포수 마스크를 쓴 유강민도 부족한 경험 때문인지 연달아 공을 빠뜨리며 드림 리그 올스타의 추격에 크게 일조했다.
오죽하면 박전권 감독이 채 1이닝도 맡기지 못하고 강인찬으로 포수를 교체했을 정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손진우 감독도 섣불리 선수를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만약에 9회 말에 동점으로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승부치기 하지 않나요?”
“승부치기 없어졌잖아.”
“그럼 12회까지 연장전 진행이에요?”
“지방에서 온 팬들도 많아서 연장전 못 할걸?”
이번 올스타전은 베어스의 홈구장인 베어스 파크에서 진행됐다.
같은 서울 지역권이다 보니 트윈스와 스타즈, 히어로즈, 랜더스, 위즈 팬들은 연장전이 진행되어도 상관없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팬들의 경우 여차했다간 교통편을 놓치게 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벌써 9시 다 되어가네요.”
“올스타전은 원래 느긋하게 진행되잖아. 중간에 홈런 레이스도 있었고.”
5회 말에 진행된 홈런 레이스 경기는 박준수의 우승으로 끝이 났다.
총 20번의 타격 기회에서 무려 11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겨 다니엘 브리토(9개)와 J.B. 미첼(10개), 프랭클린 메이필드(8개)를 전부 따돌렸다.
홈런 레이스에 허비된 시간만 40여 분.
이외에도 거의 매 이닝이 끝날 때마다 팬 이벤트가 진행되다 보니 점수가 많이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4시간 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럼 연장 없이 무승부로 끝나는 거예요?”
민병규가 고개를 돌려 박경호에게 물었다. 그러자 박경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이겨야지. 4 대 0으로 이기고 있다가 무승부로 끝나는 것도 그렇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