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90화
35. 리얼 올스타(5)
-볼 카운트 투 볼에서 박정우 선수, 3구를 던집니다. 아, 이번에도 빠지는 볼. 볼 카운트가 쓰리 볼로 바뀝니다.
-박정우 선수. 원래 제구가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선수인데요. 상대가 박유성 선수라서일까요? 공이 조금씩 빠지고 있습니다.
-박재흥 해설위원은 박유성 선수를 의식하다 보니 공이 빠지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임상훈 해설위원은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 올스타전은 공이 유니폼 자락에 스쳐도 맞지 않았다고 우기지 않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박정우 선수가 박유성 선수의 MVP를 저지하기 위해 일부러 빠지는 공을 던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크게 실수하는 겁니다. 박유성 선수는 타석에 있을 때가 가장 낫다는 말 모르십니까?
-저는 사실 그 의견에 동의 못 합니다. 박유성 선수가 홈스틸을 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는 홈으로 불러들여야 하거든요. 하지만 타석에서는 홈런을 때려낼 수 있습니다. 그럼 바로 한 점이에요.
-박유성 선수가 프로 야구 홈런 1위를 달리고 있긴 하지만 안타 대비 홈런 비율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타석당 홈런 비율도 11.8퍼센트에 불과하고요. 반면 도루 성공률은 100퍼센트입니다. 전반기 도루만 100개에 가깝고요. 그것도 무관심 도루 판정으로 많이 손해 본 기록입니다.
-올스타전답게 두 분이 치열하게 부딪치고 계신데요. 아주 보기 좋습니다.
평소에도 아웅다웅거리던 박재흥 해설위원과 임상훈 해설위원은 올스타전을 맞아 더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박유성의 첫 타석은 중계석의 열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퍼억!
박정우가 몸 쪽으로 붙인 체인지업이 낮게 떨어졌고.
박유성은 공을 묵묵히 지켜본 뒤에 조용히 1루 베이스로 걸어 나갔다.
-결국 선두 타자 박유성 선수가 출루합니다.
-이러면 박유성 선수는 무조건 뛸 겁니다. 뛰는 박유성 선수는 못 막습니다.
-박정우 선수도 견제에 능한 투수입니다. 쉽게 2루를 허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번에도 두 분의 의견이 갈리고 있는데요.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지켜보겠습니다.
박유성이 초구부터 뛸 거라 여긴 나경석은 피치 아웃을 주문했다.
리그 때 피치 아웃 작전으로 박유성을 한 차례 잡을 뻔했던 터라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프로 경력만 40년을 깔고 야구를 하는 중이었다.
‘앉은 자세를 보니까 피치 아웃이네.’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
박유성이 박경호보다 많이 상대한 포수가 바로 나경석이었다.
2회차 시절에야 초반에만 뛰고 중심타자로 자리를 잡은 이후로는 도루 시도를 확 줄였지만.
1회차 시절에는 출루하고 나가서 뛰는 게 일이다 보니 어깨가 좋은 나경석과 자주 부딪쳤었는데 덕분에 나경석의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앞선 히어로즈와의 인터 리그 경기 때 피치 아웃 때 뛴 것도 실수가 아니었다.
피치 아웃 동작을 알아채고는 투수가 완전히 키킹을 하기도 전에 스타트를 끊었고.
완벽하게 날아든 나경석의 송구를 피해 간발의 차이로 2루 베이스를 훔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박유성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포수라고 치켜세우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피치 아웃조차 뚫고 도루를 성공시킨 박유성의 빠른 발을 칭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디 이번에도 송구가 제대로 오나 볼까?’
박유성은 성큼성큼 리드를 벌렸다.
“야 인마. 어디 가.”
위즈의 1루수 조윤중이 들으라는 듯 타박했지만 박유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구가 좋은 투수는 대체적으로 투구 밸런스에 신경 쓰게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무리해서 1루 주자를 잡으려 하기보다는 곁눈질이나 공을 오래 쥐는 식으로 주자의 스타트를 방해하는 견제를 선호했다.
박정우가 주자 견제 능력이 좋다고 평가를 받는 것도 직접 견제 능력보다는 간접적엔 견제 능력과 간결한 투구 동작 때문이었다.
와인드 업 동작 없이 글러브를 가슴에 모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투구가 이루어지다 보니 어지간한 준족들도 박정우 앞에서는 쉽게 스타트를 끊지 못했다.
‘나도 1회차 시절에 엄청 헤맸지.’
박정우가 투구 판에서 발을 풀자 박유성도 냉큼 베이스로 돌아왔다.
“유성아. 안 뛸 거지?”
그런 박유성을 향해 박정우가 물었고.
“에이. 안 뛰죠.”
박유성은 일부러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자 중계석에서 바로 반응했다.
-지금 박정우 선수와 박유성 선수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박정우 선수가 뛸 거냐고 물으니까 박유성 선수가 안 뛴다고 대답한 것 같은데 저거 다 거짓말입니다.
-박정우 선수는 박유성 선수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뛰는 선수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안 뛴다는 말에 속지 않을 거예요.
중계석의 예상처럼 박정우가 다시 투구판을 밟자 박유성은 아까처럼 크게 리드를 넓혔다.
그러자 나경석이 2번 타자로 나선 민병규의 몸 쪽에 미트를 받쳐 들었고.
박유성을 애써 외면한 박정우가 왼발을 들어 올린 순간.
타다다다닥!
박유성이 스킵 동작 없이 곧바로 스타트를 끊었다.
-아, 박유성 선수 뜁니다!
-지금 피치 아웃인데요?
-박유성! 박유성! 박유성! 박유서어어엉! 2루에서 세이프! 피치 아웃 작전을 완벽하게 뚫어냈습니다!
초구부터 나온 피치 아웃 작전에 비명을 내질렀던 관중들은 박유성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여유롭게 2루를 파고들자 진기명기라도 본 것처럼 좋아했다.
“X발. 놀래라. 죽는 줄 알았네.”
“미친. 박유성이 죽긴 왜 죽어? 도루의 신인데.”
“지금까지 박유성 도루 100퍼센트지?”
“내가 말했잖아. 박유성은 도루를 위해 태어났다고. 오죽하면 포수들이 무관심 도루를 주겠냐?”
4월 한 달간 33개의 도루를 성공시킨 박유성은 5월 41개의 도루를 추가하며 기종범이 가지고 있던 신인 최다 도루 기록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하지만 6월 월간 도루는 18개로 반토막이 났다.
박유성의 도루에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은 포수들이 아예 박유성 견제를 포기하면서 무관심 도루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진짜 무관심 도루도 다 잡아줬으면 시즌 도루 200개도 가능했을걸?”
“그럼 진짜 불멸의 대기록 작성인데 아쉽긴 하네.”
“괜찮아. 박유성은 어차피 대기록 확정이니까.”
“그런데 박유성, 지금부터 남은 타석 전부 죽어도 4할 찍는다는 게 사실이야?”
“5타석 기준으로 하면 3할 8푼인가 그렇고 4타석 기준으로는 4할 2푼이라더라.”
“박유성 경기당 5타석은 나오지 않냐?”
“대신에 박유성은 볼넷 엄청 골라내잖아. 경기당 한 번씩은 볼넷으로 나가니까 4타석 정도가 맞지.”
“계속 무안타인데 상대가 볼넷을 준다고?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박유성이 후반기 전 타석 무안타를 칠 일이 있냐?”
“하긴. 아무리 삽을 퍼도 3할은 치겠지.”
“박유성 후반기에 3할 쳐도 5할 타율이야.”
“오올, 그게 바로 계산이 돼?”
“멍청아. 지금 7할이 넘고 후반기는 전반기보다 경기 수가 적은데 3할을 치면 당연히 5할이 넘지. 그걸 계산까지 해야 해?”
“일본 애들, 박유성이 5할 넘기면 배 좀 아프겠는데?”
“죽어도 인정 안 할걸? 지금도 일본 우익 놈들은 약물빨이라고 바득바득 우기잖아.”
박유성의 시즌 타율은 국내보다 일본과 미국에서 더 난리였다.
특히나 일본의 경우 아침 방송에서까지 야구 전문가가 나와서 박유성의 타율에 대한 전망을 늘어놓았다.
“뭐야, 너희들. 혹시 여권에 JAP라고 적혀 있냐?”
“뭔 소리야?”
“이 새끼가 선 넘네?”
“선 넘는 건 너희들인 거 같은데? 아니 전반기 내내 7할을 친 타자가 후반기에 뭐? 3할? 3하아알? 장난하냐?”
“그건 그냥 해본 말이지.”
“그냥 해본 말이 왜 그따위야? 보통은 박유성이 10할을 치면 8할 타율을 넘길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야 정상 아니냐? 너희 팀 선수 아니라고 박유성 깎아내리는 건 너무 일본스럽지 않냐?”
“에이, 아무리 그래도 8할은 에바지.”
“별것도 아닌 걸로 그만 싸우고 경기 봐라. 박유성 또 뛰려고 한다.”
“뭐? 또?”
박유성이 2루 도루를 성공시키자 나경석은 냉큼 마운드로 올라왔다.
“저 녀석 진짜 빠르네.”
“왠지 피치 아웃 눈치챈 거 같은데?”
“그럴 리가.”
“나도 유성이한테 도루 뺏겨봤는데 지난번보다 스타트가 더 빨랐어.”
“그냥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뛴 거 아닐까?”
“머리부터 들어갔잖아.”
“뭐야? 진짜 눈치챈 건가?”
박정우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경석이 2루 쪽을 바라봤다.
평소 박유성은 2루로 뛸 때 부상 방지 차원에서 레그 벤트 슬라이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이었다.
그렇다는 건 피치 아웃을 염두에 둔 주루 플레이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와, 갑자기 열 받네.”
“그래서? 한 번 더 해?”
“한 번 더?”
“유성이 저 녀석, 보나 마나 3루로 뛸 건데 자신 있으면 한 번 더 하든가.”
“괜찮겠어?”
“나야 유성이 잡아주면 고맙지.”
“마음을 비운 거 아니었어?”
“내가 선발이잖아. 이 한 점으로 패전 투수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쉽게 비워지겠냐?”
투수에게 주어지는 승패는 결승점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1회 초에 나눔 리그가 박유성의 선취 득점으로 한 점을 앞서 나가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리드를 뺏기지 않는다면 이후에 등판한 투수들이 몇 점을 내주든 패전의 책임은 박정우가 지게 되는 것이다.
“너도 알지? 나 투표로 뽑힌 거 처음인 거.”
“알지. 찬우가 워낙 인기가 많았잖아.”
“매번 감독 추천으로 뽑히다가 투표로 올라가니까 욕심난다. 나 오늘 경기 이기고 싶어.”
“걱정 마 인마. 내가 한 방 때려줄 테니까.”
“그건 당연한 거고 나도 선발로서 최선을 다해야지. 안 그래?”
박정우와 나경석의 대화가 길어지자 박유성은 어렵지 않게 꿍꿍이를 알아챘다.
“또 피치 아웃인가? 하긴. 3루에서 잡기만 하면 대박일 테니까. 경석이 형도 욕심나겠지.”
올스타전 MVP는 보통 가장 좋은 활약을 선보인 선수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생각만큼 점수가 많이 나지 않는다면 결승타나 임팩트가 있는 플레이를 펼친 선수들이 표를 받곤 했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순 없지.”
나경석이 포수석으로 돌아가자 박유성은 다시 보란 듯이 리드를 넓혔다.
그러고는 박정우가 왼발을 들어 올리기가 무섭게 곧장 3루를 향해 내달렸다.
-아아, 박유성 선수가 또 뜁니다!
-이번에도 피치 아웃이에요!
-나경석 선수가 공을 받아 곧바로 3루로 송구합니다! 3루에서……! 3루에서 아웃! 박경호 선수가 박유성 선수를 잡아냅니다!
절대 죽을 것 같지 않던 박유성이 3루에서 비명횡사하자 야구팬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박유성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벨트에 잔뜩 낀 흙을 흔들어 털어낸 뒤에 3루 쪽 더그아웃을 향해 네모를 그려 보였다.
-아, 지금 박유성 선수가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는데요?
-박유성 선수 표정을 보니까 태그가 안 됐던 것 같은데 리플레이 화면을 봐야겠습니다.
-지금 박전권 감독이 나와서 구심에게 비디오 판독 신청을 했습니다.
-타이밍상으로는 아웃인 것 같은데…… 원래 저런 건 선수가 가장 잘 알거든요? 어쩌면 판정이 뒤집힐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