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88화 (288/412)

타자 인생 3회차! 288화

35. 리얼 올스타(3)

만약을 대비해 미리 1천 장의 사인 종이를 만들어 왔던 박유성은 밀려드는 팬들의 이름을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느긋하게 사인을 해주면서 어린 친구들에게는 사진도 찍어주고 모처럼 팬서비스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박유성 선수. 죄송한데 조금만 더 빨리 안 될까요?”

“많이 남았나요?”

“지금 3조 끝나지도 않았는데 4조 들어오고 있어서요.”

“하아. 네에.”

회차 불문 생각 없이 일 처리를 하는 협회 덕분에 쉴 새 없이 펜을 움직여야 했다.

“X발. 줄이 안 줄어든다.”

“참아. 박유성 혼자만 미친 듯이 사인 중이잖아.”

“사인회 인원이 몇 명이라고 했지?”

“1천 명일걸?”

“그 사람들 전부 다 사인해 주면 박유성 손목 나가겠는데?”

“그래서? 박유성 손목을 위해서 사인 포기?”

“미쳤냐? 친척들까지 싹 다 응모해서 겨우 나만 당첨됐는데? 빈손으로 가면 나는 죽음이야.”

진짜 야구 팬들은 혼자서 1천 명의 팬들을 상대해야 하는 박유성을 충분히 이해해 주었다.

하지만 박유성을 인기 스포츠 스타로만 여기는 일부 팬들은 눈치 없이 특별 대우를 바랐다.

“박영채요.”

“채소 할 때 채죠?”

“당연하죠. 설마 체조할 때 체겠어요? 그런데 사진은 못 찍나요?”

“저는 찍어드리고 싶은데 뒤에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저 스친 30만 넘는데.”

“……네?”

“저 인플루언서라고요. 저랑 같이 사진 찍으면 스친 엄청 늘걸요?”

“아, 네. 괜찮습니다. 저는 스친 100만이라서요.”

박유성은 본래 SNS를 즐기지 않았다.

SNS 핵관종 수준인 장태수를 보며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이후로 SNS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이번 3회차 때도 마찬가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SNS에 메시지조차 남기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팬들이 계속 찾아왔다.

‘유성아.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SNS로 팬들과 소통하는 게 일상이야. 현민이 녀석처럼 SNS를 일기장으로 쓰는 건 문제지만 너무 방치해도 말이 나올 거다. 회사에서 계정 관리는 해줄 테니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뭐라도 좀 남겨. 알았지?’

송 에이전시에서 담당 직원까지 뽑아 SNS를 관리하자 친구 신청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얼마 전에는 유명인의 기준이라는 100만 스친을 돌파했다.

사적인 보도는 최대한 자제해 달라는 송 에이전트의 요구에 따라 언론에서 요란스럽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몇몇 기자들을 통해 100만 스친러가 됐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만약 정말 관심이 있었다면 검색이라도 해봤을 텐데.

고작 30만 스친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걸 보면 야구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사인 여기 있습니다.”

“필요 없어요!”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박영채가 씩씩거리며 몸을 돌렸다.

“재수 없어. 인기 좀 있으면 다야?”

줄을 서 있던 팬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정작 박영채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박유성 선수. 나중에 저 여자가 이상한 소리 하면 저한테 말해요. 제가 증인 설게요.”

“네. 감사합니다.”

“진짜예요. 그런데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이벤트에 당첨된 거죠?”

“랜덤 추천이라 운 좋게 걸렸나 봐요.”

보나 마나 제 인기를 이용해 타인의 당첨권을 갈취한 것이겠지만.

박유성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데다가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팬들에게도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송광철 대표가 직원에게 다가갔다.

“잘 찍고 있지?”

“넵. 녹음도 잘되고 있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캠코더를 들고 있던 직원이 냉큼 대답했다.

처음에 사인회 현장을 전부 촬영하라고 할 때만 해도 미튜브 업로드용 영상을 찍는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 최고의 인플루언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박유성 앞에서 까부는 사람을 보니까 촬영의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야구 선수는 말이야. 사고 안 치고 팬들에게 적당히 잘하면서 야구만 열심히 하면 돼. 그 외 나머지는 우리가 케어해야 하는 거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대표님.”

“고작 사인회 영상이나 찍고 있다고 푸념하지 마. 박유성 선수의 이미지를 지키는 거라고 생각해.”

“저 푸념 안 했습니다.”

“안 하긴. 한숨 소리가 미국까지 들린다고 김 팀장한테 전화 왔는데 무슨.”

“하…… 하하하하.”

“박유성 선수하고 어떻게든 엮여보려고 온 사람들 한둘이 아닐 거야.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송광철 대표의 예상대로 박영채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함정 카드(?)가 발동했지만.

프로 40년 차 박유성은 적당히 잘 웃어넘겼다.

그렇게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사인회를 끝낸 뒤 박유성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예전에 파이터즈 대표로 올스타전에 참석했을 때는 다른 팀이었던 장태수와 같이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스타즈 선수만 9명이 뽑혀서 스타즈 선수들끼리 따로 자리를 잡았다.

“유성아. 손목 괜찮냐?”

“조금 시큰거리긴 하는데 괜찮아요.”

“사인 종이 몇 장 남았어?”

“200장 넘게 남은 거 같은데요?”

“시간이 많았으면 아마 그 사람들도 다 받았을걸?”

“제 팬 아닌 사람도 많아요.”

“네 안티 팬들도 네 사인은 무조건 받을 거다. 나중에 팔아먹으려고.”

“에이, 그걸 누가 사겠어요?”

“네 사인 유니폼 1억에 사겠다는 글 못 봤어?”

장영호가 밥풀을 튀기며 호들갑을 떨었다.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의 유니폼이 경매로 나와 높은 값에 팔려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프로에 데뷔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신인 선수의 유니폼이 1억을 호가하는 경우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거 어그로 다 끌고 내려갔잖아요.”

“어그로 아니야 인마. 그거 구매해서 내려간 거래. 주식 커뮤니티에 판매자 글 올렸다더라. 와이프 몰래 주식하다 7천만 원 까먹었는데 네 유니폼 팔고 정리했다고.”

“나도 그 글 봤어. 주식 쪽에서는 쌍성은 무조건 사야 한다며?”

“쌍성이요?”

“신성하고 박유성. 신성 그룹 쪽 주식도 엄청 올랐잖아. 스타즈 오고 나서 기념으로 신성 주식 좀 사려고 했는데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

박경호가 너스레를 떨자 송찬우가 냉큼 끼어들었다.

“형. 비싸더라도 무조건 지금 사야죠. 유성이 메이저리그 진출하기 전까지는 오를 텐데요?”

“그래서 찬우 넌 샀냐?”

“전 작년에 이적하고 나서 크게 질렀습니다. 김 팀장님이 신성 그룹 주가가 심상치 않다고 투자하라고 하셔서요.”

“하아. 나도 김 팀장님 추천 받긴 했는데…… 지금이라도 지를까?”

“형. 여기서 더 늦으면 진짜 후회해요. 유성이 스타즈에서 뛰는 동안에는 주식 절대 안 빠지니까 무조건 사요. 밑져야 본전이에요.”

“그럴까?”

“형. 사더라도 적당히 사세요. 나중에 손해 보고 저 원망하지 마시고요.”

“내가 병규냐? 주식 손해 봤다고 너 원망하게?”

“헐, 병규 형도 신성 주식 샀어요?”

“몰랐어? 선수들 중에서 병규가 재테크 제일 열심히 할걸? 유성이 너도 신성 주식 좀 샀지?”

갑작스러운 박경호의 질문에 박유성은 괜히 밥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송찬우가 대신 말했다.

“형. 유성이는 주식 안 사죠. 그냥 받았을걸요?”

“하긴. 내가 신성 그룹 회장이어도 유성이한테는 주식 좀 나눠주겠다. 유성이 덕분에 오른 게 얼마야?”

“뭐야, 박유성? 진짜 주식 받았어?”

선수들의 시선이 몰려들자 박유성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받긴 했는데 많지는 않아요. 그리고 저는 사고 싶어도 못 사고요.”

신상욱 회장과 식사를 하던 날.

박유성은 따로 회장실로 불려가 신상욱 회장 몫의 주식을 일부 증여받았다.

“부담 갖지 마라. 옵션 조건 변경한 몫이야.”

“그건 추후에 미국 갈 때 도와주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건 그거고. 왜? 받기 싫어?”

“웃어른이 주시는 건 감사히 받으라고 배웠습니다.”

“하하.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았구나. 그래. 웃어른이 주는 건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되는 거야. 세금이나 절차는 여기 한 실장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라. 대신에 밥 먹을 때 조금 곤란하더라도 이해해 주고. 알았지?”

사전에 한용준 비서실장으로부터 신상욱 회장의 손녀들이 참석할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박유성은 웃고 말았다.

다들 신성 일가에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인데 밥 한 끼 먹는 조건으로 주식까지 받았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은 그런 속사정을 알지 못했다.

“왜 못 사? 돈이 없어? 형이 좀 빌려줄까?”

“유성이가 신성 주식 사면 괜히 말 나올걸요? 유성이 못 잡아먹어 안달인 기자들 많잖아요?”

“아, 또 그런 거야?”

“아마 그걸 알고 신성 그룹에서 따로 챙겨준 거 아닐까요?”

“그래. 유성아. 넌 야구로 돈 벌어라. 주식은 형들만 할게.”

“대신에 나중에 은퇴하고 돈 필요하면 말해. 너한테는 공짜로 빌려준다.”

“차용증 안 쓰고요?”

“인마. 차용증은 써야지. 누굴 이혼시키려고?”

“이혼은 무슨. 여자 친구나 만들고 말해라.”

식사를 마친 후 박유성은 스타즈 선수들과 함께 몸을 풀기 시작했다.

본 경기는 오후 5시에 시작하지만 그전에 열리는 이벤트를 준비해야 했다.

“오늘 박유성 뭐 뭐 나오냐?”

“퍼펙트 히터 하나만 나온다던데?”

“다른 거 안 나오고? 와, 박유성 신인이 빠졌네.”

“꼰대냐? 무슨 신인 타령이야? 그리고 박유성이 어디 그냥 신인이야?”

“그냥 해본 말인데 왜 난리야?”

“너 같은 애들 때문에 괜히 박유성만 욕먹는 거야. 너 같은 애들이 기레기들한테 먹잇감 던져주는 거라고.”

박유성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하는 야구 팬들이 아쉬운 마음에 푸념을 했다면.

현장에 모인 기자들은 대부분 박유성을 아니꼽게 여겼다.

“박유성은 단체 이벤트 하나도 안 나오는 거야?”

“비싼 몸이라잖아. 홈런 레이스도 불참했는데 단체 이벤트는 무슨.”

모든 야구인들의 축제라는 취지에 따라 협회에서는 팬들과 함께하는 이벤트를 계속 준비했다.

올해도 슈퍼 레이스를 포함해 릴레이 시구, 릴레이 퀴즈 등 많은 행사들이 준비됐지만 참가 선수 명단에 박유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퍼펙트 히터야?”

“퍼펙트 히터는 진짜 운빨이잖아. 그거 못 한다고 욕먹지는 않을 테니까 얍삽하게 그것만 하는 거지.”

퍼펙트 히터 이벤트 방식은 간단했다.

배팅볼을 때려 경기장 곳곳에 세워진 과녁을 맞혀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는 건데 설명만큼 점수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외야 과녁은 노바운드 타구만 인정하면서 난이도가 더 올라갔다.

“박유성은 몇 점이나 뽑을까?”

“대충 내야 과녁 땅볼로 맞히고 끝내겠지. 뭘 얼마나 열심히 하겠어?”

“하긴. 퍼펙트 히터도 마지못해 나왔겠지.”

내야에 세워진 과녁은 총 3개.

외야와 달리 땅볼 타구나 번트 타구도 득점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다들 이 세 개의 과녁을 우선 공략한 뒤에 외야에 설치된 8개의 과녁에 도전했다.

하지만 이벤트의 마지막에 등장한 박유성은 초구부터 시원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걸린 타구가 쪽 뻗어 나가자 관중들의 시선이 전부 공을 좇았다.

그러다 새하얀 공이 중견수 뒤쪽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5점짜리 과녁에 명중하자 자지러지는 함성을 터뜨렸다.

“X발. 대박! 뭐냐?”

“와, 박유성. 진짜 장난 아니다. 어떻게 초구부터 저길 맞혀?”

“내가 뭐랬어? 박유성이 1등 할 거라고 했지?”

“야, 그런 소리는 나도 해. 막말로 7할 타자인데 이 정도는 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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