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82화
34. 박유성은 특별해(7)
전임이었던 허구현 총재가 양대 리그 구상과 12개 구단 체제를 발표했을 때.
프로 야구 팬들은 물론이고 선수들조차 우려를 표했다.
10구단 체제로 시즌을 치른 지 9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11번째 구단과 12번째 구단을 동시에 창단해 양대 리그로 재편한다는 계획 자체는 몽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허구현 총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프로 야구단 창단이 가능한 기업을 만나 신규 구단 창단을 이끌어내겠다며 연내에 가시적인 성과가 없을 경우 총재 자리를 내놓겠다는 배수의 진까지 쳤다.
그러나 코로나 펜데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해마다 수백억씩 쏟아부어야 하는 프로 야구 구단 창단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기업은 없었다.
과거 창단 의사를 밝혔던 기업들마저 몸을 사리자 허구현 총재는 그동안 많은 지원을 받아왔던 신성 그룹을 찾아왔다. 그리고 프로 야구 발전을 위해 힘을 실어달라고 읍소했다.
‘신 회장님. 여기서 뒷걸음질을 치면 코로나 이전의 인기를 회복하기까지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위기를 타개하려면 외연을 확장해야 합니다. 신 회장님이 프로 야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켜 주세요.’
신상욱 회장은 자신만큼이나 한평생을 대한민국 야구 발전을 위해 이바지해 왔던 허구현 총재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때 허 총재님이 확답을 주기 전까지는 절대 일어서지 않겠다고 해서 회장님께서 엄청 곤란해하셨죠.”
당시 자리에 있었던 한용준 비서실장은 신상욱 회장의 고심 어린 결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타즈가 지방이 아닌 서울에 자리를 잡으면서 제 잇속만 챙겼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상당했다.
“박 과장. 원래 협회에서 원했던 연고 지역이 어디인 줄 알아?”
“제가 봤던 기사에는 전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전주였어. 서울과 경기 인천에 5개 팀이 몰려 있고 호남에 하나, 호서에 하나, 그리고 영남에 셋이잖아? 허 총재는 호남과 호서에 신규 구단을 유치하고 싶어 했지. 솔직히 나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전주를 연고지로 삼으려고 했어. 그런데 기존 구단들이 반발을 하더라고.”
당연히 무산될 줄 알았던 신생 구단 창단이 가시화되자 기존 10개 구단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다들 여론의 눈치만 보던 상황에서 신성 그룹이 나섰으니 프로 스포츠 구단 창단을 고민 중이던 다른 기업들도 부담이 줄어들 터.
이러다 정말로 허구현 총재의 허무맹랑한 꿈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허 총재는 신생 구단만 만들어 주면 협회 가입금도 최대한 깎아주고 연고지 보상 문제도 잘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런데 느닷없이 가입금만 200억을 내라는 거야. 야구 발전 기금으로 또 300억을 내라고 하고.”
“거기에 연고지 보상금까지 더하면 어마어마했겠네요.”
“정작 타이거즈는 조용했어. 주변 구단들이 더 난리였지. 그래서 내가 그랬어. 원하는 대로 주는 대신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막말로 신성 재단도 서울에 있는데 계열사 본사 하나 없는 전주로 가는 것도 웃기잖아. 안 그래?”
비록 등 떠밀려 신생 구단 창단에 나섰지만 신상욱 회장도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10개 구단의 여론전에 맞서 서울 입성을 시도했고.
야구 발전 기금 대신 고교 야구 전용 경기장을 짓겠다고 발표하며 부정적인 여론을 돌렸다.
“내가 서울로 가겠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지방 구단들이 발을 빼더라고.”
“아무래도 서울 쏠림 현상이 심했으니까요.”
“그래. 정작 지방 구단들은 우선 지명을 할 선수조차 없는데 수도권 구단들은 후보들을 추리는 게 일이었잖아? 게다가 수도권에 구단이 생기면 이동 거리도 줄어들고 관중 수익은 늘어나니까 나쁠 게 없었지.”
여론이 신생 구단 창단 쪽으로 기울자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지방 구단들이 등을 돌렸고.
추가로 랜더스까지 합류하면서 신생 구단 창단이 확정됐다.
그러자 느닷없이 태산 그룹이 끼어들었다.
“태산 그룹에서 뒤늦게 창단 신청했을 때는 식겁했습니다.”
“우리가 기존 구단들하고 싸워가며 서울에 자리를 잡을 것 같으니까 얌체같이 숟가락 얹은 거지.”
“협회도 이때다 싶어 경쟁 분위기로 몰고 갔었고요.”
“그때 진짜 다 때려치울까 했는데 자네가 말렸지.”
“태산 그룹에서 절대 우리만큼 돈을 쓰지는 못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지금은 야인으로 돌아간 허구현 총재는 태산 그룹이 서울 지역으로 들어오고 신성 그룹은 당초 계획대로 전주로 내려가길 바랐다.
타이거즈의 색깔이 강한 전주에 신생 구단이 자리 잡으려면 그만한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만큼 태산 그룹보다는 오랫동안 국가 대표팀을 지원해 왔던 신성 그룹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협회의 바람일 뿐 신상욱 회장은 어렵게 싸워 얻은 서울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박 과장 자네는 모르겠지만 언론에서 소란을 떨 때쯤 태산 그룹에서 연락이 왔어. 500억은 너무 많다면서 말이야.”
“공동 대응해서 200억 수준으로 깎자고 제안했었죠.”
“그래놓고 최종 창단 의향서에는 300억을 적어 넣었지.”
“만약에 태산 그룹 요구에 응했다면 11번째 구단은 스타즈가 아니라 태산 그룹 산하 구단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일언지하에 태산 그룹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초 약속대로 500억을 내겠다고 하셨고요.”
애당초 기존 구단들의 반대로 창단 준비 금액이 커진 만큼 태산 그룹과 공동 대응해서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추는 게 현명했지만 신상욱 회장은 장사꾼이 아니라 야구인으로서 창단에 임했다.
그 결과 신성 그룹이 11번째 구단 창단 기업으로 선정됐고.
서울 지역을 뺏긴 태산 그룹은 최종 심사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당초 약속을 저버리고 야구판에서 발을 빼버렸다.
“스타즈를 만들고 나서 나 스스로 약속을 한 게 있어. 앞으로 10년간은 성적 가지고 닦달하지 않기로 말이야. 한두 푼도 아니고 1천억에 가까운 거금을 투자했으니까 성과를 내는 게 당연하지만 조바심을 내지 말자고 다짐했지.”
“그 말씀, 기사를 통해 본 기억이 납니다.”
“지난해 아쉽게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을 때도 속은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어. 내부 단속 과정에서 감독도 바뀌고 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여겼지. 그런데 말이야. 메이저리그에서 잘하는 송현민을 보니까 다른 욕심이 생기더라고.”
신상욱 회장이 여기서 말을 끊었지만 박원호 과장은 어떤 욕심일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송현민처럼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를 키우는 것.
구단주로서 스타즈의 우승도 중요하지만 야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을 것 같았다.
“사실 박준수를 밀어줄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김재식 단장 말로는 박준수가 해외 진출 욕심이 없다는 거야.”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송현민 선수의 계약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언론에서 1억 달러 계약을 떠들었는데 6천만 달러에 계약을 했으니까요.”
송현민이 레인저스와 맺은 4년 6천만 달러의 계약은 2028 FA 톱 10 안에 드는 규모였지만 박준수의 눈높이를 채우긴 어려웠다.
송현민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1루밖에 보지 못하는 수비의 한계까지 고려했을 때 연평균 1,000만 달러 이상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3자인 박원호 과장이 보기에도 메이저리그 욕심에 옵션이 덕지덕지 붙은 계약을 강행하느니 스타즈와 장기 계약을 하는 편이 금전적으로는 훨씬 더 나아 보였다.
“그래서 해외 진출이 코앞인 송찬우를 받아올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어. 박준수 대신 송찬우를 밀어주려고 말이야.”
신성 그룹에서 1라운드 지명권과 송찬우를 얻기 위해 지불한 보상금은 무려 20억.
거기에 추가로 홍형태와 조우진에 추가 선수까지 내줬다.
트레이드 사실이 발표되자 스타즈 팬들조차 손해 보는 장사 같다고 투덜거렸지만 신상욱 회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스타즈에서 뛰던 선수가 포스팅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얘기 들어보니까 송찬우도 고민 중이라며?”
“박준수 선수 장기 계약 조건이 워낙 좋았으니까요. 사실 엇비슷하게 받을 수 있다면 무리해서 메이저리그에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겨울 박준수는 6년, 195억이 스타즈와 장기 계약을 맺었다.
연평균 금액은 세전 기준 32억.
거기에 추가로 세금의 절반을 구단에서 부담하고 연간 5억짜리 옵션까지 붙으면서 연평균 실질 금액은 세금을 제외하고 30억 수준으로 늘어났다.
세금과 추가 지출이 어마어마한 메이저리그에서 이 정도 금액을 손에 쥐려면 연평균 1천만 달러 수준의 계약을 받아내야 하는데 송현민만큼의 커리어를 쌓지 못한 송찬우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었다.
“만약에 송찬우까지 잔류하면 남은 건 유성이뿐이야. 그러니까 어디 가서 이상한 소리 마. 알았어?”
“네. 회장님.”
신상욱 회장의 속내가 궁금했던 박원호 과장은 냉큼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신상욱 회장이 피식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아까 다른 선수들도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건 무슨 말이야? 유성이야 프로에 들어오기 전에 올림픽 우승을 해서 2년 단축이 가능한 거고 다른 선수들은 힘들지 않겠어?”
“말씀하신 것처럼 290점을 3년 안에 채우는 건 현 제도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데뷔와 동시에 국가대표 팀에 발탁되어서 점수가 높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프리미어 12, 올림픽에서 전부 우승을 해야 하는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시즌 전에 열리는 대회라서요. 신인이 뽑힐 수가 없습니다.”
“유성이처럼 U-18 야구 월드컵에서 MVP가 된다고 해도 어렵다는 거지?”
“박유성 선수는 단순히 MVP가 아니라 압도적인 타격 8관왕이었습니다. 설사 그 정도 활약상을 선보인다고 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야구 대회인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바로 합류하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해외 진출 2년 단축은 유성이 말고 없을 것 같은데?”
“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현행 제도가 파격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3년 만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선수는 박유성 선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해외 진출뿐만 아니라 FA 자격 연한도 2년까지 줄일 수 있게 된다면 보다 일찍 장기 계약의 혜택을 받는 선수들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선수들이 FA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풀타임으로 7시즌을 채워야 했다.
하지만 입단과 동시에 개막전 엔트리에 합류하는 신인 선수는 손에 꼽히고.
계속해서 1군에 머무르는 것도 쉽지 않다 보니 풀타임 7시즌을 채우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반적인 장기 계약 논의는 FA 시즌 직전년에 진행되는 게 기본이었다.
다만 국가 대표로 활약하는 선수들의 경우 국가 대표 포인트 제도를 통해 한 시즌을 앞당길 수 있다 보니 박준수처럼 해외 진출 자격 조건(5시즌)을 채울 때 장기 계약을 추진하는데 만약에 FA를 최대 2시즌 앞당길 수 있게 된다면 4시즌 만에 대박 계약을 터뜨리는 선수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들 유성이를 메이저리그에 보내려고 안달이지만 결국 그게 다른 구단들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거지?”
“현재 프로 야구 선수협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요구대로 FA 자격 연한 1년 단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박유성 선수를 저격하는 제도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선수협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원호 과장의 예상대로 프로 야구 선수협은 오직 박유성만을 위한 국가대표 포인트 개선안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건 말만 선수들을 위한 거지 눈엣가시 같은 유성이만 치우겠다는 속셈이잖아?”
“여기서 끝낼 수는 없어. 모든 선수들이 공평하게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FA까지 확대 시행해야 해!”
각 구단들의 꿍꿍이를 알아챈 선수협에서 협회 소속 선수들의 의견을 모으며 단체 행동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박유성의 활약은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