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80화
34. 박유성은 특별해(5)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갱생의 의지가 없는 기자들만 추려서 진행 중인데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법무실장은 뭐래?”
“고소를 받은 기자들은 전부 시간 끌기 작전으로 나오는 만큼 고소 외적인 압박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광고를 자르자는 거야?”
“전부 다 뺀다면 정정 기사가 나겠지만 그걸로 성에 차시겠습니까?”
“안 차지. 고작 정정 기사나 보려고 고소한 게 아니잖아?”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정치권과 달리 스포츠계나 연예계 쪽에서는 어지간해서 고소하는 일이 드물다.
실력만큼이나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가 중요한데 기자들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박유성이 3할 후반쯤 치고 스타즈가 랜더스와 1위 싸움이 치열한 상태라면 신상욱 회장도 고소 카드를 바로 꺼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유성이 프로 야구 역사를 다시 쓰고 있고 그 덕분에 스타즈가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기자들이 멋대로 떠들어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박 과장.”
“네. 회장님.”
“내가 왜 기자들을 고소한 거 같아?”
“이미지가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여느 때처럼 갑작스럽게 질문이 날아왔지만 박원호 과장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고소를 받은 기자들은 일개 선수의 일로 모기업 법무팀이 나섰다며 어이없어했지만.
이번 고소는 단순히 박유성의 이미지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래. 이미지. 그게 중요해. 단장 백승수라는 드라마에도 나오잖아? 그깟 공놀이 하는 데 200억씩 버린다고. 우린 그것보다 더 쓰지. 프로 야구 구단 중에 우리가 제일 많이 쓰고 있고. 그 이유가 뭐겠어?”
“우승입니다.”
“그래. 우승. 솔직히 10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지금 분위기라면 리그 우승은 확정이잖아?”
“네. 그렇습니다. 지난번에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이 추세라면 박유성 선수를 벤치에 앉혀놓아도 우승에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파이터즈와의 주말 3연전을 쓸어담은 스타즈는 30승 3패, 승률 0.909를 기록 중이다.
프로 야구가 만들어진 이래 30경기 승률이 9할을 넘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토록 압도적인 성적을 내고 있는데 핵심 선수의 도핑 논란을 내버려 둔다면 추후 통합 우승을 차지하더라도 그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프로 야구가 막 생겼을 때만 해도 말이야. 선동연과 채동원이 최고였어. 그 둘이 전부인 줄 알았지. 그런데 말이야. 20년쯤 지나서 선동연과 채동원의 활약을 보지 못한 야구 팬들은 다른 소리를 하더라고.”
“그 시기 야구 팬들에게는 박찬오가 최고였죠.”
“그래. 나도 박찬오를 좋아하지만 솔직히 선동연이나 채동원만큼은 아니었거든? 그런데 또 세대가 바뀌니까 평가가 달라지더라고.”
“아무래도 박찬오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첫 한국 선수니까요.”
“10년 전에는 또 류현신이 최고였어. 그런데 요즘은 어때? 누가 제일 인기가 많아?”
“지금은 송현민입니다.”
“그럼 타자들 중에서 송현민이 최고인가? 천재 기종범이나 꾸준한 양준석, 홈런왕 이승협보다 더 위야?”
“일부 팬들이 송현민은 이승엽과 양준석의 상위 호환이라고 평가하지만 냉정하게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아직은 멀었지. 하지만 송현민이 메이저리그에서 10년쯤 활약하면 어떨까? 추신우보다 더 인정받을까?”
“지금처럼 활약한다면 추신우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상욱 회장이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용준 비서실장을 보며 말했다.
“나는 말이야. 올해 우리가 우승한다면 그걸 모든 프로 야구 팬들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키고 싶어. 2029년 스타즈는 최고의 팀이었고 역대 그 어떤 우승팀들과 붙어도 지지 않았을 거라는 안줏거리를 만들고 싶다고.”
“그렇게 될 겁니다. 회장님.”
“성적은 잘 나오고 있지. 하지만 계속해서 잡음이 나잖아. 지금 헛소리 떠드는 놈들이 20년쯤 지나서 전문가 흉내를 내면서 또다시 헛소리를 지껄이면, 그때도 야구 팬들이 인정해 줄까?”
신상욱 회장의 물음에 한용준 비서실장은 입을 다물었다.
신성 그룹을 맨손으로 일으켜 세운 신상욱 회장의 역사도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점점 퇴색되어 가는 마당에 언론에서 호도를 한다면 스타즈의 창단 첫 우승 또한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유난 떤다고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대응해. 신성 그룹의 역사에 똥물을 튀기는 거, 난 못 봐.”
“네. 법무팀과 언론대응팀에 다시 한번 일러두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식사 말이야. 주희도 온다고 했다고?”
“주중에 입국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주연 양도 참석할 예정이고요.”
“내가 전에 말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제 와서 왜들 이래?”
신상욱 회장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있다.
본래 아들이 하나 더 있었지만 어려서 교통 사고로 죽었고.
장남 신현민 부회장과 차남 신현준 부회장, 장녀 신현주 부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
피아니스트인 막내 신현아는 한발 물러난 상태이지만.
증여한 주식이 적지 않으니 나중에는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
그래서 신상욱 회장은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자신의 눈앞에서는 절대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고.
자신이 해마다 유언장을 고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식들도 보이는 곳에서만큼은 꼴사납게 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신상욱 회장은 두 달에 한 번, 모든 가족들이 모여 식사하는 날을 만들었다.
군 복무나 죽을병에 걸려 입원하는 걸 제외하고는 무조건 전원 참석해야 했는데 밖에서 놀기 좋아하던 장손 신주승이 세 번 불참했다가 신상욱 회장의 눈 밖에 나 본사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된 이후로 가족 식사 일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년 LA 올림픽이 끝난 직후 찾아온 식사 날.
신상욱 회장은 넌지시 박유성의 이야기를 꺼냈다.
‘난 유성이 손주사위 삼고 싶은데 어떻게들 생각하니?’
신상욱 회장의 박유성 사랑을 잘 알지 못했던 손녀들은 뜬금없는 할아버지의 말에 웃기만 했고.
자식들은 무슨 스포츠 선수를 집안에 들이냐며 못마땅해했다.
그나마 둘째 신현준 부회장의 차녀인 신민아가 박유성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라 다음 주에 밥을 먹을 때 슬쩍 소개를 시켜줄 생각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신현주 부회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민아만 손녀예요? 우리 세영이는 외손녀라고 차별하시는 거예요?
“내 피를 물려받았으면 다 똑같은 손녀지 친손녀가 어디 있고 외손녀가 어디 있어? 네 남편 정치 인생 막고 싶지 않으면 밖에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럼 그날 우리 세영이도 불러주세요.
“땀내 나는 스포츠 선수가 뭐가 좋냐며?”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와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죠. 아무튼 세영이도 꼭 불러주세요. 꼭이요!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던 신현주 부회장이 딸 유세영을 밀어넣자 큰 며느리도 이때다 싶어 둘째 딸인 신주연을 밀어 넣었다.
“주연이는 아직 학생이잖아?”
-박유성 선수 조만간 메이저리그 가잖아요? 주연이 졸업하고 나면 미국 유학 보낼 생각이었으니까 더 낫지 않을까요?
“흠……. 주연이는 뭐라는데?”
-아시잖아요. 주연이 의사 되겠다고 공부만 하는 거. 그런데 박유성 선수가 마음에 든다네요.
“유성이를 알긴 해?”
-아버님. 요즘 박유성 선수 모르면 간첩이에요.
신상욱 회장은 차라리 잘됐다 여겼다.
박유성을 볼 때마다 욕심이 났는데 손녀들이 전부 나서준다면 정말로 손주사위로 삼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느닷없이 유학 중인 신주희까지 끼어들었다.
“보나 마나 큰애 짓이겠지?”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회장님. 아시다시피 주희 양도 한 고집 해서요.”
“하긴. 두 달에 한 번 입국하는 것도 귀찮다고 난리지?”
“네. 아마 세영 양도 참석한다고 하니까 관심을 가진 모양입니다.”
“주희하고 세영이하고 아직도 그래?”
신상욱 회장이 혀를 찼다.
자식들이 서로 으르렁대서 손주들만큼은 사이좋게 지내길 바랐건만.
부모들을 보고 배워서인지 남보다 못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싸운 거라면 함께 불러서 화해라도 시켰겠지만 누가 기업가 자식들 아니랄까 봐 회사 때문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보니 풀어줄 방법이 없었다.
“쇼핑에 한 자리 만드는 건 어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신현주 부회장이 세영 양 자리도 만들 겁니다.”
“커머스만 따로 떼는 건?”
“신현주 부회장이 쇼핑 그룹을 맡고 나서 매출이 좋아졌습니다. 커머스만 떼어서 신현민 부회장 쪽에게 맡기면 커머스 쪽 반발이 클 겁니다.”
“하아. 말아먹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참…….”
6년 전.
다른 재벌가들처럼 자식들에게 회사를 하나씩 맡겼을 때 쇼핑 그룹을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
본래 장남인 신현민 부회장에게 쇼핑 그룹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신현주 부회장이 욕심을 부린 것이다.
“왜 오빠들만 좋은 걸 줘요? 저 메디컬 싫어요. 그리고 쇼핑 그룹은 여자가 해야죠. 큰오빠가 하면 업계 꼴등 할걸요?”
신현주 부회장의 도발에 발끈한 신현민 부회장은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며 쇼핑 그룹을 포기했고.
그런 신현민 부회장을 위해 신상욱 회장은 예정에도 없던 건설 그룹을 내줘야 했다.
문제는 신주희가 오래전부터 신성 쇼핑을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학을 다녀온 다음에 신성 쇼핑에 입사해 커리어를 쌓다가 다른 재벌 3세들처럼 그룹 경영에 참여하려 했던 신주희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셈.
당시에는 그런 손녀의 서운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감정의 골이 이토록 깊이 파였을 줄은 미처 몰랐다.
“어쩌면 그래서 참석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라니? 제 고모한테 쇼핑 그룹을 빼앗아올 수 없을 거 같으니까 유성이 통해서 한몫 챙기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박유성 선수가 회장님 손주사위가 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그 정도로 헛물을 켜겠습니까. 다만 박유성 선수의 좋은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다면 새로 커머스를 만들더라도 충분히 성공시킬 수 있을 겁니다.”
박유성이 광고한 신성 제약의 에너지 드링크 120%는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몸과 마음을 120퍼센트 충전시켜 준다는, 다소 뻔한 카피 문구로 시장에 출시했을 때만 해도 신성 그룹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박유성이 미친 듯한 활약으로 프로 야구판을 씹어먹으면서 요즘은 거의 국민 음료급으로 팔리는 중이었다.
덩달아 신성 제약 주식도 수직 상승 중이고.
증권가에는 신성 제약을 포함한 메디컬 그룹을 포기했던 신현주 부회장이 배가 아파 죽으려 한다는 소문이 정설처럼 나돌고 있었다.
“유성이 광고 모델로 쓰고 싶어 하는 계열사들이 어디야?”
“딱히 어디라고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계열사에서 박유성 선수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른 그룹 광고 담당자들은 아예 송 에이전시로 출근을 하고 있고요.”
“어이구, 그 정도야?”
“축구로 치면 최소 송흔민급이잖습니까. 우리나라의 야구 인기를 감안했을 때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