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78화
34. 박유성은 특별해(3)
“X발!”
있는 힘껏 내던진 공이 총알처럼 머리 뒤쪽으로 사라지자 홍형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졌다.
박유성을 만나면 첫 타석은 꼭 삼진으로 잡아내리라 마음먹었건만.
투 스트라이크를 잘 잡아놓고 몸 쪽에 붙인 공을 얻어맞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박유성은 홍형태의 패턴이 훤히 읽혔다.
정확하게는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었던 주전 포수 고일우의 패턴을 꿰뚫고 있었다.
좌타자를 상대로는 바깥쪽으로 카운트를 잡았다가 무조건 몸 쪽 빠른 공.
반대로 우타자는 몸쪽부터 찌르고 들어갔다가 결정구는 바깥쪽 유인구.
물론 아웃 카운트나 주자 여부에 따라 볼배합이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심플 이즈 베스트를 외치는 고일우가 자신을 상대로 복잡한 사인을 낼 리 없다고 여겼고.
그 예상대로 몸쪽으로 딱 좋은 높이의 빠른 공이 날아들었다.
-박유성 선수가 경기 시작과 동시에 스타즈에게 리드를 안깁니다!
-역시 박유성 선수네요.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상황이었습니다만 자신이 좋아하는 코스의 공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홍형태 선수는 마무리가 아쉽습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잘 잡았거든요? 상대는 7할 타자입니다.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이보다 잘 치는 타자가 없었어요.
-임상훈 해설위원은 승부가 성급했다고 보시는 거군요.
-성급한 정도가 아닙니다. 초구도 빠른 공. 2구도 빠른 공이었어요. 그렇다고 홍형태 선수가 160㎞/h의 공을 던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무슨 근거로 3구까지 빠른 공을 던졌는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상대가 변화구를 노릴 거라 예상하고 허를 찌르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그럴 거면 하이 패스트 볼을 던지든가요. 박유성 선수 상대로 저렇게 뻔한 공을 던지면 답이 없습니다.
임상훈 해설위원의 혹평이 이어지는 동안 박유성은 유유히 그라운드를 돌아 홈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박유성을 지켜보는 파이터즈 팬들은 만감이 교차했다.
“하아. X발. 유성이가 우리 파이터즈에서 뛰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올해 우승 각 세게 잡혔는데.”
“유성이가 우리 선수였으면 못해도 7할은 찍었겠지?”
“타율? 지금도 7할인데 무슨.”
“타율 말고. 우리 팀 승률.”
“7할은 좀 욕심 아니냐?”
“스타즈가 지금 9할인데?”
“스타즈는 유성이 말고도 선수가 짱짱하잖아. 우린 민찬수도 은퇴했고.”
“하아, 민찬수 그 미친 X. 그럴 거면 연예인을 하지 뭐 하러 야구 선수를 한 거야?”
음주 운전 방조 논란으로 출전 정지를 당했던 민찬수는 연초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사유는 연기 활동 집중.
박유성이라는 슈퍼 스타의 등장으로 야구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덩달아 민찬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과감하게 야구를 던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파이터즈의 외야에 구멍이 났다.
민찬수가 일찌감치 은퇴를 결정했다면 외국인 선수로 빈자리를 채웠겠지만 민찬수가 복귀할 거라고 생각하고 선수 구성을 마친 파이터즈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
그나마 다행히도 스타즈에서 잉여 선수로 전락한 박흥선 감독(전 스타즈 감독, 현 파이터즈 감독)의 아이들을 조건 없이 풀어주면서 구멍을 채워 넣긴 했지만.
리그 최고의 타자이며 동시에 리그 최고의 외야수인 박유성의 활약을 볼 때마다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9승 21패로 아홉 수에 걸린 박흥선 감독도 입맛을 다셨다.
“하아. 저놈만 왔더라도 5할은 찍었을 텐데.”
스타즈를 떠나 파이터즈로 왔을 때 박흥선 감독은 눈곱만큼의 미련도 없었다.
물에 빠진 놈 건져줬더니 봇짐 내놓으라는 스타즈보다는 만년 꼴찌인 파이터즈에서 소신껏 감독 생활을 하는 게 낫다고 여겼다.
파이터즈 김경민 단장이 지명권 트레이드에 대한 양해를 구했을 때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박유성이 하나 온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구단이 있어야 선수들이 있는 거죠.’
에이스인 송찬우를 트레이드 한 건 아쉬운 일이지만 홍형태, 조우진과 다시 함께하게 됐으니 지금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성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박유성은 야구를 잘해도 너무 잘했다.
“할 수만 있다면 트레이드 다시 무르고 싶습니다.”
임재석 수석 코치가 푸념하며 말을 받았다.
스타즈에서 기존 원칙을 깨고 박유성을 우선 지명했으니 트레이드를 되돌린다고 해서 박유성이 파이터즈에 올 일은 없겠지만 지금은 그저 스타즈에 박유성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그러자 박흥선 감독이 다시 정신 승리에 들어갔다.
“트레이드 물러서 뭐 하게? 지금 국대 포인트 2년까지 적용하자고 난리인데.”
“그렇게 되면 뭐가 달라지는 겁니까?”
“국대 포인트는 아무리 쌓아도 1년이 최대잖아. 그걸 최대 2년까지 쌓게 하자는 거야.”
“그러니까요. 그게 의미가 있는 겁니까?”
“그걸 지금 수석 코치가 감독한테 물어야겠어? 반대가 되는 게 정상 아니야?”
박흥선 감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수석 코치들은 감독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것들까지 알아서 보고한다던데 임재석 수석 코치는 한량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임재석 수석 코치가 씩 웃으며 박흥선 감독의 팔짱을 꼈다.
“또 왜 그러십니까아~”
“징그럽게 왜 이래?”
“징그럽긴요. 제가 감독님 모신 지가 몇 년인데요?”
동호 대학교 시절부터 박흥선 감독을 지근에서 보필해 온 임재석 수석 코치는 박흥선 대변인으로 통했다.
그만큼 오래 알고 지내다 보니 박흥선 감독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세 알아챘다.
“언론에서 떠드는 것 때문에 그러세요?”
“까놓고 말해서 차포 떼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 안 그래?”
“그럼요. 지난 시즌에는 송찬우 데리고도 10승밖에 못 했습니다. 송찬우 빠지고 민찬수까자 나갔는데 9승이면 선방하고 있는 거죠.”
“그걸 왜 모르냐는 거야.”
길게 한숨을 내쉬던 박흥선 감독의 시선이 맞은편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자신이 서 있었던 그 자리에 김석률 감독이 팔짱을 낀 채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 감독은 뭘 아나?”
“알겠습니까? 기껏해야 고등학교 애들 가르쳤는데요.”
“연수 경험은 제법 된다면서?”
“아이고, 감독님. 개나 소나 다녀오는 연수가 뭐가 중요합니까? 우리 감독님처럼 프로팀을 이끈 경력이 중요한 거죠.”
“하긴. 요즘 나한테 아마추어 출신 감독이라고 하는 놈들 없잖아?”
“그럼요. 감독님 벌써 6년 차입니다. 프로에서 날고 기던 선수들 중에 프로 감독 5년 이상 한 사람 몇 명 없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감독님이시고요.”
임재석 수석 코치가 비행기를 띄워주자 굳었던 박흥선 감독의 표정이 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타구가 다시 외야 쪽으로 뻗어 나가자 박흥선 감독의 이마에 골이 파였다.
“저 녀석 뭐 하는 거야? 어제 또 클럽 간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제 일찍 숙소 들어가는 거 제가 확인했습니다.”
“확인은 무슨. 깨톡이나 보냈겠지.”
“그렇다고 다 큰 선수들 일일이 감시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아무튼 요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박흥선 감독의 한숨에 임재석 수석 코치는 쓰게 웃었다.
홍형태가 아홉수를 끊어보겠다며 열심히 준비해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경기로 보여주지 못하는 이상 더는 두둔할 수가 없었다.
그때 다시 따악, 하는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우익수 쪽으로 날아갔다.
“안 넘어갔지?”
“플라이입니다.”
박흥선 감독은 아웃이 될 거라는 임재석 수석 코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타구는 우익수 성재율의 키를 살짝 넘어 뒤로 빠졌고.
스타즈는 다시 한 점 점수 차이를 벌렸다.
-블레이크 테일러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박준수 선수는 3루까지! 스타즈가 경기 초반부터 안타를 몰아칩니다.
-하하. 이것 참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성재율 선수가 타구를 잘 쫓아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놓쳤는데요. 라이트에 공이 들어갔을까요?
-저건 그냥 기본이 안 된 수비입니다. 박준수 선수인데 당연히 타구가 뻗어 나갈 걸 생각했어야죠.
-임성훈 해설위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문적인 거야 박재흥 해설위원의 말이 맞겠죠. 다만 투수로서 정말 짜증 나는 플레이입니다. 저런 건 실책을 주지도 않거든요?
-임상훈 해설위원의 말처럼 안타로 기록됐는데요.
-저런 말도 안 되는 플레이로 평균자책점이 올라가면 투수는 진짜 기운 빠집니다. 저러면 우익수 쪽으로 타구만 날아가도 심장이 철렁합니다.
-지금 성재율 선수가 공이 보이지 않았다는 제스처를 취한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그게 다 설렁설렁 뛰어서 그런 겁니다. 박유성 선수 보세요. 타구 판단이 빠르니까 한발 먼저 가서 타구를 기다리잖아요? 타구 판단이 잘못됐다면 부지런히 뛰기라도 하든가요. 마지막 순간에 잡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속력을 줄여놓고 라이트 핑계는 보기 추합니다.
박재흥 해설위원이 작심하고 쓴소리를 쏟아내자 채팅창으로 옹호의 목소리들이 올라왔다.
└박재흥은 파이터즈 파크 외야수들 수비 힘든 거 모르나?
└원래 이 시간에 외야수들 공 자주 놓쳐요. 작년에도 이런 적 많았습니다.
└박재흥 스타즈한테 돈 받았냐? 적당히 해라.
└진짜 이럴 때마다 비인기 구단 팬은 웁니다. ㅠ.ㅠ
애당초 성재율은 수비보다 공격적인 재능을 보고 뽑은 선수였다.
게다가 구장 설계 문제로 라이트가 공을 집어삼키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터라 박재흥 해설위원의 독설이 편파 해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1회 말.
박유성이 라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간 타구를 기가 막히게 잡아내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 타구가 박유성 선수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수비는 저렇게 해야 합니다. 타구 판단을 완벽하게 하니까 빠지는 공도 여유롭게 잡아내잖아요?
-지금 박유성 선수도 라이트 때문에 공이 안 보였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아까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라이트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라이트 때문에 공을 놓칠 수는 있죠. 하지만 아까 성재율 선수는 평범한 타구를 제대로 쫓아가지도 못했습니다. 반대로 박유성 선수는 공이 안 보이는 와중에도 타구의 방향을 예측해서 끝내 잡아냈고요. 이건 기본기의 차이입니다. 성재율 선수가 파이터즈의 우익수로 계속 출전하려면 라이트 핑계 댈 시간에 타구 판단 연습부터 해야 합니다.
박유성의 호수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파이터즈 타자들이 선발 투수 저스틴 스몰의 구위에 눌리면서 중견수 쪽으로 먹힌 타구들이 여러 개 나왔는데 그때마다 박유성은 한발 빠른 움직임으로 전부 잡아냈다.
그때마다 박재흥 해설위원의 입에서 극찬이 쏟아졌고.
파이터즈 관중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모처럼 파이터즈 파크에 온 송찬우도 박유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유성이 저 녀석 뭐지?”
“새삼스럽게 왜요? 유성이 수비 잘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요.”
“저건 그냥 잘하는 수준이 아닌데? 마치 파이터즈에서 10년쯤 뛴 녀석 같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수비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전직 파이터즈 에이스였던 송찬우는 박유성이 동선 자체가 놀랍기만 했다.
1년 반 만에 급조하듯 지은 파이터즈 파크는 외야 지면이 고르지 않았다.
잔디로 잘 덮어서 육안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만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별생각 없이 달렸다간 발목을 접질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박유성은 외야 곳곳에 펼쳐진 함정들을 전부 피해 움직였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지만 방금 전 센터 쪽으로 뻗어 나간 타구를 빙 돌아서 잡아내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김혜성이 한마디 거들었다.
“유성이 원래 경기 전에 그라운드 파악부터 하잖아요.”
“그래?”
“모르셨어요? 먼저 오면 천천히 외야 밟고 다니잖아요.”
“그거 루틴 아니었어?”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라운드 컨디션 점검하는 거라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