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75화
33. 감히 누굴 건드려?(8)
중학교 시절 호남 지역 최고의 유망주로 꼽히던 임찬기와 송찬우가 나란히 광일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고교 야구 기자들은 1학년이 끝나기 전에 둘 중 한 명이 수도권으로 전학을 갈 거라 예상했다.
“서울 학교도 아니고 지방 학교에 에이스 투수가 두 명일 필요는 없지.”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쪽이 먼저 서울로 갈 거야.”
“송찬우가 유력해. 임찬기는 타이거즈 좌완 에이스 계보를 이을 재목이라고.”
“체격은 송찬우가 낫지만 그것 말고는 장점이 없으니까.”
임찬기는 중학교 시절부터 148㎞/h의 빠른 공을 던졌다.
반면 송찬우는 체격만큼 구속이 나오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변화구를 던진 탓에 포심 패스트 볼을 제대로 채지 못했다.
하지만 투수 조련사로 유명한 광일 고등학교 송경환 감독은 임찬기와 송찬우에게 똑같이 기회를 주었다.
“전국 대회에서 수도권 팀들이 강한 이유가 뭔 줄 아니? 좋은 투수들이 많아서야. 좋은 투수 한 명으로는 전국 대회에서 절대 성적을 낼 수 없어. 최소한 두 명은 있어야 해.”
대신 송경환 감독은 자존심이 강한 임찬기를 먼저 등판시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송찬우의 성장을 이끌어냈다.
140㎞/h 초반에 머무르던 송찬우의 구속이 150㎞/h를 넘어 155㎞/h까지 올라오자 임찬기도 악착같이 구속을 끌어 올렸고.
임찬기의 슬라이더가 언터처블 소리를 듣자 송찬우도 자신만의 주무기인 스플리터를 연마했다.
그렇게 선의의 경쟁을 펼친 두 사람 덕분에 광일 고등학교는 박준수가 버티는 상남 고등학교와 민병구의 배성 고등학교를 제치고 전국 대회 트로피를 연거푸 들어 올릴 수 있었고.
임찬기와 송찬우는 타이거즈와 파이터즈에 우선 지명 선수로 뽑히며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3학년 초반까지만 해도 송찬우보다는 임찬기가 조금 더 낫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와야 한다는 좌완 파이어볼러의 이점과 다소 와일드하지만 유연한 투구폼에 지고는 못 사는 승부욕까지 에이스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찬우가 실전 경기에서 스플리터를 구사하기 시작하면서 평가가 달라졌다.
“그래도 임찬기지. 좌완이잖아.”
“좌완이면 뭘 해? 포심 슬라이더 투피치인데.”
“임찬기는 두 종류의 슬라이더를 던진다니까 그러네.”
“그렇게 따지면 송찬우는 못 던지는 공이 없는데? 포심에 투심, 스플리터, 슬라이더…….”
“됐고, 그래서 타이거즈는 누구를 뽑는다는 거야?”
“몰라. 임찬기로 확정했는데 지금 계속 회의 중이래.”
타이거즈 구단은 우선 지명 선수 발표 마지막 날까지 시간을 끌다가 임찬기를 호명했다.
급성장한 송찬우보다는 계속해서 꾸준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임찬기가 조금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타이거즈의 선택에 실망한 송찬우는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다.
그 바람에 스타즈는 우선 지명 대상에서 송찬우를 빼버렸고.
생각만큼 좋은 조건을 제시받지 못한 송찬우가 드래프트 참가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가 무섭게 파이터즈가 끼어들면서 송찬우를 낚아채 버렸다.
프로에 가서도 임찬기와 송찬우의 입지는 달랐다.
타이거즈 구단에서 미래의 에이스로 점찍은 임찬기는 1년 차 때부터 선발 기회를 보장받고 성장한 반면.
12구단을 맞추기 위해 급조되다시피 창단한 파이터즈는 전도유망한 송찬우를 일찍 키울 생각이 없었다.
“괜히 1군에 빨리 올려봐야 FA만 빨라지잖아? 우리가 당장 성적 낼 것도 아니니까 2군에서 경험 쌓게 해.”
그렇게 다시 임찬기가 앞서가나 싶었는데 송찬우가 단숨에 파이터즈의 에이스 자리를 꿰차면서 상황이 또 뒤집혔다.
└국내 최고 유망주는 누가 뭐래도 송찬우지.
└지금 우리 찬기 무시하나요?
└임찬기는 토종 에이스도 아니잖아요? 송찬우는 외국인 투수들 대신 1선발로 뛰는 중임.
└그건 파이터즈 선발진이 쓰레기라 그렇고요. 타이거즈 선발진 생각 안 하나요?
└그냥 우완 최고 기대주 송찬우, 좌완 최고 기대주 임찬기로 정리합시다.
└찬성. 둘 다 잘하는데 우리끼리 싸울 이유 있나요?
└대다수 야구팬들은 둘 다 인정합니다. 다만 타이거즈 팬들하고 파이터즈 팬들만이 인정 못 할 뿐. ㅋㅋㅋㅋ
└솔직히 실력은 송찬우가 한 수 위죠. 송찬우가 타이거즈에서 뛰었다? 지금보다 성적 더 잘 나올걸요? 하지만 임찬기가 파이터즈에서 송찬우만큼 성적 낼 수 있을까요?
└거기까지만 해요. 타이거즈 팬들 몰려옵니다. ㅋㅋ
타이거즈에서 편히 야구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임찬기는 송찬우와 제대로 한번 맞붙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타이거즈는 송찬우와 임찬기의 맞대결을 허락하지 않았다.
외국인 투수를 앞세워 송찬우를 잡고 임찬기를 또 다른 승리 카드로 쓰는 게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송찬우가 스타즈로 넘어왔을 때는 스타즈 쪽에서 맞대결을 피했다.
포스트 시즌 진출을 위해 사활을 거는 상황에서 송찬우를 질 수도 있는 경기에 내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 시절 이후로 9년 만의 맞대결이야. 여기서 끝낼 수는 없어.’
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뒤 임찬기는 마운드에 올라온 송찬우를 바라봤다.
파이터즈 시절 송찬우는 마운드에서 웃는 법이 없었다.
형편없는 득점 지원에 연봉값 못 하는 외국인 투수들 때문에 소년 가장 노릇을 해야 하다 보니 마운드 위에서 사력을 다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의 송찬우는 여유가 가득했다.
연습구를 던지고 가볍게 로진백을 주무르며 내야수들의 수비 위치를 체크하는 것까지.
동점이라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저것도 박유성 효과인가.”
언론에서는 박경호의 합류로 스타즈 선발진이 탄탄해졌다고 말하지만.
박경호가 이적하기 이전부터 스타즈 투수들은 편하게 공을 던졌다.
역대 최고의 중견수 자리를 예약한 박유성과 그런 박유성에게 밀려 좌익수로 자리를 옮겼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수비로 인정받던 다니엘 브리토가 외야를 지키고 있다 보니 투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동엽이 지키는 우익수가 구멍이지만.
박유성의 도움 속에 이동엽의 수비도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중이었다.
거기에 국가대표 포수 박경호까지 합류했으니 이 싸움은 아무리 봐도 송찬우가 유리해 보였다.
“아니야. 나약한 생각 하지 마, 임찬기. 오늘 경기를 잡아내면 편히 야구했다는 얘기도 쑥 들어갈 거야.”
송찬우가 삼자범퇴로 5회 말을 마무리 짓자 임찬기는 담담히 글러브를 들고 마운드 위로 올라갔다.
그런 임찬기를 향해 타이거즈 팬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었다.
-아, 6회에도 임찬기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번 타석 선두 타자가 박유성 선수인데요. 최현우 감독이 임찬기 선수를 조금 더 끌고 가려는 모양입니다.
-임찬기 선수가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첫 타석에서는 3루타를 허용했지만 두 번째 타석은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냈거든요.
-두 번째 타석 때 타구도 잘 맞았는데 중견수 채원준 선수가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죠.
-어쩌면 오늘 경기의 분수령이 될지도 모르는 타석인데요. 임찬기 선수와 박유성 선수 중에 누가 웃게 될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쁘다 바뻐.”
신성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포지션을 결정할 때 박유성이 외야수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내야수는 수비 연습 때 흙투성이가 되지만 외야수는 유니폼을 버릴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야수는 다양한 상황에 대비해 움직여야 하지만 외야수는 달랐다.
타구 판단만 잘하면 비교적 편하게 수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야수라고 해서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서야 할 때면 80미터 이상 되는 거리를 빠르게 가로질러야 했다.
보통 이럴 때는 수건으로 땀을 닦을 틈도 없이 방망이를 꺼내 들고 타석으로 향했지만.
“유성아. 여기 수건.”
“유성아. 물 마셔. 물.”
먼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챙겨주는 송찬우와 박준수 덕분에 박유성도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고마워요. 형들.”
“고마우면 안타 쳐라.”
“아니야. 안타 치지 말고 홈런 쳐. 오늘 찬기 공 빡세다.”
“야 인마. 그게 3번 타자가 할 소리야?”
“그러게 왜 동점을 내줘? 네가 점수 안 내줬으면 이럴 일 없잖아?”
“어휴. 내가 안타도 치고 득점도 하고 다 할 테니까 그만 싸워요.”
요즘 들어 톰과 제리가 되어가는 박준수와 송찬우를 뒤로하고 박유성은 곧장 타석으로 들어갔다.
대기 타석에서 준비를 하지 못해서 좀 찜찜하긴 했지만.
이럴 때 빛을 발하는 게 프로 40년 짬이었다.
‘수비하고 들어오느라 숨이 좀 찰 테니까 빠른 공으로 가 볼까?’
박유성을 힐끔 바라본 강인찬은 초구에 몸쪽 빠른 공을 요구했다.
바깥쪽 승부를 편하게 가져가려면 몸쪽으로 공을 붙일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줘야 했다.
“후우…….”
일찌감치 예열을 마친 임찬기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다.
후앗!
임찬기의 손끝에서 빠져나온 공이 몸 쪽으로 날아들자 박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본래 공 두 개 정도는 지켜볼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로 예쁘게 날아드는 공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욕심내지 말고 정확하게!’
대신에 박유성은 스위트 스폿에 정확하게 공을 얹는 데 집중했다.
요즘 히트 포 더 사이클을 달성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윙이 급해졌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타격 밸런스를 유지했다.
그렇게 방망이 중심에 정확하게 공을 맞혔더니.
따악!
생각보다 멀리 타구가 뻗어 나갔다.
-아! 큽니다!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건 넘어간 거 같은데요?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우익수우우우! 타구를 포기합니다! 홈런! 박유성 선수가 다시 한번 스타즈의 리드를 만들어냅니다!
펜스를 맞고 튕겨 나올 걸 감안해 빠르게 내달렸던 박유성은 홈런이라는 3루 베이스 코치의 사인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늦췄다.
그러고는 유유히 3루 베이스를 밟은 뒤에 블레이크 테일러와 박준수가 기다리고 있는 홈으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허탈한 얼굴로 지켜보던 임찬기가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고.
최현우 감독도 쓴웃음을 지으며 더그아웃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여기서 투수가 바뀝니다.
-임찬기 선수가 5회까지 투구수가 많았는데요. 한 템포 일찍 교체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임찬기 선수. 오늘 5이닝 동안 3피안타 2실점에 탈삼진을 무려 10개나 잡아냈습니다만 박유성 선수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투수들에게는 거의 통곡의 벽이죠. 그래도 임찬기 선수.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오늘 정말 잘 던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임찬기 선수와 송찬우 선수의 맞대결도 송찬우 선수의 판정승으로 끝나게 될 것 같은데요.
-그건 아직 모르죠. 타이거즈 타자들이 6회에 경기를 뒤집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비록 박유성에게 연거푸 얻어맞긴 했지만 오늘 임찬기의 공은 이번 시즌 들어 가장 좋았다.
반면 송찬우는 구속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다.
평균 155㎞/h 정도에서 유지되던 빠른 공이 140㎞/h 후반까지 내려와 있었다.
하지만 파이터즈에서 온갖 고생을 한 송찬우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경기를 풀어나가는 요령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송찬우의 공을 받는 게 국가대표 포수 박경호였다.
-황대식 선수가 친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향합니다. 유격수 최일준이 잡아 1루로. 쓰리 아웃. 6회 말 타이거즈의 공격도 삼자범퇴로 끝이 납니다.
7회까지 잘 틀어막은 송찬우는 승리 투수 요건을 만족시키고 마운드를 내려갔고.
고우혁-신영기-김정석으로 이어지는 필승조가 6개의 아웃 카운트를 깔끔하게 잡아내면서 2 대 1, 한 점 차 리드를 지켜냈다.
그렇게 송찬우와 임찬기의 프로 첫 맞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경기는 박유성의 승리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