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74화
33. 감히 누굴 건드려?(7)
임찬기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박유성을 만나면 절대 안타를 맞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마운드에 올랐는데 박유성의 손가락 하트에 긴장이 풀려 버렸다.
그러자 포수 강인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찬기야! 집중!”
강인찬의 외침에 임찬기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러고는 강인찬의 미트를 향해 정확하게 슬라이더를 꽂아 넣었다.
-초구는 바깥쪽! 임찬기 선수가 침착하게 스트라이크를 잡아냈습니다.
-임찬기 선수의 주무기인 고속 슬라이더인데요. 박유성 선수가 허를 찔린 느낌입니다.
타이거즈 팬들도 임찬기가 박유성을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내자 마치 삼진으로 돌려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환호했다.
하지만 박유성은 공 하나를 흘려보내면서 임찬기의 컨디션을 체크했다.
“오늘은 슬라이더가 좋네. 바깥쪽 공에 신경을 써야겠어.”
송찬우가 8점 이상의 피칭을 꾸준히 해주는 투수라면 임찬기는 10점과 6점 사이를 오가는 유형의 투수였다.
슬라이더를 통해 확인한 오늘의 임찬기는 9점 이상.
이대로 분위기를 타게 둔다면 타이거즈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 속에서 끌려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찬기 형한테는 미안하지만…… 힘을 좀 빼놓아야겠어.’
느긋하게 루틴을 마친 박유성은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2구째 몸 쪽을 파고드는 빠른 공을 가볍게 때려냈다.
-1루 쪽 그물망을 강타하는 파울! 이제 볼 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로 바뀝니다.
-방금 공은 볼이었는데요. 초구 스트라이크 때문일까요? 박유성 선수가 그대로 타격을 해버렸습니다.
-일단 볼카운트상으로는 임찬기 선수가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지금 관중석에서도 삼진 콜이 울리고 있는데요. 상대는 박유성 선수입니다. 참고로 박유성 선수는 이번 시즌 단 한 번도 삼진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투 스트라이크를 선점한 임찬기는 마음이 급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유성의 히팅 존이 흔들리고 있는 만큼 정신을 차리기 전에 삼진을 잡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포수 강인찬은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삼진 욕심부리지 마, 찬기야. 삼진이나 범타나 똑같은 아웃이야.’
만약에 박경호가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면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겠지만.
임찬기는 강인찬이 시키는 대로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나는 슬라이더를 던졌고.
따악!
다시 한번 박유성의 스윙을 이끌어냈다.
-이번에도 파울! 두 선수,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역시 박유성 선수네요. 사실 방금 공은 제대로 걷어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박유성 선수처럼 명확한 타격 존을 가지고 있는 선수라면 방금 공이 볼로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S존을 보면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잖아요? 저 정도는 프레이밍으로 스트라이크를 만들 수도 있는 코스입니다.
-그러니까 박유성 선수가 공을 끝까지 잘 지켜봤다는 건가요?
-그거하고는 이야기가 좀 다른데 흔히들 투 스트라이크에 몰리면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보고 다 대응하면 볼카운트가 계속 불리해지잖아요?
-아무래도 볼을 골라내야 볼카운트를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박유성 선수는 타격에 자신이 있으니까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보고 여유롭게 때린 겁니다. 볼이라고 생각하고 멈칫하다 스윙을 하면 땅볼이 날 가능성이 높거든요. 하지만 박유성 선수는 타격에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두어 개 더 걷어내잖아요? 그러면 반대로 투수가 쫓기게 됩니다.
현역 시절 스나이퍼라 불렸을 만큼 정교한 타격을 자랑해 온 장성오 해설위원의 예상은 적중했다.
따악!
4구째 몸 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이어.
따악!
5구째 바깥쪽 높게 날아든 포심 패스트 볼까지 박유성이 걷어내자 임찬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자식. 일부러 걷어내는 거였네.”
뒤늦게 박유성의 속셈을 알아챈 임찬기가 로진백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래도 국가대표 팀에서 한솥밥을 먹은 사이인데 치사하게 커트 신공이라니.
당장에라도 타석으로 가서 헤드락을 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으로 만나는 프로의 세계에서 친분이 있다고 적당히 봐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임찬기 선수가 6구를 준비합니다.
-임찬기 선수. 조바심 내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처럼 박유성 선수가 칠 만한 공을 던져서 타격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장성오 해설위원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여유를 잃은 임찬기는 유인구를 남발했다.
퍽!
6구째 몸 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는 박유성이 골라냈고.
따악!
7구째 몸 쪽을 파고드는 포심 패스트 볼은 날카로운 스윙에 걸렸으며
퍽!
8구째 바깥쪽으로 찔러 넣은 포심 패스트 볼은 빠졌다는 판정을 받았다.
투 스트라이크던 볼 카운트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뀌자 임찬기의 어깨에 더 힘이 들어갔고.
“흐아압!”
요란한 기합 소리와 함께 내던진 공이 몸 쪽으로 몰리듯 날아가자 박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돌렸다.
-박유성 선수가 힘껏 때려낸 타구가 우중간을 완전히 가릅니다!
-3루타 코스인데요.
-박유성 1루를 돌아 2루로! 2루에서…… 곧바로 3루로 내달립니다!
다소 먹힌 타격음을 듣고 하늘 높이 손가락을 찔러 올렸던 임찬기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포수 뒤쪽으로 뛰어갔다.
몸 쪽 꽉차게 들어온 공이라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스위트 스폿에 제대로 걸린 건지 타구가 원바운드로 펜스를 때렸다.
여유롭게 3루까지 들어간 박유성도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왜? 좀 먹힌 거 같아?”
“살짝 안쪽에 걸린 거 같아요.”
“그래도 잘 쳤다. 찬기 공을 이렇게 때려내는 선수는 아마 너뿐일 거야.”
신민호 3루 베이스 코치가 웃으며 박유성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다들 7할이 넘는 타율에 정신이 팔려 있지만.
현장에서 본 박유성의 진가는 안정적인 타격 메커니즘에 있었다.
전광판에 찍힌 임찬기의 구속은 157㎞/h.
지난 시즌부터 웨이트에 집중하면서 최고 구속을 158㎞/h까지 찍었는데 그에 준하는 공이었다.
그런 공이 홈플레이트에 붙어 선 좌타자의 몸 쪽으로 꽉 차게 들어온다면 바깥쪽으로 돌아 나오는 스윙으로는 절대 때려낼 수 없었다.
공이 거의 최단 거리로 날아드는 만큼 인 앤드 아웃 스윙으로 방망이를 간결하게 끌어내야 하는데 방망이 중심에 맞히더라도 힘이 부족하면 범타로 끝나기 일쑤였다.
심지어 박유성은 시즌 한 달 만에 체중이 2㎏이나 빠진 상태.
김석률 감독이 체력 관리 차원에서 도루를 최대한 자제하라고 주문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박유성은 부족한 힘을 완벽한 기술로 커버했다.
기본적으로 빠른 스윙에 국내 타자들 중에 좌투수의 몸쪽 공을 가장 잘 공략한다던 송현민 뺨치는 인 앤드 아웃 스윙과 마지막까지 공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집중력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다 보니 힘이 좋은 외국인 용병 타자들처럼 먹힌 타구를 외야까지 밀어내 버렸다.
이건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금지 약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고차원의 야구였다.
‘진짜 이 녀석은 엄마 배 속에서부터 야구를 했을 거야.’
신민호 주루 코치가 대견하다는 얼굴로 박유성을 바라봤다. 그러자 박유성이 주루용 글러브를 고쳐 끼며 말했다.
“암튼 이번 이닝에 무조건 한 점 내야 해요.”
“그 정도야?”
“오늘 진짜 박빙일 것 같아요.”
박유성이 타격 8관왕 페이스를 이어가자 타순을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톱타자로서 박유성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하위 타순이 약해서 타점 생산력이 떨어지는 만큼 차라리 박준수의 앞에 배치시키는 게 스타즈의 득점력 강화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김석률 감독은 타순 변경 가능성에 대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유성이는 프로 야구 최고의 톱타자입니다. 유성이를 대신할 수 있는 톱타자는 없습니다. 유성이가 직접 요청한다면 고민해 보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지금의 타순을 유지할 생각입니다.”
언론에는 뭉뚱그려 말했지만.
박유성의 숨겨진 또 다른 진가는 바로 상대 투수 파악이었다.
가장 먼저 타석에 서서 최대한 많은 공을 보며 상대 투수의 컨디션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전달하다 보니 벤치에서도 작전을 세우기가 수월했다.
“감독님. 아무래도 스퀴즈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좋겠어. 일단 선취점부터 만들어 보자고.”
김석률 감독을 대신해 최민태 수석 코치가 희생번트 사인을 냈고.
딱.
2번 타자 블레이크 테일러가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슬라이더를 3루 쪽으로 굴려 박유성을 불러들였다.
“젠장!”
자신의 코앞에서 홈플레이트를 밟는 박유성을 보며 임찬기는 다시 한번 짜증을 내뱉었다.
타이거즈 벤치에서도 번트를 조심하라는 주문이 나왔고 강인찬도 공을 하나 빼라는 사인을 냈는데 박유성에게 정신이 팔려 제대로 공을 빼지 못했다.
그러자 강인찬이 서둘러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괜찮아. 찬기야. 타자들 믿고 편하게 던지자.”
강인찬은 임찬기, 송찬우와 같은 광일 고등학교 출신 선수다.
1년 선배로 1학년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국가 대표 원투 펀치의 공을 2년간 받아왔다.
비록 임찬기나 송찬우 같은 재능은 없어서 2군 생활이 길었지만 재작년부터 백업 포수로 뛰다가 올 시즌 주전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됐다.
“알았어요. 형.”
애써 마음을 다잡은 임찬기는 3번 타자 박준수와 4번 타자 다니엘 브리토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2회와 3회까지 삼자범퇴로 끊었다.
-박유성 선수가 친 타구가 중견수 정면으로 향합니다. 쓰리 아웃.
-잘 맞은 타구였는데 중견수 채원준 선수가 미리 길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 대 0 한 점 차의 리드는 3회 말에 끝났다.
호수비 이후 안타라는 야구 격언처럼 1사 주자 없는 가운데 타석에 선 채원준이 송찬우의 스플리터를 잡아당겨 우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때려냈고.
3번 타자 페르난도 마차도가 초구를 밀어 쳐 우익수 앞에 떨어뜨리면서 채원준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홈에서, 홈에서 세이프! 페르난도 마차도 선수가 오늘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이건 완전히 먹힌 타구였는데요. 이게 또 우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1 대 1 동점이 되자 타이거즈 파크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홈 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임찬기는 더 힘을 내서 공을 내리꽂았다.
-헛스윙 삼진 아웃! 임찬기 선수가 오늘 경기 8개째 탈삼진을 잡아냅니다!
-임찬기 선수. 완전히 살아났는데요? 오늘 경기 정말 모르겠습니다.
9번 타자 최일준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포효하는 임찬기에게 박수를 쳐주던 타이거즈 최현우 감독이 전광판 쪽으로 눈을 돌렸다.
5회까지 투구수는 89구.
이닝당 투구수가 많은 편인 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많았다.
게다가 6회 초 선두 타자는 박유성.
“찬기가 유성이를 또 잡아줄까?”
“솔직히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80구 넘기면서부터 힘도 빠졌고요.”
임찬기의 이번 시즌 평균 투구수는 103구.
보통 100구가 넘어가는 시점에 맞춰 투수 교체 타이밍을 가져가는데 상대가 박유성이라면 한 템포 빨리 바꿔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임찬기는 이대로 마운드를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6회까지 던지겠습니다.”
“찬기야. 오늘만 날이 아니야.”
“유성이 무조건 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