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73화
33. 감히 누굴 건드려?(6)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이유가 궁금하면 네가 직접 봐.”
“헐, 이건……!”
“지금까지 썼던 기사 다 내리고 홍민호 빨리 튀어 들어오라고 그래!”
자리로 돌아온 정윤철 기자는 자신이 올린 기사들을 체크했다.
[메이저리그발 약물 파동, 혹시 프로 야구도?]
[7할 맹타의 비결, 약물일 가능성 대두.]
[박유성 미스테리. 일본 언론의 집중포화는 과연 우연일까?]
“뭐가 이렇게 많아?”
다른 기자들이 쓴다고 따라 쓰다 보니 박유성을 직간접적으로 저격한 기사만 12개에 달했다.
[기사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된 기사는 복원되지 않으며 수익이 창출되지 않습니다.]
“하아……. 이건 조회 수 좀 나왔는데…….”
박유성을 대놓고 언급하지 않은 기사들은 내버려 둘까 했던 정윤철 기자는 눈을 질끈 감고 모든 흔적을 없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회신을 보낸 건 다름 아닌 신성 그룹.
괜히 미련을 뒀다가 법적 조치를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지이잉,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사수인 홍민호 기자.
“네. 정윤철입니다.”
-난데, 무슨 일이야? 부장한테 전화 왔던데?
“박유성 기사 관련해서 항의가 좀 들어온 것 같던데요?”
-뭐야?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전화했어? 박유성이 그렇게 무서운 거야?
“신성 그룹에서 법적 대응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법적 대응 같은 소리 한다. 고소할 수 있으면 고소하라고 해. 내가 겁낼 줄 아나?
“그런데 지금 어디세요?”
-알아서 뭐 하게? 암튼 나 찾으면 적당히 잘 둘러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홍민호 기자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정윤철 기자는 그런 홍민호 기자의 전화번호를 수신 거부로 돌려놓았다.
“고소당해도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홍 선배가 알아서 잘하겠지.”
신성 그룹의 보도 자료를 받은 언론사 대부분이 몸 사리기에 들어갔지만 일부 기자들은 끝내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거 웃긴 놈이네? 직접 해명할 생각 안 하고 신성 그룹을 끼워 넣었다 이거지?”
“어디 박유성이 생각이겠어? 에이전트 생각이지.”
“그게 그거지. 둘 다 한통속인데 뭘 따져?”
“그런데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받았다는 답변 말이야. 정말일까?”
“미국 언론에서도 박유성 도핑 관련해서 보도했어. 도핑 검사 결과 아무 이상 없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얘기 아냐?”
“그렇긴 하지. 메이저리그에서 알파 메일이 적발된 게 시즌 시작되고 나서니까.”
“그럼 올림픽하고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는 진짜 실력이었다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
“박유성이 켕기는 게 있으니까 신성 그룹을 움직였을 거라는 생각 안 들어?”
“하긴. 연예인들도 사고 치고 나면 뒷수습은 소속사가 하니까.”
“뭔가 있어. 분명 뭔가 있다고.”
자존심 때문에 기사를 내리지 못한 이들은 계속해서 FBI 수사를 들먹이며 논란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며칠 후 미국 언론에서 알파 메일 스캔들의 수사 결과를 보도하면서 그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결론이 뭐야? 기레기들이 또 기레기 한 거?
└금지 약물이 포함된 알파 메일이 제조, 유통된 것은 작년부터고 미국 내에서만 유통됐다고 합니다. 해외 반출 사례는 없고 추가 조사 계획도 없다고 FBI가 수사 종료함.
└그래도 혹시 누군가가 몰래 가지고 와서 박유성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은 없나요?
└그냥 박유성이 싫다고 그래라. 구질구질하게 뭐 하는 거야?
└진짜 금지 약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먹는다고 당장 경기력이 향상되거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문제없었는데 올 시즌 직전에 알파 메일을 먹었다면 지금의 퍼포먼스는 약물빨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눈 가리고 귀 막는 인간들에게 그런 거 설명해 줘봐야 의미 없습니다. 막말로 박유성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날라다녔으니까 최소 2학년 이전에 금지 약물을 복용했어야 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도핑 검사 이상 없다고 나왔고 고3 때 숱하게 도핑 검사 해도 전부 깨끗했죠. 문제의 알파 메일은 박유성이 도핑 검사 받기 시작한 다음에 나왔고요.
└박유성이 알파 메일 제조법을 알고 몰래 만들어서 복용했을 가능성은 없나요?
└그냥 박유성이 외계인이라고 해라. 아니면 인생 2회차라고 하든가.
└에이, 외계인치고는 성적이 아쉽죠. 10할도 못 치는 쓰레기인데요?
└ㅋㅋ 오랜만에 보네. 10못쓰.
└그리고 야구가 2회차 산다고 실력이 막 늘 만큼 단순한 스포츠가 아닙니다. 노하우가 있으니까 타율이 조금 늘어날 수는 있겠지만 박유성만큼 치려면 그냥 타고나야 해요.
└인정. 최소 3회차 이상이라고 봄.
└그런데 진짜 박유성 멘탈갑 아님? 기자들이 그렇게 떠들어대는데도 7할 타율 유지 중임. ㄷㄷㄷ
└아닙니다. 유성이 초심을 잃었어요. 요즘 들어 자꾸 장타에 욕심내는 중. ㅋㅋㅋㅋ
└근데 만약에 약물빨이면 홈런 뻥뻥 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도핑 아니라고요. 이번에 마이너리그에서 적발된 선수는 박유성 체격에 홈런 몰아쳤다잖아요.
4월 한 달간 타율 0.756에 62개의 안타와 15홈런, 41타점, 74득점, 33도루를 기록한 박유성은 4월 MVP로 선정됐다.
하지만 야구 전문가들은 박유성이 4월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할 거라 내다봤다.
다른 구단에서 박유성에 대한 분석을 어느 정도 마친 상태에서 도핑 의혹까지 불거졌으니 4월처럼 편하게 타격을 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실제로 박유성은 라이온즈와의 원정 3연전에서 5안타로 부진(?)했다.
첫 경기 두 번째 타석에서 올해 라이온즈에 입단한 제이슨 로저스의 투심 패스트 볼에 허벅지를 맞으면서 곧바로 교체됐고.
그 여파가 시리즈 내내 이어졌던 것이다.
다행히 제이슨 로저스가 사구 직후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였고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스타즈 더그아웃에 찾아와 박유성의 상태를 묻는 등 고의성이 없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김석률 감독이 시리즈 동안 도루를 자제시키면서 스타즈의 공격력이 반감됐고 그 결과 1승 2패로 올 시즌 첫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게 됐다.
하지만 홈으로 장소를 옮겨 치른 자이언츠와의 주말 3연전에서 박유성이 10안타 맹타를 터뜨리며 되살아나자 스타즈는 언제 그랬냐는 듯 3연승 행진을 질주했다.
“유성아. 공 맞은 곳은 좀 어때?”
“괜찮아요. 멍도 다 빠졌어요.”
“그럼 내일 경기 알지?”
“걱정하지 마요, 형. 승리 투수 만들어 드릴게요.”
5월의 첫 6연전을 4승 2패로 마무리 지은 스타즈는 타이거즈 원정경기에 나섰다.
첫 경기 선발 투수는 송찬우.
그리고 공교롭게도 타이거즈의 선발 투수는 임찬기였다.
-이 매치를 기다려 온 분들이 정말 많은 줄로 아는데요. 드디어 성사가 됐습니다.
-국가 대표 우완 에이스 송찬우 선수와 국가 대표 좌완 에이스 임찬기 선수의 맞대결이라니. 벌써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송찬우와 임찬기는 고교 동창에 입단 동기였다.
타이거즈에서 송찬우와 임찬기를 두고 고민하다가 좌완이라는 이유로 임찬기를 우선 지명하자 송찬우가 고교 최대어로 드래프트 시장에 나왔고.
때마침 창단한 파이터즈에서 송찬우를 데려가면서 서로 리그가 갈려버렸다.
입단 첫해부터 선발 기회를 보장받은 임찬기와 달리 송찬우는 첫 시즌을 거의 2군에서 보냈고.
2군 리그 다승과 평균 자책점, 탈삼진을 석권하고 난 다음에도 1군과 2군을 오가야 했다.
2년 차 때 반 시즌을 뛰며 7승 3패, 3.55의 평균 자책점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송찬우는 풀타임 첫 시즌이던 2026년 13승(6패, 평균 자책점 3.16)을 찍으며 아시안 게임 대표로까지 선발됐다.
이후 파이터즈의 실질적인 에이스로서 2년 연속 15승을 달성하며 국내 최고의 투수로 성장했지만 동기이자 라이벌인 임찬기와 맞붙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난 시즌 송찬우 선수가 스타즈로 팀을 옮기면서 임찬기 선수와의 맞대결이 성사되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요. 아쉽게 불발이 됐습니다.
-아무래도 스타즈가 막판까지 포스트 시즌 진출 경쟁을 해야 했으니까요. 송찬우 선수의 등판 일정이 상대적으로 타이트하게 잡히면서 등판일이 맞지 않았죠.
-올 시즌에도 임찬기 선수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후유증으로 5선발에서 로테이션을 시작하면서 3선발로 뛰는 송찬우 선수와 전반기에 맞붙긴 어려울 거란 전망이 나왔었는데요. 또 어쩌다 보니까 로테이션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아까 두 선수를 잠깐 만나봤는데요. 두 선수 모두 무조건 이기겠다는 각오를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경기에서 패배한 쪽은 한동안 국내 최고 투수 논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라 불리던 선동연 감독과 고 채동원 감독도 선수 시절에 고작 3번 맞대결을 펼쳤거든요? 두 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리그로 넘어왔다고 해서 자주 맞붙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이제 슬슬 우천 취소 경기가 나오고 하다 보면 로테이션이 완전히 어긋날 테니까요. 오늘 경기가 어쩌면 이번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 맞대결이 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중계진의 호들갑만큼이나 언론에서도 이번 맞대결에 주목했다.
묵직한 포심 패스트 볼과 다양한 구종으로 타자들을 요리하는 우완 송찬우와 한 번 긁히면 잡을 타자가 없을 만큼 위력투를 뽐내는 임찬기가 맞붙었으니 박유성 입단 이후 이만한 호재가 없었다.
타이거즈 팬들은 임찬기가 국내 최고 투수로 등극하는 날이라며 평일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찾아왔고.
스타즈 팬들과 파이터즈의 원조 송찬우 팬들도 송찬우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3루 쪽 관중석을 점거하면서 경기 시작 전부터 나름 팽팽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오늘 누가 이길까?”
“요즘 컨디션으로는 임찬기가 이길 거 같은데? 게다가 임찬기는 홈에서 강하잖아.”
“반대로 송찬우는 홈보다 원정에서 강한데?”
“홈보다 원정에서 강했던 건 파이터즈 시절이고. 스타즈 넘어가고 나서는 홈에서 더 잘했어.”
“그런 식으로 따지면 데이터를 뭐하러 가져와? 그냥 감으로 찍고 말지.”
“송찬우는 바로 전 경기에서 졌잖아. 임찬기는 아직까지 패배가 없고.”
“지난 경기에서 졌어도 송찬우가 다승 1위야. 임찬기는 오늘 이겨야 송찬우 따라가는 거고.”
“이제 곧 경기 시작인데 뭐 하러 입 아프게 싸우고 있어? 직접 보면 되는 거지.”
기자들도 모처럼의 빅매치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나영석 기자는 송찬우와 임찬기의 맞대결에 별 감흥이 없었다.
“선배는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답은 나왔는데 뭐 하러 물어봐?”
“유성이네 팀이요?”
“잘 아네.”
“그런데 저 인간들은 왜 저러는 걸까요?”
“임찬기가 요즘 컨디션이 좋거든. 그렇다고 대놓고 유성이를 잡을 거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저런 식으로 돌려 말하는 거지.”
“유성이도 요즘 컨디션 좋은데요? 사구 후유증 털어내고 안타 10개 쳤잖아요?”
“유성이가 7할을 쳐도 타율이 떨어지면 부진하다고 하는 인간들인데 그런 게 눈에 들어오겠어? 암튼 임찬기는 유성이를 어떻게 상대하느냐가 관건이야.”
“지난 3연전 때는 임찬기 안 나왔죠?”
“5선발로 시작해서 못 나왔지. 아마 그때 유성이 상대했다면 송찬우하고 붙이지도 않았을걸?”
그때 새빨간 방망이를 잡아 든 앳된 타자가 터벅터벅 타석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임찬기를 향해 인사 대신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짜식이 까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