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72화
33. 감히 누굴 건드려?(5)
때아닌 도핑 논란에 박유성은 웃고 말았다.
마치 헌혈을 하듯 피 검사와 소변 검사를 받고 있는데 미국 지역 신문 기사 한 줄 가지고 소설을 써대는 모습을 보니까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의 요구대로 따라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뭐 하나만 걸려라 하는 거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저럴 텐데 내버려 두죠.”
“그래도 기자 회견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 뭐가 달라질까요? 우르르 몰려와서 해명하라고 할 텐데요?”
“나도 어지간해서는 무시하고 싶은데 생각 외로 동조하는 기자들이 많아. 우리 쪽 기자들도 확실한 네 입장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고.”
“아저씨. 일벌 이론이라고 아세요?”
“일벌 이론? 어느 벌통에나 25퍼센트만 일한다는 그거?”
“네. 처음에는 일 잘하던 일벌도 자신보다 일을 더 잘하는 일벌이 생기면 논다는 그 이론이요.”
“그게 그렇게도 해석되는 거냐?”
송광철 대표가 헛웃음을 흘렸다. 박유성이 또래 아이들 같지 않은 거야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이럴 때마다 진짜 프로 1년 차 선수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두 차례, 20년간의 프로 생활을 경험한 박유성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기득권 기자들에게 반감을 갖는 기자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른 누군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또 다른 기득권 기자들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언론에 편승하면 결국 언론에 끌려다닐 겁니다. 아닌 건 아닌 건데 그걸 우리가 해명할 이유가 없죠. 계속 억지 부리면 구체적으로 제가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는 증거를 가져와 달라고 하세요.”
“그건 좀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닐까?”
“막 나가는 건 언론이죠. 그리고 제가 아니라고 기자회견 하면 믿어줄까요? 저한테 도핑하지 않은 증거를 내놓으라고 할 게 뻔한데 그걸 무슨 수로 내놔요? 안 그래요?”
송광철 대표는 나름 정직하고 성실하며 유능한 에이전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야구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야구 선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프런트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구단의 생리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지만 아직 언론을 대하는 건 미숙한 점이 많았다.
“제가 시즌 중에 불필요한 인터뷰는 자제하겠다고 하면서 특정 매체와만 소통하니까 저러는 거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저는 인터뷰 한답시고 제 루틴이 깨지는 거 싫어요.”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다. 미안하다 유성아.”
최선의 해결책으로 기자 회견을 생각했던 송광철 대표는 다시 김찬혁 팀장과 상의했다.
“저는 박유성 선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건 전교 1등한테 시험지 빼돌리지 않은 게 맞냐고 따지는 꼴이잖아요?”
“유성이가 조금 더 일찍 두각을 드러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참…….”
“에이, 대표님까지 그러시면 안 되죠. 선수들마다 포텐이 터지는 시기가 다른데 그렇게 따지면 연습생 신화를 쓴 레전드 선수들은 전부 도핑으로 의심해야 하나요?”
“알지. 아는데 나도 답답해서 그래.”
송광철 대표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유성이 금지 약물에 손을 대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멋대로 의심을 하는 기자들을 납득시킬 확실한 뭔가가 없었다.
그러자 김찬혁 팀장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우리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움직여 보는 게 어떨까요?”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강남 신성 병원 도핑센터장이 박유성 선수하고 친하다면서요?”
“친한 건 모르겠고 유성이 아버님이 암 수술 받을 때 도움을 주긴 했지.”
“저쪽에서 미국발 기사 한 줄로 떠들면 우리는 대중들이 납득할 만한 사람들로 대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호, 그러니까 맞대응하지 말고 저쪽의 주장을 헛소리로 만들자는 거지?”
“이건 박유성 선수 말처럼 끝나지 않는 싸움이에요. 어느 한쪽이 무릎 꿇어야 하는데 박유성 선수를 무릎 꿇릴 수는 없잖아요?”
“그야 당연하지. 내가 무릎을 꿇는다면 모를까 내 선수가 그러는 꼴 절대 못 봐.”
김찬혁 팀장의 조언대로 송광철 대표는 직접 대응보다 주변의 도움을 구했다.
“그러니까 구단 차원에서 강하게 대응해 달라는 말씀이시죠?”
“구단은 선수를 보호해 줄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설마 김 단장님도 일부 기자들이 떠들어대는 말을 믿으시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강남 신성 병원에서 아무 문제 없다는 결과가 나왔는데요.”
“그럼 단장님이 힘을 좀 써주세요. 협회 쪽도 움직여 주시고 병원 쪽도 움직여 주시고요.”
“그냥 깔끔하게 기자회견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도 처음에 그 생각을 했는데 유성이, 아니, 박유성 선수가 그러더라고요. 기자회견해서 아니라고 하면 끝나겠냐고요.”
“흠…….”
“그냥 박유성 선수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인간들입니다. 아무 이상 없다는 증거를 가져다 대도 안 바뀔 거예요. 하지만 대중들은 다르죠. 계속해서 이상한 정보를 주입받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의심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죠?”
“네. 하지만 구단에서 나서고 전문가가 나서고 하면 어떨까요? 그래도 기자들의 카더라 통신을 믿을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이거 제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나 보네요.”
김재식 단장은 곧장 신성 그룹 본사를 찾아가 신상욱 회장을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김 단장 부르려고 했는데 잘 왔어. 그게 무슨 소리야?”
“미국 유력지도 아니고 지역 신문 기사입니다. 어조도 FBI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 중이라는 거지 아시아 시장에 약물이 공급됐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기자 놈들은 왜 저러는 거야?”
“박유성 선수가 시즌 중에 불필요한 인터뷰는 거절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베이스볼 패치 통해서는 인터뷰 기사가 나오던데?”
“베이스볼 패치는 사실 예외로 봐야 하는 게 철저하게 박유성 선수 시간에 맞춰줍니다. 대면 인터뷰가 아니고 전화나 깨톡으로 진행하고요. 추측성 기사나 박유성 선수가 하지 않은 말은 절대 기사화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박유성 선수에게 피해가 가는 기사도 싣지 않고요.”
“하지만 다른 신문사들은 그렇게 못 한다는 거지?”
“일단 그런 것도 친분과 신뢰가 깔려 있어야 하는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박유성 선수에게 관심을 가졌던 건 베이스볼 패치밖에 없습니다.”
“그래. 뭐 언론이 애새끼들마냥 삐친 건 알겠어. 그럼 이 기사는 사실무근인 거야?”
“회장님. 박유성 선수는 작년과 올해 초 미국에서 대회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도합 다섯 차례나 도핑 검사를 받았고요.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걸린 건 새로운 약물이라면서?”
“새롭게 적발되긴 했지만 금지 약물 검사의 틀 밖으로 벗어난 약물은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에 박유성 선수가 정말로 그 이전부터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면…….”
“지난 올림픽 때 무조건 걸렸을 거라는 거지?”
“그전에 태산 고등학교에서 이의신청했을 때 적발됐을 겁니다.”
박유성이 3회차를 시작한 직후 치른 신산전에서 대활약을 하자 태산 고등학교 측에서 도핑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마추어 선수들의 도핑 검사는 하지 않았던 강남 신성 병원 측에서 이례적으로 박유성을 검사했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과로 태산 고등학교의 의심을 일축시킨 바 있었다.
“한 실장. 강남 병원 도핑 검사가 얼마나 해?”
“규모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시아 최대 규모입니다. 분석 정확도도 세계 최고 수준이고요.”
“메이저리그 쪽과 비교했을 때 어때?”
“메이저리그뿐만 아니라 메이저 스포츠 도핑 시스템을 전부 포괄해서 운영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성 병원에서 아닌 거면 아니라는 거지?”
“네. 회장님.”
“그럼 뭘 하고 있어? 기사 내지 않고.”
신상욱 회장이 모처럼 한용준 비서실장에게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한용준 비서실장도 괜히 20년 넘게 신상욱 회장을 보필하는 게 아니었다.
“현재 올림픽 조직위원회와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공문을 보낸 상태입니다.”
“공문?”
“박유성 선수의 도핑 검사 결과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걸 입증하는 공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왔어?”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왔는데 올림픽 조직위원회 쪽에서는 보내준다는 말만 하고 아직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 놈들이 장난치는 거 아냐?”
“도핑 의혹 제기는 일본이 먼저니까요.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유성을 향한 일본 보수 언론들의 흠집 내기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열렸던 U-18 야구 월드컵 때도 도핑 의혹을 운운하며 깎아내리려 했고.
LA 올림픽에서 마츠다 유이토를 상대로 3개의 3루타를 때려냈을 때는 아마추어 선수에게 두들겨 맞았다며 마츠다 유이토에게 혹평을 쏟아냈으며.
연초에 열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MVP를 차지했을 때도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경기력이 형편없었다며 박유성의 활약과 대한민국 대표팀의 우승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박유성이 7할이 넘는 타율로 한국 프로 야구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7할 타율은 터무니없습니다. 한국 야구는 반성해야 해요.”
“박유성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다른 모든 선수들이 희생하는 분위기입니다. 저는 박유성에게 빈볼을 던졌던 레오 로드리게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만약에 박유성이 제 실력으로 저런 엄청난 활약을 펼치는 거라면 한국은 세계 야구에서 퇴출되어야 합니다. 7할 타자라니요. 야구 후진국에서나 나올 법한 기록입니다.”
“박유성은 특별한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잘할 수가 없습니다.”
일부 기자들이 박유성의 도핑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도 이 같은 일본 보수 언론들의 논조 때문이었다.
박유성 하나 때문에 대한민국 야구가 후진국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도핑이라도 하는 편이 낫다는 푸념조차 나올 정도였다.
“그럼 올림픽 쪽 답변 기다리지 말고 메이저리그 쪽 자료 첨부해서 먼저 터뜨려.”
“그러다 만약에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엉뚱한 답을 내놓으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터뜨리라는 거야. 야구에 관해서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절대적이야. LA 올림픽 때도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잖아? 일본에서 힘을 써봐야 논란이 커지도록 시간을 끄는 정도일 거야. 그 시간 주지 마.”
신상욱 회장의 지시대로 한용준 비서실장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받은 도핑 검사 결과와 의견서를 주요 언론들에게 배포했다.
“홍민호 어디 있어?”
“잠깐 취재 나가셨는데요?”
“취재는 개뿔. 또 어디 가서 술 처마시고 있겠지. 그럼 이거, 최 팀장 네가 처리해.”
“이게 뭡니까?”
“읽어봐. 짜증 나게 물어보지 말고.”
안성태 스포츠부 편집부장은 최성국 스포츠 1팀장에게 던지듯 보도 자료를 넘겼고.
문제의 보도 자료를 살핀 최성국 팀장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정윤철 기자로부터 기사 검토 요청이 들어왔다.
“뭐야 이건?”
짜증스러운 눈으로 기사 내용을 훑던 최성국 팀장이 짜증을 내뱉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박유성은 도핑 사실이 없다고 공증을 했는데 도핑 의혹이라니.
심지어 겁도 없이 메이저리그 관계자까지 들먹이고 있었다.
“야! 정윤철!”
“네! 팀장님!”
“너 이 새끼! 이거 책임질 수 있어?”
“어휴, 그럼요. 요즘 다 그 얘기입니다.”
“너 박유성이 도핑에 네 모가지 건다고 했다, 지금.”
최성국 팀장이 언성을 높이자 빙글거리던 정윤철 기자가 눈을 끔뻑거렸다. 어지간한 기사는 다 넘겨주던 최성국 팀장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기사가 잘못됐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