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69화 (269/412)

타자 인생 3회차! 269화

33. 감히 누굴 건드려?(2)

1회차 시절.

박유성은 프로에서 처음으로 맞았던 사구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상대 투수는 위즈의 박중헌.

현재 상무에서 군 복무 중인 투수로 파이터즈 2군 시절에 만났는데 몸쪽에 붙인 슬라이더에 허리 밑을 정확하게 얻어맞았다.

물론 태어나서 처음 맞는 공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제구가 좋지 않은 투수들에게 느려 터진 공을 몇 번 얻어맞고 기분이 나빠서 중학교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에는 홈플레이트에서 조금 떨어져서 타격을 했기 때문에 공을 몸에 맞을 일이 없었다.

어지간한 빈볼은 거의 다 피했고.

딱히 중심 타자도 아니었다 보니 보복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파이터즈 2군에 머물면서 조금 더 홈플레이트에 붙어서 타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몸쪽 공에 약하다고 아예 광고하지 그러냐? 몸쪽 공간을 주면 투수만 편해져.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서야 투수도 맞힐까 봐 몸쪽 공을 함부로 못 던진다고. 알아들었어?”

선수들을 엄하게 키우기로 유명했던 2군 감독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박유성은 억지로 홈플레이트 쪽으로 스탠스를 옮겼고.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공을 얻어맞고 말았다.

“커억!”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주저앉자 코치가 터벅터벅 타석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맞은 부위를 확인하더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안 죽어. 엄살은.”

당시 멍이 보름이나 갔고 사구 후유증으로 제대로 스윙조차 하지 못했지만 다들 별것 아닌 것처럼 굴었다.

‘그래 놓고 자신들이 얻어맞으면 야구 인생 끝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

사구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면서 몸쪽 공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1회차 때만 91개의 사구를 얻어맞았다.

1군 기준으로만 치면 연평균 5개 정도.

가장 많이 맞았던 시즌에는 11개나 맞았는데 몸에 멍 자국이 사라질 때쯤 새 멍 자국이 생겨서 더 짜증 났던 기억이 났다.

2회차 때 거포로 전향한 이유 중에는 사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 힘 있는 타자들을 상대로는 투수들이 몸 쪽 공을 함부로 던지지 못하니 몸쪽 공이 줄어들면 당연히 사구도 줄어들 거라 여겼다.

하지만 2회차 시절 사구는 1회차 시절의 2배였다.

어정쩡한 몸쪽 공은 얻어맞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투수들은 더 깊숙이 몸쪽을 찔렀고.

1회차보다 몸이 비대해지면서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공에도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져야 했다.

그렇게 얻어맞고 또 얻어맞은 끝에 불명예스러운 대기록도 하나 세웠다.

프로 야구 통산 사구 2위.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랜더스의 레전드 거포 채정의 313개는 따라잡지 못했지만 229개의 사구로 그 밑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너 앞으로 10년만 더 뛰면 채정 선배님 기록 갈아 치우겠다.”

“뒤질래?”

“농담으로 한 말인데 왜 이렇게 정색하고 그래?”

“그럼 나도 제수씨한테 네가 농담으로 제수씨랑 사는 거 숨 막힌다고 했다고 말해도 되는 거지?”

“이 새꺄! 가족은 건드리면 반칙이지!”

절친 장태수가 사구로 프로야구 역사를 새로 쓰자는 말을 했다가 손절을 당할 뻔했을 정도로 몸에 맞는 공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손에서 빠지는 변화구도 아니고 160㎞/h에 달하는 빠른 공을 몸에 붙여?

“어디 맞히기만 해봐.”

박유성의 분노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자 임기성이 다급히 타임을 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무슨 일이야?”

“레오. 솔직하게 말해. 유성이를 맞힐 생각이야?”

“왜? 너도 팍처럼 썬을 맞히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레오. 쓸데없는 짓 그만둬. 유성이는 스타즈의 간판 타자야. 유성이를 맞히면 스타즈가 가만있을 것 같아?”

“썬이 먼저 나를 자극했어. 내 앞에서 벌써 4번이나 뛰었다고!”

“유성이는 발이 빠른 타자야. 너뿐만 아니라 모든 투수를 상대로 뛴다고.”

“그러니까 나도 내 스타일대로 상대하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려가. 계속 이러면 포수를 바꿔달라고 요청하겠어.”

통역의 말을 전해 들은 임기성은 어이가 없었다.

박경호가 스타즈로 넘어가면서 랜더스의 주전 포수가 됐다고 생각했건만 레오 로드리게스는 여전히 자신을 백업 포수 취급하고 있었다.

“좋아. 어디 마음대로 해봐.”

포수석으로 돌아간 임기성은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하지만 레오 로드리게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초구와 같은 공을 던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미친 거 아냐?’

박유성이 얄미운 건 임기성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체격이 왜소한 타자들은 맞히기 급급해서 장타력이 떨어지는데 박유성은 양대 리그를 통틀어 홈런과 장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타율이 높으니까 장타율이 높은 건 당연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박유성의 순장타율(장타율-타율)은 0.940.

랜더스의 간판타자인 민병규의 장타율보다도 더 높았다.

게다가 박유성은 민병규처럼 배드볼 히터가 아니었다.

볼넷은 볼넷대로 전부 골라 나가면서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들만 때려냈다.

그렇다면 루상에서는 좀 얌전해야 하는데 출루만 했다 하면 일단 뛰고 봤다.

덕분에 스타즈를 만날 때마다 WAR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임기성도 박유성을 맞힐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박유성은 대한민국 야구계의 미래.

언제고 자신이 국가대표 포수로 뽑혔을 때 팀을 승리로 이끌어줄 핵심 선수였다.

야구 실력은 존경스럽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

영화 대사 중에 돈이 많으면 아버지고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는데 야구 실력으로 따지면 박유성은 모든 야구 선수들이 우러러봐야 하는 야구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마음대로 하라고 글러브를 까닥거린 임기성은 박유성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유성아. 저 녀석이 말을 안 듣는다.”

“……?”

“조심해. 나도 무슨 공을 던질지 모르겠어.”

임기성의 말을 전해 들은 박유성은 오른발 끝을 살짝 열어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레오 로드리게스는 다시 한번 박유성의 얼굴 옆쪽으로 빠른 공을 붙였고.

박유성은 그대로 상체를 뒤로 젖혀 공을 피했다.

그런데 임기성이 그 공을 받지 않으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아, 이게 뭔가요? 레오 로드리게스 선수. 지금 뭘 하는 거죠?

-저건 명백한 고의입니다. 구심은 뭐 합니까? 저런 선수는 바로 퇴장시켜야 합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이선철 해설위원이 분노를 토해내자 채팅창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스타즈 파크에도 팬들의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다.

“야 이 미친 X야! 너 죽을래?”

“레오 저 새끼 일부러 던졌어!”

“심판 뭐 해! 심판 뭐 하냐고!”

다른 선수도 아니고 계약금만 20억을 받은 슈퍼 루키를 맞히려 했으니 이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레오 로드리게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뭐라고 떠드는 거야? 영어로 말해. 영어로.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레오 로드리게스가 관중석을 향해 도발하자 1루수 페트릭 도저가 다가와 레오 로드리게스를 말렸다.

한국 생활을 시작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레오 로드리게스의 행동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용납받기 어려운 짓이었다.

반면 박유성은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오려는 선수들에게 나오지 말라는 손짓을 보냈다.

“영호 형 스톱! 준수 형! 다니엘 잡아요. 아직 경기 안 끝났어요.”

레오 로드리게스는 내심 벤치클리어링을 바랐지만 박유성은 레오 로드리게스의 뜻대로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누구 맘대로 벤치 클리어링이야? 아직 우리나라 야구팬들 매운맛을 못 봤지? 어디 너 혼자 콩이 되도록 까여봐라.’

공이 빠지자마자 1루 쪽 더그아웃으로 뛰어갔던 구심은 김석률 감독을 어렵게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다시 3루 쪽 더그아웃으로 가서 박전권 감독에게 말했다.

“레오 로드리게스 퇴장시키겠습니다.”

“아니 뭘 이런 걸로 퇴장을 시켜요? 그냥 공이 손에서 빠진 거잖아요!”

“이 얘기, 언론에 나가도 됩니까?”

“뭐요?”

“기자들 앞에서도 똑같이 말씀하실 수 있어요?”

“거참. 마음대로 해요. 마음대로. 아니 무슨 심판이 박유성 눈치를 다 보네.”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 했던 박전권 감독도 구심의 강경 대응에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그렇게 양 팀 감독을 모두 만난 구심은 마운드 쪽으로 다가가 퇴장을 지시했다.

-아, 레오 로드리게스 선수. 결국 퇴장됩니다.

-저런 선수는 퇴장으로 끝날 게 아닙니다. 아예 퇴출을 시켜야 합니다.

-이순철 해설위원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는데요.

-메이저리그에도 빈볼 사태가 종종 일어나지만 타자 허리 밑으로 던지는 게 불문율입니다. 레오 로드리게스 선수도 메이저리그에서 뛴 경력이 있는데 타자 머리를 향해 연거푸 공을 던지는 건 우리 야구를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습니다.

-레오 로드리게스 선수. 지난 시즌에도 빈볼 때문에 말이 많았었는데요. 다시 마운드에 서게 된다면 동업자 정신을 좀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불펜 문이 열리며 앳된 얼굴의 선수가 뛰어나왔다.

-레오 로드리게스 선수를 대신해 마운드를 이어받은 투수는 안경호 선수입니다. 2010년생으로 지난해 우선 지명 선수로 랜더스에 합류했습니다.

-박유성 선수와 동기인데요. 불펜에서 제대로 몸을 풀었을지 모르겠네요.

스프링 캠프에서 5선발 후보로 경쟁했던 안경호는 구재영에게 밀려 불펜으로 넘어왔다.

맡은 역할은 롱릴리프.

1군에서 경험을 쌓다가 선발로 전환하라는 구단의 배려였다.

하지만 안경호는 지금 이 상황에서 등판해야 하는 게 끔찍하기만 했다.

“레오 저 X는 뭐 하자는 거야? 사설 토토라도 한 거야?”

방금 전까지 벤치에 앉아 있었던 안경호는 레오 로드리게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1회 3실점을 하긴 했지만 타자들이 경기를 뒤집어줬는데 박유성에게 연속 빈볼을 던지다니.

이건 오늘 경기를 망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경호야. 괜찮으니까 편하게 던져. 유성이 볼넷으로 내줘도 괜찮아. 어차피 레오 주자야.”

투수가 타자와의 승부 도중에 교체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보통은 볼카운트에 따라 달라지는데 지금처럼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상황이라면 볼넷을 내주더라도 앞서 던진 레오 로드리게스가 책임지게 된다.

“네. 알겠습니다.”

박유성과 무리해서 승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안경호는 일부러 바깥쪽 먼 곳으로 공을 던졌고.

박유성은 첫 타석에 이어 두 번째 타석도 볼넷으로 출루하게 됐다.

그러자 김석률 감독이 곧바로 박유성을 빼버렸다.

-아, 지금 박유성 선수가 교체되는데요?

-선수 보호 차원이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조금 늦은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항의 차원에서 박유성 선수를 뺀 것 같습니다.

박유성을 대신해 1루 베이스로 나간 오진욱은 곧바로 2루를 훔쳤다.

안경호가 몸을 풀 시간이 없었을 거라 판단한 스타즈 벤치에서 도루를 지시했는데 그 작전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블레이크 테일러가 우익수 뜬공으로 물러나면서 주자가 2루에 묶였지만.

따악!

뒤이어 타석에 들어온 박준수가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로 동점을 만든 뒤.

따악!

다니엘 브리토가 우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때려내면서 단숨에 경기를 뒤집었다.

“젠장할!”

설마하니 레오 로드리게스가 이런 식으로 퇴장당할 줄 몰랐던 박전권 감독은 부랴부랴 불펜을 가동했다.

하지만 불펜 투수들이 몸을 풀기 전에 스타즈 타자들의 방망이가 폭발하면서 스타즈전 5연패의 늪에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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