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66화 (266/412)

타자 인생 3회차! 266화

32. 트레이드(하)(4)

박경호는 고교 시절부터 탈고교급 포수로 평가받았다.

포수로서 이상적인 체격과 강한 어깨, 준수한 블로킹과 견고한 캐칭까지.

다소 뻔한 투수 리딩만 좋아진다면 프로 구단 어디를 가더라도 주전 포수를 꿰찰 거라 기대를 모았다.

그런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듯 박경호는 데뷔 첫해부터 1군 백업 포수로 경험을 쌓은 뒤에 2년 차 때 시즌 절반 이상을 선발 출전했고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랜더스의 주전 포수 자리를 완전히 꿰차 버렸다.

2024년 0.293의 타율과 20홈런으로 생애 첫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 이후 지난해까지 5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받은 박경호는 드림 리그 나경석과 함께 리그 최고의 포수로 꼽혔다.

그리고 그 진가는 유니폼이 달라졌다고 해서 바뀌지 않았다.

“저스틴. 오늘 어떤 공을 던지고 싶어?”

“빠른 공이 잘 들어가는 거 같은데 네 의견을 따를게.”

“아니야. 빠른 공 위주로 가자.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은 어때?”

“슬라이더는 좀 애매한 느낌이야. 체인지업은 나쁘지 않고.”

“계속 빠른 공만 던질 수 없으니까 체인지업을 유인구로 쓰자. 괜찮지?”

“오케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박경호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박경호가 독불장군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박경호는 투수가 자신 있는 공을 바탕으로 레퍼토리를 짰다.

투수도 인간인지라 날마다 잘 들어가는 공이 달라지게 마련인데 박경호는 그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레퍼토리로 타자들을 공략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저스틴 스몰 선수가 오늘 경기 5개째 탈삼진을 솎아냅니다.

-아직 3회가 끝나지 않았는데요. 이 페이스라면 두 자릿수 탈삼진도 충분해 보입니다.

-김재균 선수는 높지 않았냐고 구심에게 항의를 하고 있는데요.

-김재균 선수 입장에서는 살짝 높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S존상으로는 스트라이크가 맞습니다.

-지금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 여기서 박경호 선수가 단단히 공을 눌러 잡았습니다.

-박경호 선수의 전매특허죠. 박경호 선수가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다면 스트라이크 존에서 조금씩 빠지는 공은 전부 스트라이크라고 봐야 합니다.

저스틴 스몰이 구사할 수 있는 공은 총 5개.

최고 구속 159㎞/h까지 나오는 포심 패스트 볼과 하드 싱커,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였다.

그중 주무기는 높은 키에서 내리꽂는 포심 패스트 볼.

하드 싱커도 위력적이지만 제구가 완벽하지 않다 보니 평소에는 잘 던지지 않았다.

그래서 박경호는 이 하드 싱커를 카운터를 잡는 용으로 활용했다.

“저스틴. 네 하드 싱커는 알려줘도 치기가 어려워. 그러니까 자신감 있게 한복판으로 던져.”

“한복판으로? 그러다 맞으면?”

“맞아봐야 플라이고 우리에겐 유성이가 있어.”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앞선 두 경기에서 빠른 공 일변도의 패턴이 읽히면서 클린업 타자들에게 안타를 얻어맞았던 저스틴 스몰은 박경호의 요구대로 하드 싱커를 꺼내 들었고.

포심 패스트볼처럼 날아들다가 마지막 순간에 우타자 몸쪽으로 잠기듯 꺾여 들어가는 무브먼트에 랜더스 타자들은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그렇게 싱커로 볼카운트를 잡아낸 뒤 포심 패스트 볼로 마무리했다.

-헛스윙 삼진 아웃! 민병규 선수가 오늘 경기 세 번째 삼진을 당합니다.

-저스틴 스몰 선수. 정말 대단하네요. 지금까지 랜더스 타선을 단 2피안타로 꽁꽁 묶고 있습니다.

저스틴 스몰과 박경호가 랜더스 타선을 막아내는 동안 스타즈 타선은 박유성을 앞세워 다시 한번 로메오 클레멘스를 두들겼다.

경기 전 컨디션을 물어보는 한 팬의 질문에 99퍼센트라며 웃으며 대답했던 로메오 클레멘스였지만.

따악!

7할대의 타율로 대한민국 야구 역사를 새롭게 써가고 있는 박유성의 날 선 방망이를 막을 순 없었다.

-아아, 큽니다! 이 타구가 단숨에 오른쪽 담장을 넘깁니다!

-진짜 빨랫줄 같은 타구네요. 정말 제대로 찍혔습니다.

-지난 개막전에 이어 박유성 선수가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를 상대로 다시 한번 선두 타자 홈런을 때려냅니다! 시즌 10호! 박유성 선수가 홈런 타자들을 제치고 이번 시즌 첫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합니다.

박경호가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면 상대하기가 까다로웠겠지만 임기성이 로메오 클레멘스에게 끌려다닌다는 걸 알고 있는 박유성은 초구부터 과감하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몸쪽 무릎 높이로 들어오는 빠른 공을 제대로 후려쳤다.

파열음이 울리자 랜더스의 우익수 브라이언 코빈이 다급히 백스텝을 밟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100여 미터를 비행한 공은 오른쪽 담장 위를 스치듯 넘어갔다.

TV 중계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재식 단장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올 시즌을 앞두고 스타즈 구단은 펜스를 2미터 정도 낮추는 작업을 진행했다.

정확하게는 초기 설계대로 펜스 높이를 복원하겠다는 건데 창단 초반, 빈약한 투수력 때문에 홈런 공장장 소리를 듣자 극약 처방으로 펜스를 5미터까지 올렸던 게 지난 시즌까지 이어진 것이다.

다른 구장이면 충분히 넘어갈 만한 타구도 높은 담장에 막혀 전부 2루타로 변하면서 피홈런은 많이 줄었지만 덩달아 스타즈 타자들의 홈런 생산력도 감소했다.

팀의 간판 홈런 타자인 박준수와 다니엘 브리토의 경우 홈 경기보다 원정 경기 홈런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우리 홈구장의 담장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우리 구단이란 말이죠?”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희 팀 선수들은 스타즈 파크에서 75경기를 뛰어야 합니다. 반대로 나눔 리그 선수들은 9경기, 드림 리그 선수들은 5경기만 치르면 끝이죠.”

“자이언츠 파크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자이언츠 파크는 외야 쪽으로 바람이 자주 붑니다. 담장이 높긴 하지만 의외로 홈런이 잘 터지는 편입니다. 반대로 저희 구장은 홈 쪽으로 바람이 자주 붑니다. 담장 높이는 자이언츠 파크가 더 높지만 홈런 생산력은 스타즈 파크가 최악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윤경태 전력분석팀장의 데이터를 살핀 김재식 단장은 김석률 감독과 상의 끝에 펜스를 낮추겠다는 뜻을 밝히자 주변의 우려가 쏟아졌다.

선발 투수진을 전부 갈아 치운 상황에서 성급히 펜스를 낮추면 다시 올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재식 단장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펜스 높이 조정을 강행했다.

“첫째로 우리 선발진은 작년에 비해 좋아졌습니다. 아니, 창단 이래 가장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송찬우 선수는 원래 피홈런이 적은 투수고 저스틴 스몰과 제이슨 마이너도 쉽게 공략당할 스타일의 투수가 아닙니다. 김혜성 선수도 마찬가지고요.”

송찬우가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로 활약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장타율 때문이었다.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을 기반으로 다양한 변화구를 공격적으로 던지다 보니 정타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큰 것 한두 방에 경기 결과가 바뀌는 국제 대회에서 송찬우의 장타 억제 능력은 큰 무기인 셈.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때도 임찬기가 아니라 송찬우가 선발로 나갔다면 더 쉽게 이겼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었다.

새로 합류한 용병 투수 듀오는 국내 타자들이 쉽게 겪어보지 못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저스틴 스몰은 이름과 달리 키가 2미터가 넘어서 높은 타점에서 공을 찍어 던지며 제이슨 마이너 역시 사이드암에 가까운 좌완 스리 쿼터에 투구폼이 지저분해서 타이밍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시범 경기 다승 1위를 기록한 좌완 파이어볼러 김혜성까지 버티고 있으니 더 이상 펜스의 이점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둘째로 우리 팀에는 힘 있는 타자들이 많습니다. 장영호 선수를 필두로 이동엽 선수와 장태수 선수도 일발장타가 있는 만큼 펜스를 낮추면 확실히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론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올 시즌 좋은 성적을 냈는데 펜스 덕을 봤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선수들의 활약상이 고작 펜스 높이에 가려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결국 김재식 단장이 원하는 대로 펜스 높이가 낮아졌지만, 그 효과를 바로 볼 거라 예상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오히려 낮아진 펜스에 다른 팀만 이득을 챙기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잖았는데 홈 개막전부터 장타가 터져 나오더니 방금 전에도 박유성의 타구가 기가 막히게 담장을 넘어갔다.

“만약 기존 담장의 높이를 유지했다면 펜스 상단을 맞고 튕겨 나왔겠지.”

물론 박유성의 빠른 발이라면 안타가 됐더라도 3루까지 내달렸겠지만.

자이언츠 파크의 높은 담장 때문에 사흘 연속 히트 포 더 사이클 달성에 실패한 박유성에게는 안타보다 홈런이 더 절실해 보였다.

실제로 박유성도 선두 타자 홈런을 때려낸 뒤에 홀가분한 얼굴로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형, 봤죠? 자이언츠 파크가 이상한 거라니까요?”

“유성아. 알았으니까 살살 좀 쳐라. 쫓아가기 힘들다.”

첫 타석에서 홈런에 대한 갈증을 씻은 박유성은 내친김에 히트 포 더 사이클에 도전했다.

히트 포 더 사이클에서 가장 어려운 건 다름 아닌 3루타.

홈런은 힘껏 때리면 만들 수 있지만 3루타는 타구의 코스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운이 따라줘야 했다.

실제로 야구팬들이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이 3루타 빠진 히트 포 더 사이클.

안타와 2루타, 홈런까지 때려놓고 3루타를 치지 못해서 히트 포 더 사이클을 놓친 경우가 실패 사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박유성은 3루타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 대 0, 한 점 앞선 3회 말 1사 이후에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로메오 클레멘스의 체인지업을 노렸다.

초구에 바깥쪽에 꽂히는 포심 패스트 볼을 버리고.

2구째 바깥쪽으로 돌아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걷어내자 로메오 클레멘스는 삼진 욕심을 부렸고.

후앗!

예상대로 몸 쪽으로 떨어지는 먹음직스러운 체인지업을 던졌다.

1회차 시절 초반 박유성은 이 몸 쪽 유인구를 공략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박유성을 상대하던 투수는 2스트라이크 이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몸쪽으로 공을 떨어뜨렸고.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박유성은 그 공들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몸쪽 공에 대응하기 시작한 지 33년쯤 되어가는 지금은 그 어떤 유인구도 우스웠다.

‘퍼 올리기 딱 좋은 공이야.’

무릎 높이로 날아들다 발목 쪽으로 고꾸라지는 공을 힘껏 때려낸 박유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1루로 내달렸다.

그리고 곧바로 2루를 지나 3루까지.

촤라라라랏!

레그 벤트 슬라이딩으로 3루 베이스를 찍고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앵커맨으로 나선 2루수 김재균의 글러브에 송구가 들어왔다.

-박유성 선수가 얼마나 빠른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래서 방금 전 베이스러닝의 시간을 체크해 봤습니다.

-제 생각에는 10초가 안 걸렸을 것 같은데요.

-현역 시절 세 번이나 도루왕 타이틀을 거머쥔 이선철 해설위원은 10초 언더를 예상하셨는데 과연 결과는요? 와, 지금 9.88초가 걸렸습니다.

-허허, 이건 뭐 따라갈 수가 없네요. 야구 그만두고 스프린터로 전향해도 될 것 같습니다.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그저 감탄만 나옵니다.

-지금 보니까 박유성 선수가 타구 쪽은 쳐다보지 않고 베이스러닝에만 집중했는데요. 아마 그래서 9초대가 나온 것 같습니다.

-방금 타구는 사실 좌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타구라 굳이 지켜볼 필요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

-타구를 쳐다보지 않았다는 말에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요, 잘했다고 칭찬하는 겁니다. 주자가 없는 상황이니까 쳤으면 일단 뛰는 게 맞습니다. 가끔 상황 판단 못 하고 타구를 힐끔거리는 선수들이 있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3루 베이스 코치만 보면 됩니다.

-그래도 첫 타석 때처럼 홈런이 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홈런이 될 만한 타구가 아니라는 건 박유성 선수가 가장 잘 알고 있겠죠. 운 좋게 홈런이 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한 베이스라도 더 가는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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