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58화 (258/412)

타자 인생 3회차! 258화

31. 3번째 데뷔전(10)

이제 막 프로에 올라온 신인이었다면 박경호의 말에 정신이 팔렸겠지만 박유성은 느긋하게 루틴을 펼쳤다.

그러고는 다시 만난 박영욱을 지그시 바라봤다.

7회부터 마운드를 지킨 박영욱의 투구수는 벌써 39구.

이미 한계 투구수에 다다랐는데도 아직까지 바뀌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좋은 공을 주지 않겠다는 거겠지.’

박유성의 예상대로 박영욱이 내던진 초구는 바깥쪽으로 멀리 벗어났다.

박경호는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공을 요구했지만.

앞서 박유성에게 홈런을 맞은 탓에 박영욱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이러면 답이 없는데.’

일단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뒤에 유인구로 승부를 보려 했던 박경호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박영욱이 박유성과 승부를 할 멘탈이 아니라면 까다롭게 리드할 이유가 없었다.

-2구째도 바깥쪽으로 빠집니다. 투 볼.

-박영욱 선수가 상당히 지쳐 보이는데요.

-시즌 초라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벌써 41구째입니다. 투수 출신 해설가로서 가슴이 아프네요.

-임상훈 해설위원은 선발과 불펜을 모두 경험하셨으니까 박영욱 선수의 고충이 더 이해가 되실 것 같습니다.

-그렇죠. 지금 랜더스는 희망의 끈을 놓치 못하는 거거든요. 박영욱 선수가 박유성 선수를 잡아주고 타자들이 9회 말에 경기를 뒤집어주면 박영욱 선수가 승리 투수가 되는 거고요. 그런 그림은 좋은데 제대로 그려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박영욱 선수가 3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볼. 몸 쪽 낮은 코스의 공이 들어왔습니다만 박유성 선수가 반응하지 않습니다.

-지금 체인지업이 정말 잘 들어갔는데요. 만약에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저 공이 들어갔다면 십중팔구 방망이가 나왔을 겁니다.

-박영욱 선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박유성 선수, 신인답지 않게 정말 공을 잘 보네요. 방금 공은 타자 입장에서도 노려볼 만한 코스였거든요? 그런데 저걸 안 건드리네요. 너무합니다, 박유성 선수.

임상훈 해설위원의 말대로 이 악물고 던진 공이 먹히지 않자 박영욱도 맥이 빠져 버렸다.

결국 볼넷으로 박유성을 내보냈고.

박전권 감독은 뒤늦게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

-이제 박영욱 선수가 물러나고 황인준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지난해 4승 1패 22홀드에 2.31의 평균 자책점으로 나눔 리그 홀드 1위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박영욱 선수와 함께 랜더스 불펜의 중심축이죠. 아무래도 2번 타자가 외국인 타자라 언더핸드인 황인준 선수를 내세운 것 같습니다.

외국인 타자들은 대개 언더핸드 유형의 선수에 약하다.

메이저리그나 마이너리그에 언더핸드 투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오른손 외국인 타자들의 눈에는 낮게 깔려 들어오다가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공이 마구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 대타를 쓰시죠.”

“대타?”

“진욱이가 준비 중입니다.”

블레이크 테일러는 오늘 경기에서 완벽에 가까운 수비를 선보였다.

하지만 공격적인 기여도는 크지 않았다.

처음 리그에 합류한 용병 선수들이 그러하듯 당분간 적응기가 필요해 보였다.

“그래도 블레이크 테일러가 낫지 않을까?”

“언더핸드에 적응한다면 블레이크 테일러가 낫겠죠. 하지만 오늘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로메오 클레멘스한테 많이 당했으니까요.”

“흠…….”

“그리고 진욱이는 같은 신성고 출신이니까 이런 상황에 익숙할 겁니다. 블레이크 테일러가 못 칠줄 알고 일부러 언더핸드 올렸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게 해줘야죠.”

“유성이가 루상에 있을 때 언더핸드 투수를 올리면 어떻게 되는가 말이지?”

“타석에서 버텨만 준다면 유성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최민태 수석 코치의 조언을 받은 김석률 감독은 타자를 바꿨다.

-스타즈에서도 교체 카드로 맞붙을 놓습니다.

-아, 홍원희 선수가 나올 줄 알았는데 곧바로 오진욱 선수 카드를 꺼내 드네요.

홍원희는 지난 시즌까지 주전급 좌익수로 뛰던 선수였다.

수비 범위가 좁아서 구멍 취급을 받긴 했지만 공격적으로는 쏠쏠한 활약을 펼쳐왔다.

올 시즌에도 장태수와 함께 지명타자 자리를 번갈아가며 뛸 예정이었지만 아쉽게도 개막전 출전은 무산됐다.

-오진욱 선수는 올해 프로에 데뷔한 신인 선수인데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박유성 선수와 같은 신성고 출신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 스타팅 라인업에 신성 고등학교 선수가 세 명이나 뛰는 셈인데요. 신성 고등학교도 이제 야구 명문으로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박유성 선수를 배출해 낸 것만으로도 야구 명문이죠.

-두 분 그만 싸우시고요. 블레이크 테일러 선수 대신 오진욱 선수가 나온 이유가 뭘까요?

-언더핸드 유형의 투수를 상대해 본 경험 때문이겠죠. 스타즈 입장에서도 박유성 선수가 출루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박재흥 해설위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유성은 리드를 넓혔다.

한 발. 한 발. 또 한 발.

그러자 박경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흐름을 끊었고.

박유성은 냉큼 1루 베이스로 돌아갔다.

-지금 박유성 선수와 박경호 선수 간의 신경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베이스러너와 대한민국 최고 포수의 맞대결인데요. 이걸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까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호타준족의 대명사인 박재흥 해설위원은 어떻게 보십니까?

-박유성 선수의 주루 플레이야 국제 대회를 통해 정평이 나 있지만 박경호 선수도 강견이거든요? 아마 스타트를 끊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박경호는 프로 통산 도루 저지율이 40퍼센트가 넘는 유일한 현역 포수였다.

지난해 도루 저지율은 무려 53퍼센트.

60번의 도루 시도 중에 무려 33번을 잡아냈다.

프로 통산 30-30을 세 번이나 기록했던 박재흥 해설위원도 현역 시절에 박경호를 만났다면 가급적 뛰지 않았을 거라고 너스레를 떨 정도.

하지만 박유성은 박경호를 상대로 뛰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인준 선수가 초구를 던집니다. 아아, 박유성 선수 뜁니다! 박경호 선수가 2루를 향해 쏩니다! 2루에서 세이프! 박유성 선수가 가볍게 2루 도루를 성공시킵니다!

김태룡 캐스터가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만큼 박유성의 도루는 군더더기가 하나 없었다.

황인준이 피칭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스타트를 끊었고.

박경호가 글러브에서 공을 빼낼 때쯤 슬라이딩을 시작했다.

“진짜 저 녀석, 엄청 빠르네.”

박유성을 잡기 위해 바깥쪽 빠른 공을 주문했던 박경호는 헛웃음이 났다.

리그에서 발이 빠르다는 선수들을 전부 상대해 봤지만 박유성처럼 과감하게 내달리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3루도 노리겠지?”

박경호는 만약을 대비해 3루수 유강민에게 사인을 보냈다.

격이 다른 베이스러닝을 선보이는 박유성의 3루 도루를 막으려면 유강민이 최대한 3루 베이스 쪽에 붙어 있어줘야 했다.

박경호의 지시대로 유강민은 베이스라인 쪽으로 붙어 수비했다.

그리고 빈 공간은 유격수 김성범이 넓게 커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유성은 헬멧을 벗어 손목 보호대로 땀을 닦았다. 그러자 타석에 서 있던 오진욱이 화답하듯 제 헬멧을 툭 하고 두드렸다.

-볼 카운트 원 볼 상황에서 황인준 선수가 2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몸 쪽! 이 공을 오진욱 선수가 3루 쪽으로 굴립니다!

황인준이 투구 동작에 들어갔을 때.

포수 박경호를 포함해 랜더스 내야수 전원은 박유성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박유성은 연속 스킵 동작으로 리드를 넓혔다.

그러다 오진욱이 3루 쪽으로 기습 번트를 대자 곧바로 가속을 붙였다.

딱.

오진욱이 방향만 돌린 타구는 마운드 옆을 지나 3유간으로 굴렀다.

“젠장할!”

설마하니 이 타이밍에 기습 번트가 나올 줄은 몰랐던 황인준은 자신의 바로 옆을 지나가는 공을 지켜봐야만 했고.

3루수 유강민은 3루 베이스 쪽에 붙어 있느라 타구를 쫓아갈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 유격수 김성범은 평소보다 뒤쪽에서 수비하고 있던 상황.

“던지지 마!”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박경호가 타구를 향해 달려드는 김성범에게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김성범은 자신의 코앞으로 굴러오는 타구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잡는다!’

오진욱이 발이 빠르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김성범은 맨손 캐치에 이어 러닝 스로우로 공을 던졌고.

그 공은 1루수 페트릭 도저의 오른쪽으로 완전히 빠져 버렸다.

그사이 박유성은 3루를 돌아 곧바로 홈을 밟았다.

-홈 인! 박유성 선수가 자신의 발로 팀의 4번째 득점을 만들어냅니다!

-제가 지금 뭘 본 거죠?

-와아, 박유성 선수 진짜 야구 잘 하네요.

중계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오는 동안.

랜더스 파크를 가득 메운 팬들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뭐야 대체.”

“하아. 진짜 박유성. 야구 엿같이 하네.”

“아오 진짜…….”

“저 등신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박유성에게 초구에 2루를 빼앗긴 것까지는 다들 그러려니 했다.

LA 올림픽과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톱클래스 선수들을 전부 제치고 도루왕을 차지했으니 2루 도루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2사 이후에 나온 3루 쪽 기습 번트에 2루 주자가 홈을 밟다니.

이건 그동안 랜더스 팬들이 봐온 랜더스의 야구가 아니었다.

“미치겠네.”

박전권 감독도 헛웃음만 났다.

박유성이 잘 뛴다는 걸 알면서도 언더핸드 투수인 황인준을 내보낸 건 후속 타자를 잡아낼 자신이 있어서였다.

블레이크 테일러가 타격에 임하면 가장 좋겠지만 설사 대타 카드를 쓰더라도 황인준을 상대로 안타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하고 마운드에 올렸다.

그런데 이제 막 프로에 올라온 녀석들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미처 몰랐다.

주말 시구 때문에 개막전을 사무실에서 지켜봤던 정영진 회장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박유성이한테 지금 몇 점을 내주는 거야?”

오늘 박유성이 홈을 밟은 횟수는 4번.

그리고 스타즈가 올린 점수도 4점이었다.

이 정도면 박유성 한 명에게 농락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정영진 회장의 눈에 쓸데없이 상대 팀을 배려하는 박경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진욱 선수가 기습 번트와 함께 방망이를 내던졌는데요. 박경호 선수가 홈플레이트 앞쪽으로 떨어진 방망이를 재빨리 치웠습니다.

-저런 게 바로 동업자 정신입니다. 박유성 선수가 정신없이 달려오다가 배트를 밟을 수도 있거든요.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는 오진욱 선수의 공을 찾아서 3루 쪽 더그아웃으로 던져줬는데요.

-기습 번트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프로 첫 안타잖습니까. 오진욱 선수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을 겁니다.

“2루 도루나 잡을 것이지.”

미간을 찌푸리던 정영진 회장은 그대로 TV를 껐다.

9회 말 공격이 클린업 타선으로 연결되지만 지금의 기분으로는 도저히 경기를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스타즈와 랜더스의 개막전 경기는 4 대 0, 스타즈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박유성은 경기 MVP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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