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55화 (255/412)

타자 인생 3회차! 255화

31. 3번째 데뷔전(7)

기세등등한 얼굴로 타석에 들어섰던 박유성은 1루로 가라는 구심의 지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박전권 감독은 박유성이 1루로 움직이는 걸 확인한 뒤에 곧바로 더그아웃으로 몸을 돌렸다.

괜히 어물쩍대다가 로메오 클레멘스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미안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로메오 클레멘스는 박전권 감독의 결단이 싫지 않았다.

‘1루가 비었으니까 채우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벤치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준다며 박유성을 어렵게 상대하라는 사인이 나왔다면 오히려 더 짜증이 났겠지만.

자동 고의4구는 공을 던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투구수와 감정 소모를 아낄 수 있었다.

‘블레이크 테일러를 잡고 이닝을 끝내면…… 6회까지는 저 녀석을 피할 수 있어.’

어느새 1루 베이스를 밟고 선 박유성을 보며 로메오 클레멘스가 마음을 다잡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오늘 대결은 자신의 완패였다.

물론 핑곗거리는 많았다.

아직 완전하게 몸이 올라오지 않았고 박유성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했으며 경기 초반 임기성의 리드가 좋지 않았다.

다만 이번 타석의 결과마저 좋지 않았다면 다음번에 박유성을 다시 만났을 때 부담이 됐을 텐데 박전권 감독이 나서서 대결을 무마시켜 버렸으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블레이크 테일러 선수의 세 번째 타석입니다. 오늘 2타수 1안타. 앞선 두 번째 타석에서 스퀴즈 번트 안타를 성공시킨 바 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두 명의 주자가 루상에 나갔는데요. 2사 이후라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장타가 나오면 박유성 선수까지 홈을 밟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재흥 해설위원이 긴장감을 조성했지만 스타즈의 추가 득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메오 클레멘스가 집요하게 아웃 코스를 공략하면서 블레이크 테일러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이다.

-헛스윙 삼진 아웃!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가 제 손으로 위기를 탈출합니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은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의 전매특허인데요. 블레이크 테일러 선수가 제대로 숙지를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임상훈 해설위원은 블레이크 테일러가 안이하게 대처였다고 꼬집었지만

정작 블레이크 테일러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로메오 클레멘스에 대해 분석했다.

당연히 투 스트라이크 이후 유인구가 들어올 거라 예상했다.

다만 로메오 클레멘스를 처음 상대하다 보니 체인지업이라는 사실을 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오늘 경기 전에도 다니엘 브리토를 쫓아다니며 로메오 클레멘스에 대한 정보를 구하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봤던 박유성은 고개를 숙인 블레이크 테일러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줬다.

“괜찮아. 블레이크. 다음번에 잘 치면 되지.”

“미안해. 썬.”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낯선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치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안 그래?”

낯선 투수와 낯선 타자가 맞대결을 펼칠 경우 투수 쪽이 유리하다는 걸 모르는 야구인은 없었다.

하지만 말하는 당사자가 로메오 클레멘스를 상대로 홈런과 3루타에 고의4구까지 얻어낸 박유성이라서일까.

블레이크 테일러는 딱히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로메오 클레멘스도 제법이잖아?”

지난 시즌 랜더스가 통합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냉정하게 말해 로메오 클레멘스 덕분이었다.

총 33경기에 선발 출전해 22승 4패를 거두며 랜더스 전체 승리(85승)의 25.9퍼센트를 홀로 책임졌으니 감히 이견을 제시할 수가 없었다.

전문가들도 올 시즌 랜더스의 2연패는 로메오 클레멘스에게 달렸다고 단언할 정도.

앞선 1회차와 2회차 시절, 박유성은 로메오 클레멘스와 상대한 경험이 없었다.

1회차 시절에는 2군 생활을 하는 동안 로메오 클레멘스가 메이저리그로 돌아가 버렸고.

2회차 시절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1회차 시절보다 1년 더 한국에서 뛰었지만 리그가 달라서 맞대결을 펼치지 못했다.

그래서 박유성은 오늘 경기에서 로메오 클레멘스의 기세를 제대로 꺾어놓을 계획이었다.

어떻게든 출루에 성공한 다음에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로 혼을 빼놓아서 다시는 스타즈와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핀치에 몰린 상황에서도 블레이크 테일러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걸 보니까 에이스는 에이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게 야구지.”

터벅터벅 외야로 걸어 나가며 박유성은 아쉬움을 털어냈다.

다 이긴 경기도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뒤집히는 게 야구고.

다 내준 경기도 한 타이밍에 몰아쳐 뒤집을 수 있는 게 야구였다.

“영진이 형이 아무에게나 돈을 퍼주지도 않으니까.”

지난겨울 랜더스에서 연평균 300만 달러 규모의 4년(2+2년) 계약을 발표했을 때 대다수 야구팬들은 계약이 축소 발표됐을 거라고 단언했다.

로메오 클레멘스는 지난해 나눔 리그 MVP와 투수 부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리그 최고의 투수.

메이저리그를 비롯해 일본 프로 야구 구단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고작 300만 달러를 받고 남는 건 의리가 아니라 바보짓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0만 달러 상당의 달성 가능한 옵션이 붙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도 야구팬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난 또 영진이 형이 직접 스테이크 구워줘서 꼬신 줄 알았네.

└로메오 클레멘스 정도면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매일같이 스테이크 썰어도 됨. ㅋㅋㅋ

└그래. 500만 달러면 남을 만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그 정도 보장은 못 해줄 거 아냐?

└일본도 500만 달러 정도가 상한선일 테니까 같은 값이면 국내 잔류가 낫지.

그런 투수를 고작 한 경기 만에 밟고 올라서겠다는 건 어찌 보면 욕심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오늘 경기에서는 더 이상 로메오 클레멘스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4회까지 로메오 클레멘스의 투구수는 67구.

오늘 경기에서 최대 100구까지 던진다고 감안했을 때 길어야 6회인데 자신을 기다려 줄 것 같지 않았다.

“2+2년 계약이었으니까 최소 내년까지는 국내 리그에 남아 있겠지. 각오해 로메오. 두고두고 괴롭혀 주마.”

로메오 클레멘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박유성은 수비에 집중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중견수 쪽으로 타구가 몰렸다.

-아, 이 타구를 다시 한번 박유성 선수가 건져냅니다!

-박유성 선수 수비 범위가 상당하네요. 치는 순간 무조건 빠졌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단 거리로 뛰어서 너무나 여유롭게 타구를 처리했습니다.

-박재흥 해설위원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저는 박유성 선수한테 안 됩니다. 제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 박유성 선수가 있었다면 아마 리틀 쿠바라는 별명도 박유성 선수가 가져갔을 겁니다.

저스틴 스몰의 빠른 공에 맞춰 랜더스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구위에 밀린 타구는 박유성의 수비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6회 초.

로메오 클레멘스가 9번 타자 최일준을 땅볼로 잡아내고 이닝을 마치자 박전권 감독은 곧바로 불펜에 전화를 걸었다.

“영욱이 준비시켜.”

박전권 감독을 대신해 이승오 투수 코치가 로메오 클레멘스에게 다가가 투수 교체 사실을 전달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100구를 넘기지 않았다며 짜증을 냈을 로메오 클레멘스도 다음 타자가 박유성이라는 걸 알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 랜더스에서 투수를 바꾸려는 것 같은데요?”

“그럼 우리도 바로 불펜 투입하자고.”

“저스틴 스몰을 바꾸시게요?”

“실점은 하지 않았지만 슬슬 방망이 중심에 맞아 나가는 느낌이잖아. 날씨도 쌀쌀하니까 기분 좋게 바꿔주자고.”

빠른 공으로 윽박지르는 레퍼토리가 먹히자 저스틴 스몰과 배민철은 계속해서 공격적으로 랜더스 타자들을 요리했다.

배민철이 복잡한 머리싸움을 싫어하는 데다가 저스틴 스몰도 쌀쌀한 날씨 때문에 변화구 구사에 애를 먹고 있으니 마지못해 지켜보고 있지만.

덕분에 랜더스 타자들도 저스틴 스몰의 빠른 공에 적응해 가는 상황이었다.

‘6회 말이 8번 타자부터 시작이니까 민병규 전에 끊어야 해.’

김석률 감독의 계산대로 저스틴 스몰-배민철 배터리는 8번 타자 김재균과 9번 타자 김성범을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1번 타자 정의신을 중견수 뜬공으로 유도하고 이닝을 마쳤다.

-박유성 선수가 앞으로 달려 나와 타구를 처리합니다. 쓰리 아웃. 저스틴 스몰 선수가 5회에 이어 이번 6회도 삼자범퇴로 틀어막았습니다.

-저스틴 스몰 선수. 정말 대단하네요. 오늘 경기에서 피안타는 단 하나만 내줬습니다.

-스타즈의 역대 용병 투수들 중에 저스틴 스몰 선수만큼 환상적인 데뷔전을 치른 선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요.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사실 스타즈는 용병 투수들 때문에 성적이 안 났던 구단이거든요.

-다니엘 브리토 선수를 비롯해 용병 타자들은 어느 정도 제 몫을 다 했습니다만 용병 투수들은 기대에 못 미쳤던 게 사실이죠.

-그런데 올해는 기대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범 경기에서 다소 부진했던 저스틴 스몰 선수가 오늘 경기처럼만 던져준다면 뒤에는 제이슨 마이너 선수가 있지 않습니까?

-제이슨 마이너 선수는 내일 경기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는데요. 시범 경기에서 3경기에 출전해 단 한 점도 내주지 않는 짠물 피칭을 선보였습니다.

-제이슨 마이너 선수의 독특한 투구폼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이 선수가 멘탈이 좀 약해서 그렇지 메이저리그에서도 나름 먹혔던 투수거든요.

-미국 언론에서도 경기 외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선수라고 평가했었는데요. 스타즈 구단에서 잘 케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계석에서 시간을 끄는 사이 랜더스의 두 번째 투수 박영욱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로메오 클레멘스의 바통을 이어받은 투수는 바로 이 선수입니다.

-박영욱 선수네요. 랜더스 불펜의 중심이죠.

-2007년생으로 아직 어린 투수인데요. 지난 시즌 나눔 리그 홀드 부분 2위를 기록할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홀드 개수도 개수지만 평균자책점이 2.56밖에 되지 않습니다. 랜더스 중간 계투들 중에서 가장 낮아요.

-박전권 감독이 올 시즌에는 셋업 투수로 키워보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는데요. 오늘 경기에서는 7회에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보통 셋업 투수들은 8회에 등판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만 체력이 좋은 투수들은 7회에도 오르고 그러니까요.

-사실 선발에 셋업, 마무리로 이어지는 패턴이 구단 입장에서 가장 좋습니다. 가장 잘 던지는 세 명의 투수로 경기를 변수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으니까요.

-랜더스 팬들은 랜더스 불펜의 미래라고까지 부르고 있는데요. 하필이면 상대가 대한민국 야구의 미래라 불리는 박유성 선수입니다.

-영건 대 영건의 대결인데요. 박영욱 선수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중량감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 오늘 세 번 타석에 들어와서 100퍼센트 출루를 기록 중입니다. 첫 타석은 홈런. 두 번째 타석은 3루타를 때려냈고 세 번째 타석 때는 고의4구를 얻어냈습니다.

“후우…….”

박유성이 타석에 들어서자 박영욱이 길게 숨을 골랐다.

오늘 경기에서 만나면 야구 선배로서 제대로 혼쭐을 내줘야겠다고 마음먹었건만.

앞서 로메오 클레멘스를 두들기는 모습을 보니까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좋은 공을 주면 안 돼. 어렵게 승부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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