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51화
31. 3번째 데뷔전(3)
마치 빨랫줄처럼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타구를 보며 우익수 브라이언 코빈은 혀를 내둘렀다.
지난 시즌 랜더스에 합류해 43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기며 맹활약할 만큼 홈런에는 일가견이 있는 그였지만 이런 타구 궤적은 처음이었다.
‘발사 각도가 낮았는데도 홈런이 된 거면 스윙 스피드가 얼마나 빠른 거야?’
브라이언 코빈은 한국 타자들이 힘보다 스윙 스피드가 떨어져서 홈런을 많이 때려내지 못한다고 여겼다.
실제로 민병규는 자신에 비해 체격이 작은 편이지만 빠른 스윙 스피드로 지난해 39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날렸다.
물론 평균 비거리에는 차이가 있지만.
담장만 넘어가면 홈런인 야구에서 홈런을 때리는 게 중요하지 필요 이상의 비거리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는 민병규라고 생각해 왔는데…… 아무래도 정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좌익수 자리에서 타구를 지켜본 민병규도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저 자식은 어떻게 저렇게 치는 거야? 방금 공은 커터 같았는데. 맨날 하는 말처럼 공이 와서 맞아준 건가? 아니지. 우연도 한두 번이지 저 정도면 커터를 공략하는 노하우가 있다는 거잖아? 나중에 경기 끝나고 물어봐야겠다.”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박유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충분히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적으로 만나니까 더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로메오 클레멘스는 박유성에게 얻어맞은 홈런을 인정할 수 없다며 짜증을 냈다.
“키성. 리드가 이상했어.”
“그래. 미안해. 내 잘못이야.”
“조금 더 심플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어. 썬은 다니엘이나 팍만큼 위협적인 타자가 아니야. 우리가 너무 몸을 사리니까 썬이 타이밍을 맞춘 거라고.”
“…….”
로메오 클레멘스를 달래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왔던 임기성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투 스트라이크를 선점하고 나서 제멋대로 작전을 바꾼 게 누구인데 통역이 듣고 있다고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감독님께는 잘 걸러서 말할게.”
로메오 클레멘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통역이 대신 임기성을 위로했지만 임기성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봐 주세요.”
“기성아.”
“어차피 로메오가 고집을 부리면 답 없어요. 그냥 던지고 싶은 대로 던지게 하는 게 최선이에요.”
통역이 임기성의 말을 적당히 순화시켜 전달했고.
로메오 클레멘스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키성. 방금 홈런은 잊어버리고 최대한 공격적으로 타자들을 요리하자. 스타즈 타자들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거야. 그걸 역이용하자고.”
“리드는 어떻게 할까?”
“지금처럼 네가 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개를 가로저을 테니까.”
“그래. 알았어.”
마운드를 내려가며 임기성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불펜 포수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아직 주전으로 풀타임을 한 번도 소화하지 못한 백업 포수 주제에 300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는 에이스 투수를 고삐 잡고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로메오 말처럼 유성이가 홈런을 때렸으니까 스타즈 타자들도 들떴을 테니까 살살 약 올리면 방망이가 나올 거야.’
본래 경기 초반에 장타가 터지면 후속 타자들도 자연스럽게 장타 욕심을 내게 마련이었다.
다양한 구종으로 타자들을 요리하는 로메오 클레멘스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
일단 1회만 잘 넘기면 다음번 박유성 타석 때까지는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스타즈 타자들 중에 박유성의 홈런에 덩달아 들뜨는 타자는 없었다.
마무리 캠프와 전지훈련을 통해 박유성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는 지난해 스타즈 킬러 소리를 듣던 로메오 클레멘스였다.
나눔 리그 최고의 투수를 상대로 고작 선취점을 뽑아냈다고 호들갑을 떠는 건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다들 유성이 하는 거 봤지? 유성이가 벌써 투구수 10개 깠다. 오늘 로메오 컨디션으로 봐서는 60구 넘어가면 할 만할 것 같으니까 그때까지 공 하나하나 신경 써서 보자.”
김석률 감독을 대신해 이번 시즌에 새로 합류한 최민태 수석 코치가 선수들을 독려했다.
프로 경력은 짧았지만 김석률 감독처럼 자비로 연수를 떠날 만큼 학구열이 높은 투수 전문가였다.
게다가 사구 트라우마를 겪고 있던 김혜성의 멘탈을 잡아줄 만큼 심리 상담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제 50구 남았다!”
“한 타자당 5개씩만 까자! 그럼 중반부터 우리가 주도할 수 있어!”
선수들은 최민태 수석 코치의 말을 옮기며 오늘 경기의 목표를 되새겼다.
최대한 빨리 로메오 클레멘스를 끌어내린 뒤 랜더스의 불펜진을 가동하게 하는 것.
단순히 로메오 클레멘스 공략만으로는 선발진만큼이나 불펜도 탄탄한 랜더스를 상대로 우위를 잡기 어려웠다.
그 주문대로 2번 타자 블레이크 테일러는 공 5개를 지켜보고 땅볼로 물러났다.
초구와 2구, 연거푸 스트라이크를 먹었을 때만 해도 힘들어 보였지만.
3구째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침착하게 골라낸 뒤 4구째 몸쪽을 파고드는 빠른 공을 걷어내며 자신의 할당량을 채웠다.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박준수는 2-2에서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밀어 쳐 안타를 때려냈다.
투구수가 늘어나자 로메오 클레멘스가 성급하게 공을 던졌는데 높게 제구되면서 박준수의 방망이에 걸린 것이다.
“젠장할!”
다 잡은 고기를 놓친 로메오 클레멘스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난 시즌 박준수를 상대로 잘 통했던 레퍼토리였는데 실패하고 나니까 절로 짜증이 났다.
게다가 다음 타자는 로메오 클레멘스가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 다니엘 브리토.
지난 시즌 허용한 5개의 피홈런 중에 2개를 다니엘 브리토에게 얻어맞았으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볼카운트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가 6구를 던집니다. 바깥쪽 낮은 공! 임기성 선수가 미트를 쭉 뻗어보았습니다만 구심의 팔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도 좋은 공을 던졌습니다만 다니엘 브리토 선수가 속지 않았습니다.
-박재흥 해설위원. 지금 상황도 박유성 효과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앞서 박유성 선수가 10구 승부 끝에 홈런을 때려낸 여파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재흥 해설위원은 박유성의 선제 홈런으로 로메오 클레멘스의 투구 밸런스가 흔들렸다고 분석했다.
임상훈 해설위원은 크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경기장을 가득 채운 랜더스 팬들도 28시즌 로메오 클레멘스가 아니라 27시즌 로메오 클레멘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미치겠네. 쟤 왜 저러는 거야?”
“하아. 내가 4년 계약해 줄 때부터 알아봤다. 등 따숩고 배부른데 작년만큼 열심히 하겠어?”
“뭔 헛소리야? 로메오 메이저리그 가려던 거 국내 잔류했는데.”
“그거야말로 헛소리 중의 헛소리다. 메이저리그 갈 수 있었으면 미쳤다고 국내에 잔류했겠냐? 메이저리그 가 봐야 제대로 대우 못 받을 거 같으니까 남은 거잖아?”
“아, 좀 조용히 합시다. 야구장 전세 냈어요?”
“짜증 나니까 그렇잖아요.”
“듣고 있는 나도 짜증 나니까 불평은 속으로 해요. 아직 1 대 0이에요. 이제 1회 초라고요.”
다행히 5번 타자 장영호가 잡아당긴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향하면서 로메오 클레멘스는 추가 실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타즈 선수들은 장영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독려했다.
천적이나 다름없는 로메오 클레멘스를 상대로 장영호 역시 공을 5개나 지켜봤기 때문이다.
“유성아. 미안하다. 형이 면목이 없다.”
막내인 박유성이 글러브를 챙겨주자 장영호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체인지업으로 꼬실 줄 알고 있었는데도 체인지업을 건드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박유성이 장영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로메오 클레멘스 체인지업은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떨어지잖아요. 그러니까 타이밍이 안 맞을 것 같으면 그냥 빠른 공이라고 생각하고 힘껏 휘두르세요.”
“오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인지업을 무리하게 공략해 봐야 땅볼만 날 뿐이었다.
장영호는 스타즈 타자들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방망이를 들 만큼 중량감이 충만한 타자.
타이밍이 늦었다 싶을 때는 힘껏 방망이를 휘두르는 편이 훨씬 나았다.
공이 밋밋하게 떨어지면 얻어걸릴 테고.
헛스윙이 나도 혼자만 죽는 데다가 설사 방망이 끝에 걸려도 타구가 멀리 가지 못하니 병살 확률을 줄일 수 있었다.
2회차 시절 박유성도 힘 있는 스윙을 하려고 노력했다.
1회차 시절의 버릇대로 공을 맞히는 데 집착하니까 생각 이상으로 땅볼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장영호의 신체 스팩은 2회차 시절 증량한 박유성보다도 한 수 위였다.
“고맙다. 다음 타석 때부터는 그렇게 할게.”
“꼭 로메오 클레멘스뿐만이 아니라 늦었다 싶으면 풀파워로 휘둘러요. 그러다 보면 얻어걸리는 타구도 나올 거에요.”
장영호에게 위로의 말을 건낼까 했던 최윤석 타격 코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왜 그냥 와?”
“박 코치가 선수를 쳐서요.”
“박 코치? 유성이?”
“감독님. 유성이 쟤 따로 개인 코치 있는 게 틀림없어요. 저보다 아는 게 더 많다니까요?”
최윤석 타격 코치의 너스레에 김석률 감독은 피식 웃고 말았다.
박유성이 나이답지 않게 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 데다가 이미 두 번의 국제 대회를 통해 실력까지 증명해 냈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타격 코치 못 하겠어? 2군으로 보내줘?”
“아이고. 또 왜 얘기가 그쪽으로 갑니까?”
“못 하겠으면 말해. 2군으로 보내줄게.”
“유성이가 틀린 말 하는 것도 아닌데요 뭘. 저는 괜찮습니다. 무능하더라도 1군에 남겠습니다.”
본래 김석률 감독은 최윤석 타격 코치를 2군으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박유성을 중심으로 타자들이 뭉치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름 커리어를 가진 지도자를 타격 코치로 선임할 경우 박유성의 조언들이 월권처럼 느껴질 터.
그래서 이미 박유성을 겪어본 최윤석 타격 코치를 1군 타격 코치로 올렸다.
“유성이가 뭐랍니까?”
비슷한 이유로 1군에 남게 된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최윤석 타격 코치가 몰래 훔쳐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공 쫓아다니지 말고 힘껏 치라고. 그러다 보면 하나 얻어걸릴 거라고.”
“맞는 말이네요.”
“내가 말했잖아. 틀린 말이 아니라서 그냥 온 거라고. 영호 녀석, 주자만 나가면 몸이 굳어 가지고 유인구 쫓아다니기 바쁜데 사실 그럴 필요가 없거든. 상대 투수들이 겁먹고 도망치게 만들어야 하는데 자꾸 조바심을 내니까 유인구만 던져대잖아.”
“그런데 유성이가 말한다고 고쳐질까요?”
“그건 지켜봐야겠지만 영호도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선후배를 떠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치는 타자잖아.”
“그보다 추가 득점을 못 해서 아쉽네요. 딱 한 점만 더 뽑았어도 쉽게 가는 건데.”
배성일 배터리 코치가 화제를 바꾸듯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1사 1, 2루 상황에서 병살이 나와버렸으니 아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민태 수석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도 1회 투구수가 31구니까 나쁘지 않다고 봐. 내가 로메오 클레멘스 피칭 데이터를 분석해 봤는데 5월 이후부터나 몸이 풀려서 지금은 100구 채우기도 힘들 거야.”
“그럼 타순 한 바퀴 돌 때부터 힘이 빠지겠네요?”
“동엽이부터는 공을 오래 보지 못하겠지만 유성이가 한 번만 더 괴롭혀 준다면 다음번 찬스 때 끌어내릴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