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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250화 (250/412)

타자 인생 3회차! 250화

31. 3번째 데뷔전(2)

타석 밖으로 한발 물러나며 박유성이 피식 웃었다.

지난 골든글러브 시상식 때 공개적으로 도발하길래 초구부터 몸쪽 빠른 공을 던질 줄 알았건만.

바깥쪽을 차근차근 파고드는 게 30년 무사고 기사가 따로 없었다.

박유성의 시선이 잠시 전광판으로 향했다.

방금 전 공의 구속은 147㎞/h.

원래 구속이 빠른 투수가 아니고 슬로우 스타터인 걸 감안하더라도 기대에 못 미치는 공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몸이 올라오지 않아서 정면 승부를 피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 되지.’

다시 타석으로 돌아온 박유성은 바깥쪽으로 날아드는 공에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타구는 3루 쪽 관중석으로 넘어갔고.

볼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뀌었다.

-S존상으로는 볼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타격을 했습니다.

-이게 타자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비슷한 공을 바깥쪽으로 던지면 눈에 들어오니까 하나쯤 때려보고 싶게 마련이거든요.

-하지만 그게 함정입니다. 제구가 좋은 투수들은 스트라이크 존으로 공 하나를 넣었다 뺐다 할 수 있거든요.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의 제구력은 정평이 나 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홧김에 때린 건지 아니면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건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타격이었습니다. 보세요. 볼카운트가 투수에게 확 유리해졌잖아요? 이제부터는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가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레전드 투수 출신인 임상훈 해설위원은 철저하게 투수 입장에서 상황을 분석했다.

하지만 박재흥 해설위원은 박유성이 일부러 볼카운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우리 현역 때 많이 쓰던 낚시 방법인데 유성이가 그걸 알려나?’

야구에는 수많은 수 싸움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수 싸움의 기본이 바로 볼카운트 싸움이다.

스트라이크가 세 개면 삼진 아웃.

볼이 네 개면 볼넷.

투수는 타자에게 볼넷을 주지 않기 위해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하고.

타자는 투수에게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을 공략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볼카운트에 따라 유불리가 달라진다.

제아무리 잘난 타자라 해도 투 스트라이크를 먹고 들어가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반면 제아무리 못난 투수라 해도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다음부터는 타자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솟구친다.

로메오 클레멘스도 그랬다.

완벽하게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은 터라 박유성과 최대한 어렵게 승부하리라 마음먹었는데 홈플레이트 뒤쪽의 노란색 램프에 전부 불이 들어오고 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건드리다니. 썬도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방금 전 3구는 4구째 던질 슬라이더를 위한 포석이었다.

초구에 빠른 공을 하나 뺀 다음에 2구째 스트라이크 존으로 찔러 넣었고.

3구째 다시 빠른 공을 하나 빼고 나서 4구째 백도어성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박유성이 성급하게 볼을 건드려주면서 공 하나를 벌게 됐다.

‘공 하나를 빼야 하나? 아니지. 이렇게 된 거 몸쪽에 하나 붙이는 게 좋겠어.’

임기성은 당초 계획대로 바깥쪽으로 하나 빼자고 말했지만 로메오 클레멘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직접 몸쪽 사인을 냈다.

‘젠장. 또 시작이네.’

로메오 클레멘스가 고집을 부리면 말리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임기성은 마지못해 미트를 들어 올렸다.

몸쪽으로 빠른 공을 찔러 넣겠다고 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겠지만.

로메오 클레멘스의 주무기 중 하나인 체인지업이라면 박유성을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프로에서만 40년을 버틴 박유성이 그런 뻔한 레퍼토리에 당할 리 없었다.

후앗!

로메오 클레멘스의 손끝에서 빠져 나온 공이 몸 쪽 낮게 날아든 순간부터 박유성은 체인지업이라는 걸 눈치챘다.

평소였다면 그대로 흘려보내서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만들었겠지만.

로메오 클레멘스가 기껏 용기를 내줬는데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파울! 타구가 1루 쪽 그물을 맞고 떨어집니다.

-이 공도 볼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확실히 여유가 없는 게 느껴집니다.

-박유성 선수는 몸쪽 낮은 코스의 유인구에 잘 속지 않는다고 알려졌는데요.

-아마 볼카운트가 유리했다면 박유성 선수도 하나 지켜봤을 겁니다. 하지만 투 스트라이크니까요.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보고 대응해야 하다 보니 유인구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는 거죠.

-박재흥 해설위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히려 박유성 선수가 상황을 리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금 공은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도 작심하고 던진 거거든요. 아마 어지간한 좌타자들이라면 헛스윙을 했을 텐데 박유성 선수는 공을 끝까지 보고 잘 걷어냈습니다.

-확실히 한 분은 투수 출신이고 한 분은 타자 출신이라 의견이 갈리는 것 같은데요. 볼카운트는 원 스트라이크 투 볼로 유지된 가운데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가 5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파울! 바깥쪽 빠른 공에 박유성 선수의 방망이가 여지없이 반응합니다!

박유성이 연거푸 파울을 때려내자 삼진을 연호하던 랜더스 팬들이 조용해졌다.

구속이 빠른 건 아니지만 로메오 클레멘스는 140㎞/h 후반의 빠른 공과 투심 패스트 볼, 커터,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자유자제로 구사했다.

로메오 클레멘스의 다양한 구종에 대응해야 하는 타자 입장에서는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통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하나의 구종을 노리고 덤벼드는데 박유성은 코스와 구종을 불문하고 전부 파울을 내고 있었다.

“박유성이 저러는 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크리스 반스 상대로 했던 거잖아.”

“맞네. 그때도 볼카운트 불리했던 거 커트 신공으로 뒤집었잖아.”

“하아. 이거 갑자기 불안한데? 박유성이 일부러 투구수 늘리는 거 아냐?”

“에이, 설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처럼 투구수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뭘.”

“투구수 늘릴 목적이 아니라 해도 이대로는 위험해. 여기서 안타 맞으면 로메오 클레멘스 성격에 또 지랄할 게 뻔하다고.”

“유성아! 형이 국대 유니폼도 샀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좀 죽어줘라.”

랜더스 팬들의 웅성거림을 들은 임기성은 1루 쪽 더그아웃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6구를 던져야 하는 만큼 혹시나 벤치에서 별도의 주문이 나올까 싶었지만 박전권 감독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대로 승부를 하라는 건가?’

잠시 고심하던 임기성의 시선이 박경호에게 향했다. 그러자 박경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몸쪽 빠른 공? 그냥 맞고 끝내라는 소리예요?’

박경호는 지난 LA 올림픽 때부터 박유성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다른 선수들이 박유성의 타격과 수비에 감탄할 때 박경호는 리그에서 박유성을 만나면 어떻게 상대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직까지 뾰족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박유성을 상대로 많은 공을 던지는 건 손해라는 점이었다.

공 10개를 던져 박유성을 무조건 잡아낼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지금의 페이스는 박유성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4구째 가장 자신 있는 공으로 승부를 걸었어야 했어. 거기서 뻔한 유인구를 던지니까 승부가 길어지는 거야.’

박경호는 이대로 가다간 로메오 클레멘스가 던질 공이 없어질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차라리 몸쪽으로 승부를 걸라고 주문했다.

몸쪽 공을 던지면 얻어맞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때린다고 전부 다 안타가 되는 게 아닌 만큼 박유성의 집요함에 물어뜯기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임기성은 박경호가 아니었다.

개막전 주전 포수로 나서긴 했지만 5년 연속 나눔 리그 포수 부분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국대 포수에 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로메오 클레멘스는 그런 박경호의 리드조차 묵묵히 따르는 법이 없었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던 임기성은 바깥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승부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진 만큼 여기서 삼진을 잡아야 로메오 클레멘스도 진정을 할 것 같았다.

임기성의 사인을 확인한 로메오 클레멘스도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상의 스트라이크 존 오른쪽 모서리를 향해 빠르게 팔을 내던졌다.

후앗!

로메오 클레멘스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은 정확하게 임기성의 미트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임기성은 그 공을 잡지 못했다.

공이 미트에 들어오기 직전에.

따악!

박유성이 걷어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파울! 박유성 선수가 4연속 파울을 만들어냅니다!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는데요. 이걸 걷어내네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미 주도권은 박유성 선수가 쥐고 있습니다.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 공은 전부 걷어내고 있어요.

-임상훈 해설위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박재흥 해설위원이 다른 타자를 두고 그런 얘기를 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텐데…… 또 박유성 선수이다 보니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투구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투수는 꼭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거든요? 두 타자 승부 할 공을 던졌는데 내보내면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저럴 땐 그냥 과감하게 승부하는 게 최고입니다. 타자 입장에서도 주도권을 잡았다는 생각에 살짝 방심할 수도 있거든요.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박재흥 해설위원과 임상훈 해설위원이 한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얘기가 로메오 클레멘스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어디 언제까지 파울을 낼 수 있나 보자.”

오히려 오기가 발동한 로메오 클레멘스는 타순이 한 바퀴 돌 때까지 아껴두기로 했던 투심 패스트볼까지 꺼내 들었다.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가 9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몸쪽! 145㎞/h의 빠른 공을 박유성 선수가 다시 한번 걷어냅니다.

-이건 투심 같은데요.

-투심까지 나왔으니까 커브 빼고 던질 수 있는 공은 다 던졌네요.

-이렇게 되면 투수가 던질 공이 애매해집니다.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는 힘으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절묘한 제구력으로 스트라이크 존 주변을 공략하며 타자들을 약 올리는 스타일인데 박유성 선수에게는 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로메오 클레멘스 선수. 여기서 더 끌려가면 진짜 오늘 경기 힘들어집니다. 에이스로서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연이은 파울에 구심이 공을 보충하러 가자 로메오 클레멘스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계속해서 삼진 욕심을 냈다간 투구수만 늘어날 것 같았다.

‘좋아. 과감하게 몸쪽을 찌르자.’

마운드에 서서 한참 동안 고개를 가로젓던 로메오 클레멘스는 기어코 자신이 원하는 사인을 받아냈다.

몸쪽 높은 코스의 커터.

타자의 노림수에 걸린다면 장타로 이어질 수 있겠지만.

경험이 부족한 박유성이 그 정도로 대비를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임기성도 로메오 클레멘스를 믿고 제 미트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박유성의 옆구리 쪽으로 미트를 단단히 붙여 들었다.

“후우…….”

그 모습을 벤치에서 지켜보던 박경호가 푸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들과 몸쪽 승부를 전부 이겨냈던 박유성에게 저런 애매한 코스의 공이 통할 리 없었다.

그 예상대로 로메오 클레멘스가 공을 내던지기가 무섭게 박유성이 허리를 돌렸고.

따악!

가속이 붙은 방망이는 밋밋하게 꺾여 들어오는 공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아아, 박유성 선수가 친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 타구를…… 우익수 브라이언 코빈 선수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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