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41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하)(3)
-2루수 브룩 로우 선수가 잡아서 1루로. 9번 타자 박찬희 선수도 땅볼로 물러납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3회에 박유성 선수에게 적시타를 얻어맞은 이후로 뭔가 각성한 느낌인데요. 빠른 템포로 타자들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박유성 선수를 상대했을 때만 해도 투구수가 43구에 달했는데 지금 투구수가 75구입니다. 박유성 선수 이후 8명의 타자에게 32구밖에 던지지 않았습니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6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이 선수를 넘어야 합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계 카메라가 박유성을 잡았다.
3회 말, 마크 스테리의 투런 홈런으로 점수 차이가 한 점까지 좁혀져서일까.
박유성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하지만 마음을 비운 크리스 반스는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았다.
-초구는 몸 쪽! 153㎞/h의 빠른 공이 날아와 찍힙니다.
-박유성 선수는 바깥쪽을 생각했던 것 같은데요. 크리스 반스 선수가 허를 찔렀습니다.
-앞선 두 타석 모두 바깥쪽 공이 먼저 들어왔었는데요. 이번에는 몸쪽을 던졌습니다.
-같은 패턴으로는 박유성 선수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은데요. 박유성 선수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후우…….”
초구 스트라이크를 선점한 크리스 반스는 바깥쪽으로 하나 빼자는 조이 패런트의 주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6회까지 버티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박유성과의 승부를 빨리 끝내야 했다.
크리스 반스의 의지를 확인한 조이 패런트도 이내 몸쪽 하이 패스트 볼 사인을 냈다.
지난 타석 때 잡아줬던 터무니 없는 공만큼은 아니지만 박유성 입장에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높이로.
단단히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 반스는 조이 패런트의 미트를 향해 힘껏 팔을 내던졌고.
따악!
어깨높이로 날아든 공에 박유성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2구는 파울. 볼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로 바뀝니다.
-몸쪽 높은 공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침착하게 잘 걷어냈습니다.
-이제 저 코스의 공은 구심이 잡아주지 않고 있는데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박유성 선수로서는 구심의 판정에 대한 신뢰가 낮을 테니까요. 대응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갑자기 공격적인데?”
타석 밖으로 한발 물러난 박유성도 마음을 다잡았다.
추가 점수를 내주면 안 되는 상황인 만큼 정면 승부를 피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나오니까 살짝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명색이 톱타자인데 공 5개 정도는 던지게 해야지.’
타석으로 돌아온 박유성은 히팅 존을 넓게 설정했다.
몸쪽으로 칠 만한 공이 들어올 때까지 최대한 버텨볼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박유성과 크리스 반스의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3구는 볼. 바깥쪽으로 크게 벗어납니다.
-슬라이더였는데요. 손에서 공이 빠졌던 것 같습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도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는데요.
-볼 카운트가 불리하다고 해도 저런 뻔한 공으로 박유성 선수가 속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겠죠.
-볼 카운트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크리스 반스 선수가 4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몸 쪽! 153㎞/h의 빠른 공을 박유성 선수가 걷어냅니다!
5구째 바깥쪽을 파고든 커터를 침착하게 골라낸 박유성은 다시 한번 전광판을 바라봤다.
투구수 80개.
남은 투구수는 15개였다.
크리스 반스가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하더라도 7회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오기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박유성은 크리스 반스를 조금 더 일찍 마운드에서 끌어내리고 싶었다.
‘5개만 더 늘려보자.’
자신의 페이스대로 끌고 가려는 듯 빠른 템포로 공을 던지는 크리스 반스에 맞춰 박유성도 키킹을 최소화하고 맞히는 데 주력했다.
6구 바깥쪽 슬라이더는 방망이 끝에 걸리며 백네트 쪽으로 날아갔고.
7구 몸쪽 낮은 코스의 커터는 포심 패스트 볼 타이밍에 맞춰 나온 스윙에 걸려 1루 쪽 관중석으로 넘어갔으며.
8구 바깥쪽 하이 패스트 볼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스윙에 걸렸다.
9구째 던진 바깥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에 박유성이 걸려들지 않자 크리스 반스도 약이 올랐다.
박유성을 빨리 처리하고 6회까지 책임질 생각이었는데 벌써 투구수가 84구까지 늘어난 것이다.
투 스트라이크였던 볼 카운트도 투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뀐 상황.
이대로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다고 판단한 크리스 반스는 과감하게 몸 쪽으로 빠른 공을 찔러넣었고.
그 공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던 박유성도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총알처럼 얼굴로 날아들자 베이스라인을 지키고 있던 마크 스테리가 반사적으로 글러브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하면 공이 알아서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라 여겼다.
하지만 회전이 걸린 타구는 마크 스테리의 글러브 안을 휘돌다가 밖으로 튕겨 나갔고.
그사이 박유성은 여유롭게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났다.
-박유성 선수가 1루 강습 타구로 출루에 성공합니다!
-지금 판정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는데요. 내야 안타를 준다면 10할 타율이 유지되겠지만 만약에 실책으로 처리된다면 연속 안타 행진이 깨지게 됩니다.
-마크 스테리 선수가 수비가 좋은 선수인 만큼 내야 안타를 줘도 무방할 것 같은데요.
크리스 반스도 미안해하는 마크 스테리에게 괜찮다며 손짓했다.
제 몸 사리기 바쁜 선수였다면 방금 전 타구를 그대로 빠뜨렸을 터.
박유성을 1루에 묶어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한참 만에 나온 결과는 1루수 실책이었다.
-아, 이걸 실책을 주네요.
-마크 스테리 선수가 잡을 수 있는 타구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박유성도 전광판을 통해 타격 결과를 확인했다.
“실책이네.”
만약에 다른 선수 같았다면 내야 안타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무척이나 아쉬워했을 것이다.
다른 대회도 아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세계 최고의 야구 대회에서 안타 하나의 의미는 컸다.
하지만 무려 10할 타율을 치고 있던 박유성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언제고 10할 기록은 깨질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안타 여부가 아니었다.
3 대 0으로 앞서가던 경기가 3대 2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선발 투수 임찬기도 마운드를 내려간 상태였다.
한 점을 앞서가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안타 수는 미국 대표팀에게 밀리고 있었다.
여기서 필요한 건 도망가는 한 점.
추격의 흐름을 끊고 다시 대한민국 대표팀 쪽으로 분위기를 가져와야 했다.
“운이 나빴어. 썬.”
마크 스테리가 영어로 위로하는 걸 한 귀로 흘리며 박유성은 리드를 벌렸다.
한 발. 한 발. 그리고 반 발.
지금껏 단 한 번도 1루 주자 박유성을 상대해 본 적이 없던 크리스 반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저런 거였어?”
크리스 반스도 박유성의 베이스 러닝에 대해서는 귀가 닳도록 들었다.
리드 폭이 크고 스킵 동작과 스타트가 좋아서 좌완 투수 앞에서도 대범하게 도루를 성공시킨다는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막상 박유성의 움직임을 보니까 왜 그렇게 경계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1루 주자를 견제하는 데 있어서 좌완 투수는 우완 투수보다 확실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완 투수는 등 뒤에 있는 주자를 견제해야 하는 반면 좌완 투수는 1루 주자의 움직임을 보면서 투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주자들의 발을 묶기 유리했다.
게다가 크리스 반스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견제가 좋기로 유명했다.
“어딜!”
박유성이 리드를 벌리고 버티자 크리스 반스가 다급히 1루로 공을 내던졌다.
그 순간 박유성이 용수철처럼 튕겨서 1루 베이스로 돌아갔다.
마크 스테리가 공을 받아 태그를 시도했을 때는 이미 박유성이 쭉 뻗은 팔이 1루 베이스를 짚은 상태였다.
“어때? 짜릿하지?”
가슴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박유성을 보며 크리스 반스가 씩 웃었다.
제아무리 발이 빠른 주자라 해도 방금 전 견제를 봤으니 정신이 번쩍 들 거라 여겼다.
“제법 던지네.”
박유성도 크리스 반스의 견제에 살짝 놀랐다.
보통 다른 투수들은 견제 전에 준비 동작을 거치게 마련인데 크리스 반스는 왼발을 빼는 것과 동시에 공을 던졌다.
무게 중심을 1루 베이스 쪽에 뒀으니 망정이지 진루에 욕심냈다면 잡혔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주눅 들지 않고 다시 리드를 벌렸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크리스 반스의 견제 능력에 맞춰 리드 폭을 조금 줄이긴 했지만 2루 베이스를 훔치겠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저 녀석이?”
크리스 반스는 다시 한번 견제구를 던졌다.
그러자 박유성도 지체 없이 1루 베이스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견제! 하지만 이번에도 박유성 선수의 귀루가 더 빨랐습니다.
-저건 욕심이었죠. 아까는 박유성 선수의 리드 폭이 확실히 넓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아까보다 덜 나갔거든요. 그렇다면 투수도 피칭에 집중해야 하는데 박유성 선수에게 정신이 팔린 느낌입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지 못하게 될 텐데요.
-그래서 민병규 선수의 대처가 중요합니다.
“후우…….”
1루 베이스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동안 민병규는 길게 숨을 골랐다.
‘2사 이후라 번트는 없어. 유성이가 2루로 나가면 내가 불러들여야 해.’
첫 타석 때는 욕심을 내다 범타로 물러났지만 두 번째 타석 때는 희생 번트를 성공시키며 추가 득점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제 오늘 경기 세 번째 타석.
어쩌면 크리스 반스를 상대할 수 있는 마지막 타석일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뭐라도 하나 만들어 보고 싶었다.
‘어차피 크리스 반스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거야. 유성이가 신경 쓰일 테니까 빠른 공으로 승부를 걸겠지. 좋은 공이 들어오면 치자. 볼카운트가 몰리면 안 돼.’
생각을 정리한 민병규는 모두와 약속했던 것처럼 키킹을 생략하고 디딤발을 일찌감치 앞쪽으로 뻗어놓았다.
그러고는 크리스 반스가 몸 쪽으로 빠른 공을 붙이자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쳤습니다! 이 타구가 1, 2루간을 빠져나갑니다!
-박유성 선수는 충분히 3루까지 들어가겠는데요?
-박유성 2루를 돌아 3루로! 볼 3루로 연결됩니다. 3루에서……! 3루에서 세이프! 대한민국 대표팀이 2사 이후에 다시 한번 득점 기회를 만들어냅니다!
“젠장할!”
2사 주자 없던 상황이 2사 1, 3루로 바뀌자 크리스 반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하아. 미치겠군.”
에릭 지터 감독도 고민에 빠졌다. 선발 투수에 대한 예우로 최소 5회까지는 던지게 하고 싶었는데 돌아가는 분위기상 투수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끊어야 합니다.”
에릭 지터 감독의 속내를 읽은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가 투수 교체를 주장했다.
그러자 마이크 영 벤치 코치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아직 투구수에 여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5회까지 아웃 카운트가 하나 남았습니다. 크리스 반스에게 맡기시죠. 그게 맞습니다.”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는 기껏 따라온 점수 차이가 다시 벌어지는 걸 걱정했지만 마이크 영 벤치 코치는 앞으로도 미국 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할 크리스 반스의 자존심이 먼저였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던 에릭 지터 감독은 일단 크리스 반스를 한 번 더 믿기로 했다.
크리스 반스가 이 위기만 이겨내 준다면 그 여세를 몰아 경기를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의 3번 타자는 송현민이었다.
-볼 카운트가 꽉 찬 가운데 크리스 반스 선수가 7구를 던집니다. 바깥쪽 빠른 공! 이 공을 송현민 선수가 좌익수 앞에 떨어뜨립니다!
“크아아아!”
투구수의 압박을 느낀 크리스 반스가 성급하게 내던진 공을 결대로 밀어 때린 송현민은 마치 홈런이라도 때린 것처럼 양팔을 뻗으며 포효했다.
그렇게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4득점에 성공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미국 대표팀을 6 대 3으로 꺾고 사상 첫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