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40화 (240/412)

타자 인생 3회차! 240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하)(2)

후앗!

크리스 반스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또다시 높게 날아들자 박유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얼굴 앞쪽에서 공을 때려 1루 쪽 관중석으로 넘겨 버렸다.

2회차 시절에 이런 공을 치다가 굴절된 공에 코를 얻어맞고 고생했던 적이 있어서 어지간하면 내버려 두려 했지만.

이 코스를 노린다면 박유성도 집요하게 때려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파울! 박유성 선수가 크리스 반스 선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앞서 스트라이크를 잡아줬던 그 코스인데요. 박유성 선수가 잘 대응했습니다.

-사실 저런 코스의 공을 때려내기란 쉽지가 않을 텐데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체격이 좋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도 높게 느껴지는 코스입니다. 박유성 선수에게는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처럼 보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공을 때려냈다는 건 일종의 항의의 의미일까요?

-그보다는 구심이 또다시 저 공을 잡아줄 수도 있으니까요. 박유성 선수 입장에서는 걷어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겁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이 패런트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연달아 파울이 나긴 했지만 박유성을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유성이 바깥쪽 슬라이더와 패스트 볼을 연달아 걷어내자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전부 다 파울을 낼 생각이야?’

조이 패런트가 눈을 돌려 전광판을 바라봤다.

아직 3회 초.

아웃 카운트 하나 잡지 못한 상황인데 박유성 때문에 투구수가 45구까지 늘어나 있었다.

이제 남은 투구수는 50구.

대회 규정상 마지막 타자를 상대할 때 한계 투구수를 넘어가는 건 용인되지만 크리스 반스는 달랐다.

레드삭스 구단에서 철저하게 투구수를 관리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썬을 무조건 잡아야 해.’

마음이 급해진 조이 패런트가 다시 하이 패스트 볼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몸 쪽이 아니라 바깥쪽.

연달아 몸 쪽 낮은 코스를 공략했으니 박유성이 쉽게 대처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프로 40년 차 박유성에게 그런 뻔한 수법은 통하지 않았다.

‘여기서 투구수가 더 늘어나면 크리스 반스도 부담스러울 테니까 승부를 걸겠지. 또다시 몸 쪽 하이 패스트 볼을 던지려나? 아니야. 바깥쪽. 그래. 바깥쪽이야.’

몸 쪽 공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던 터라 박유성은 바깥쪽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크리스 반스가 내던진 공이 바깥쪽 높게 날아오자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제법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백네트 쪽으로 넘어갔고.

다저스 파크를 가득 채운 관중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젠장할. 또 파울이야.”

“지금 썬에게 몇 개를 던진 거지?”

“8개.”

“8개가 아니라 9개야. 이제 10번째 공을 던져야 한다고.”

“이럴 거면 그냥 안타를 맞는 게 나아. 10개를 던지고 타자를 잡아내 봐야 투수만 손해라고.”

“아무리 그래도 안타는 아니지. 썬이 출루하면 골치 아파진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암튼 이번에는 제발 잡아라.”

“더 이상은 안 돼, 크리스! 여기서 끝내야 해!”

많은 관중들이 두 손을 모아 기도했지만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크리스 반스가 바깥쪽으로 낮게 던진 공이 빠지면서 볼카운트만 나빠졌다.

-볼! 박유성 선수가 기어코 풀 카운트 승부까지 끌고 옵니다.

-정말 칭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선수입니다. 불리한 볼카운트에 몰렸습니다만 침착하게 공을 걷어내면서 풀 카운트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심리적으로 몰리는 건 크리스 반스 선수일 것 같은데요.

-여기서는 어떻게든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하는데 박유성 선수가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보고 전부 때려내고 있으니까요. 크리스 반스 선수 입장에서는 던질 공이 마땅치 않을 것 같습니다.

조이 패런트는 다시 한번 몸 쪽 높은 코스를 공략해 보자고 제안했다.

바깥쪽으로만 4개를 던졌으니 보여주기식이라도 몸 쪽 공을 던질 차례였다.

하지만 크리스 반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던지면 무조건 맞을 거야.’

박유성은 빠른 공 타이밍에 맞춰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상대에게 몸 쪽 빠른 공으로 카운트를 잡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잠시 고심하던 조이 패런트가 포심 패스트 볼을 유인구로 써보자고 제안했지만 크리스 반스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에 그 공을 골라내기라도 하면 최악의 상황이 될 거야.’

이번 공까지 던지면 11구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박유성을 잡아내야 했다.

본래 삼진을 노렸지만 공 11개를 던져 아웃 카운트 하나를 얻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땅볼을 유도하자. 1루 주자까지 한꺼번에 처리해야 해.’

그런 크리스 반스의 속내를 읽었던지 조이 패런트가 바깥쪽 낮은 코스의 빠른 공을 요구했고.

크리스 반스는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유성이 약을 올리듯 왼손을 들어 올렸다.

-박유성 선수가 타임을 요청합니다.

-투포수가 합의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그 분위기를 다시 깨버렸습니다.

-일부러 타임을 걸었다는 말씀이신가요?

-타자가 타석에서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무한대가 아닙니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타석에 섰을 때 바로바로 공이 날아와 줘야 하는데 사인 교환이 오래 걸리면 타자도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도대체 무슨 공을 던지려고 저러는 건가 싶을 거 같은데요.

-이럴 때는 박유성 선수처럼 구심에게 타임을 요청하고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방금 타이밍은 좀 절묘했습니다. 투포수가 어렵게 합의를 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타석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기껏 협상안을 마련했는데 상대가 들어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버린 셈일 텐데요.

-그렇습니다. 그럼 투포수 입장에서는 김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렵게 정한 사인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도 있고요.

이선철 해설위원의 예상대로 박유성이 타석에 돌아오자 조이 패런트가 사인을 바꿨다.

바깥쪽 빠른 공에서 바깥쪽 체인지업으로.

빠른 공에 계속 반응해 온 박유성에게 다시 빠른 공을 던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 반스는 그렇기 때문에 더 빠른 공을 던지고 싶었다.

‘빠른 공이 날아들면 썬은 무조건 반응할 거야. 하지만 체인지업은 안 돼. 골라낼 가능성이 높다고.’

연거푸 고개를 젓던 크리스 반스가 직접 사인을 내자 조이 패런트도 더는 욕심을 부리지 못했다.

‘좋아, 크리스. 대신에 완벽하게 던져줘야 해.’

크리스 반스가 투구 준비에 들어가자 조이 패런트도 자신의 왼쪽 무릎 앞으로 미트를 고정했다.

본래라면 피칭이 시작된 이후 미트를 움직여야 했지만 워낙에 중요한 순간이다 보니 아예 대놓고 타겟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그 동작이 박유성의 시야에 딱 걸려 버렸다.

‘바깥쪽.’

내심 몸 쪽 공을 기다렸던 박유성은 곧바로 오른 어깨를 닫았다. 그러고는 크리스 반스의 손끝에서 새하얀 공이 튀어나오기가 무섭게 빠르게 허리를 돌렸다.

‘제발!’

‘빗맞아라!’

박유성의 타격을 확인한 크리스 반스와 조이 패런트가 속으로 동시에 소리쳤다.

일단 박유성의 방망이를 끌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타구가 내야로 구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멀리서 출발한 박유성의 방망이는 점점 공 쪽으로 접근하더니 홈플레이트 바로 코앞에서 날아드는 공을 집어삼켜 버렸다.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리자 박찬희는 반사적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그러다 내야수 직선타가 나오면 더블 플레이가 되겠지만.

한껏 크리스 반스를 몰아붙인 박유성이라면 내야를 시원하게 꿰뚫어줄 것 같았다.

그 기대대로 2루로 내달리던 박찬희의 눈에 3루 베이스 옆을 빠져나가는 새하얀 공이 보였다.

뒤이어 3루 베이스 코치가 미친 듯이 팔을 휘돌렸고.

“으아아아아아아!”

박찬희가 특유의 비명을 내지르며 가속을 붙이기 시작했다.

-박찬희 선수가 2루를 돌아 3루로! 아아, 홈으로 뜁니다!

-아아, 이건 좀 위험한데요?

-좌익수 조시 스트로우 선수가 공을 잡아 홈으로 던집니다. 아! 중간에서 3루수 바비 데이브 선수가 커트! 그사이에 박찬희 선수가 홈을 밟습니다!

“크아아아!”

정신없이 내달려 홈을 밟은 박찬희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앞서 박유성의 폭풍 질주를 보면서 자신도 저렇게 홈을 밟아봤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했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박찬희의 홈 득점 뒤에는 박유성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다.

-지금 리플레이 화면이 나오는데요. 여기서 잘 보시면 썬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2루를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정확하게 바비 데이브의 눈에 들어왔죠.

-바비 데이브 입장에서는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는 홈 승부보다 썬이 3루로 가는 걸 막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썬이 크리스 반스의 등 뒤에 있다면 크리스 반스가 피칭에 집중하기 힘들어질 테니까요.

-다음 장면을 보세요. 바비 데이브가 커트를 하려고 움직이자 썬은 곧바로 걸음을 멈췄습니다. 썬이 의도적으로 바비 데이브의 커트 플레이를 유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선수입니다. 모든 플레이를 생각하면서 하고 있어요. 지금껏 수많은 선수들을 봐왔지만 이토록 야구 지능이 뛰어난 선수는 처음입니다.

크리스 반스도 자신에게서 또다시 안타를 때려낸 박유성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지난 올림픽 때는 솔직히 분한 마음이 컸다.

박유성을 너무 만만하게 여기고 승부를 걸었다가 패전 투수가 됐다고 여겼다.

하지만 다시 만나서 두 타석 연속 안타를 얻어맞고 나니까 이제야 비로소 박유성이 제대로 보였다.

‘저 녀석은…… 괴물이야.’

마크 스테리를 비롯해 메이저리그에 까다로운 타자는 많지만 박유성처럼 빈틈이 보이지 않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그런 크리스 반스에게 조이 패런트가 다가왔다.

“크리스. 미안해. 내 움직임을 썬이 봤던 것 같아.”

“미안해할 것 없어. 썬이 잘 때려낸 거야.”

“그런데 저 녀석은 운도 좋아. 어떻게 3루 베이스 옆을 정확하게 꿰뚫은 거지?”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최선의 판단을 했던 거야. 바깥쪽 낮은 공이었어. 아직 썬은 피지컬적으로 완성이 되지 않았잖아? 그 공을 잡아당기는 건 무리였을 거라고.”

“뭐야? 갑자기 저 녀석 대변인이라도 된 거야?”

뭔가 달라진 크리스 반스를 보며 조이 패런트가 멋쩍게 웃었다.

그가 아는 크리스 반스는 안하무인에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었다.

지난해 사이영 상을 받은 게릿 벌렌더조차 한 수 아래로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크리스 반스는 한 번 인정한 상대는 쿨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조이. 썬이 홈에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쉽지 않을 거야. 무사잖아.”

“그렇다면 썬은 포기하자.”

“……?”

“네 말대로 줄 점수는 주고 타자들을 믿고 버텨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은 크리스 반스는 더 이상 박유성에게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민병규가 번트 자세를 취하자 2구째 몸 쪽 빠른 공을 붙여서 번트를 대줬고.

송현민의 외야 플라이 때 박유성이 홈으로 들어오는 걸 보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5회 2사까지 9타자 범타 행진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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