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39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하)(1)
“번트?”
긴장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에릭 지터 감독도 눈이 커졌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박유성이 번트를 시도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국 벤치에서 작전이 나온 모양입니다.”
“벤치에서?”
“아직 한 점 차이고 선두 타자가 출루했으니까요. 1루 주자를 2루로 보내고 후속 타선에서 안타를 기대하려는 거 아닐까요?”
마이크 영 벤치 코치는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1회 말에 미국 대표팀이 점수를 뽑아낼 수 있었던 만큼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추가점에 열을 올리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마크 할리데이 타격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제가 감독이라면 썬에게 절대 번트를 지시하지 않을 겁니다. 아직 경기 초반이고 썬은 첫 타석에서 3루타를 쳤습니다. 그런 타자에게 번트는 말이 안 돼요.”
“우리가 쫓아올 것 같으니까 번트를 대려는 거겠지.”
“설사 그렇다 해도 썬은 아니죠. 썬은 발이 빨라서 어지간해서는 더블 플레이를 당하지 않을 겁니다. 1루 주자가 죽고 썬이 출루한다고 해도 한국은 이득이에요. 썬은 좌투수를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도루를 해내니까요.”
“그럼 썬이 저러는 이유가 뭐야?”
“제 생각에는 트릭 같습니다.”
“트릭? 페이크 번트라는 거야?”
“만에 하나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더라도 썬은 무리해서 번트를 대지 않을 겁니다.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을 노리겠죠. 하지만 썬을 상대로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집어넣으면 위험해집니다.”
“흠…….”
“제 생각에는 썬이 주자를 쌓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썬이 볼넷으로 나가면 루상의 주자가 2명으로 늘어납니다. 민의 타석 때 번트를 대면 1사 2, 3루가 되고요.”
“쏭의 앞에 2, 3루 찬스라. 결국 그건가?”
처음에는 미간을 찌푸리던 마이크 영 벤치 코치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에릭 지터 감독은 그 정도로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페이크 번트 앤드 슬래시라면 또 모르겠지만.
앞선 타석에서 3루타를 때려낸 박유성이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었다.
‘단순히 크리스의 멘탈을 흔들어보려는 생각인가? 그게 아니라면…… 정말 작전이 나온 건가?’
에릭 지터 감독의 시선이 1루 베이스에 서 있는 박찬희에게 향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박유성 다음으로 빠른 발을 가지고 있는 만큼 작전이 걸렸다면 런 앤드 히트보다 히트 앤드 런일 터.
단순히 단어 순서만 바뀐 것처럼 보여도 두 작전은 차이가 컸다.
런 앤드 히트는 주자가 일단 뛰면 그만이지만.
히트 앤드 런은 타자의 타격 여부와 타구 방향까지 전부 체크하며 움직여야 했다.
게다가 박유성에게 좋은 공을 주지 않을 게 뻔한 상황에서 주자가 기민하게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박찬희는 1루 베이스에서 한 발 반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딱히 뛸 것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루 베이스에 묶인 것도 아니었다.
‘더 헷갈리는데.’
에릭 지터 감독만큼이나 마운드에 선 크리스 반스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앞선 첫 타석 때 박유성은 선두타자로 나왔다.
그래서 크리스 반스도 온전히 박유성과의 승부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1루에 주자가 나간 상황.
아웃 카운트라도 채워놓았다면 편할 텐데 무사에 주자 1루이다 보니 수많은 변수들이 판단력을 갉아먹었다.
이럴 때는 포수가 명확하게 지시를 내려야 했지만 조이 패런트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 녀석, 정말 번트를 대려는 걸까? 아니야. 아닐 거야. 정말 번트를 댈 거였다면 기습적으로 반응했겠지.’
조이 패런트도 벤치에서 작전이 나왔을 가능성은 배제했다.
그렇다고 스트라이크 존으로 과감하게 승부하기도 쉽지 않아서 한참 만에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주문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미간을 찌푸렸을 크리스 반스도 박유성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공은 한복판을 지나 바깥쪽 멀리 떨어졌다.
-초구는 볼.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납니다.
-153㎞/h의 빠른 공인데요. 무슨 의도로 저 공을 던진 건지 모르겠네요.
-공 하나를 뺐다고 하기에는 너무 빠졌는데요. 긴장을 했던 걸까요?
-아무래도 박유성 선수가 보여주었던 번트 모션에 미국 배터리가 당황을 한 것 같은데요.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단순하게 가야 합니다.
-단순하게요?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지면 됩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의 주무기는 몸 쪽을 찌르는 빠른 공이니까요. 오히려 그 공을 던졌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하지만 앞서 몸 쪽 공을 던지다가 3루타를 얻어맞았는데요.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계속해서 바깥쪽 공만 던질 게 아니라면 결국 몸 쪽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관건은 언제 던지느냐는 것인데요. 저런 식으로 바깥쪽 공을 하나 버리고 들어가면 몸 쪽 공을 던지기가 더 부담스러워집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예상대로 크리스 반스는 2구째 몸 쪽 사인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던지면 맞을 거야.’
첫 타석 때도 볼 카운트를 잘 만들어놓고 안타를 허용했다.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던진 공인데 제대로 얻어맞았다.
주자가 없다면 몰라도 1루에 발빠른 주자가 나간 상황에서 장타를 얻어맞았다간 다시 한 점을 주게 될 터.
‘일단은 바깥쪽으로 계속 유인해 보자.’
크리스 반스는 2구째 다시 빠지는 슬라이더를 던져 박유성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3구째.
바깥쪽 낮은 코스로 꽉 찬 포심 패스트 볼을 때려 넣고 첫 번째 스트라이크 콜을 받아냈다.
“나이스 볼.”
조이 패런트가 단단히 받쳐 든 공을 보며 박유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 볼카운트라 굳이 치지 않았지만.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저 공이 들어왔다면 마지못해 방망이가 끌려 나갔을 것 같았다.
프로 40년 차인 박유성이라 해도 모든 코스의 공을 전부 다 잘 때려내는 건 아니었다.
1회차 때부터 워낙에 몸 쪽 승부가 많아서 몸 쪽 공에는 이골이 났지만 무브먼트가 심한 유인구는 여전히 까다로운 편이고.
방금 전처럼 바깥쪽 낮은 코스를 파고드는 빠른 공은 치기가 불편했다.
어떻게든 맞혀낼 수는 있지만 타구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랄까.
그런 점에서 볼카운트의 이점을 안고 간 게 큰 도움이 됐다.
반대로 크리스 반스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제 원 스트라이크.’
방금 전 공을 꽂아 넣기 위해 크리스 반스는 모든 신경을 손끝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스트라이크를 잡아 냈지만 아직도 볼카운트는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이 와중에 조이 패런트는 또다시 몸 쪽 사인을 냈다.
‘아직은 아니라니까.’
크리스 반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이번에는 조이 패런트도 물러서지 않았다.
‘몸 쪽 공을 던져야 해. 그래야 바깥쪽으로 승부를 볼 수 있다고.’
박유성은 들어도 상관없다며 떠들어댄 거지만.
조이 패런트는 박유성이 무의식 중에 크리스 반스의 공을 칭찬한 거라고 오해했다.
바깥쪽 낮은 코스의 빠른 공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았던 거라고 멋대로 넘겨짚었다.
‘일단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놓고 다시 한번 바깥쪽 낮은 코스로 승부한다면 해볼 만해.’
물론 키가 191㎝에 달하는 크리스 반스가 포수의 무릎 높이로 들어오는 공을 정확하게 던지기란 쉽지 않겠지만.
박유성이라는 까다로운 타자를 잡으려면 평범한 승부로는 어림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실랑이 끝에 크리스 반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 쪽 높은 코스로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크리스 반스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조이 패런트의 요구보다 높게 날아들자 박유성은 무리하지 않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딱히 선호하는 코스도 아닌 데다가 타격하다 공을 맞기라도 하면 자신만 손해였다.
그런데 그 공을 조이 패런트가 억지로 눌러 잡으면서 상황이 이상해졌다.
-몸 쪽 높은 공! 아, 이 공을 잡아줍니다.
-지금 S존상으로도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것처럼 나오는데요. 글쎄요. 아무래도 구심이 조이 패런트 선수의 프레이밍에 속은 것 같습니다.
그때 채팅창으로 메이저리그 중계 때도 종종 저런 공을 잡아준다는 채팅이 올라왔다.
-몇몇 분들이 메이저리그를 언급하시는데 상황이 다릅니다. 신장이 190㎝가 넘는 타자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는 구심의 성향에 따라 저 높이의 공을 잡아줄 수도 있겠지만 박유성 선수의 프로필상 키는 183㎝입니다.
-게다가 서양인들은 동양인에 비해 하체가 길어서 벨트 라인이 높으니까요.
-그렇다고 박유성 선수가 다리가 짧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스트라이크 존은 타자에 맞춰 조정이 되어야 합니다.
-보통 스트라이크 존은 타자의 무릎부터 어깨 아래로 잡고 있는데요. 느린 화면으로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방금 공은 거의 박유성 선수의 목에 닿았습니다.
-구심도 사람이라 오심을 할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저 코스를 잡아준다면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타석에서 한 발 물러난 박유성도 고개를 돌려 구심을 바라봤다.
구심이 눈을 맞추면 그저 가벼운 어필 정도만 할 생각이었는데 방귀 뀐 놈이 성내듯 구심이 먼저 언성을 높였다.
“날 보지 말고 타석에 들어서.”
“…….”
순간 한마디 할까 했던 박유성은 이내 짜증을 억눌렀다.
해마다 오심 논란이 끊이질 않으면서 전자식 스트라이크 존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심판의 판정 능력은 딱히 좋아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박유성도 숱하게 오심의 피해를 봤다.
15년을 뛰는 선수도 손에 꼽히는데 20년씩 2회차를 뛰었으니 아마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오심을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심판도 인간이고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 대부분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가끔 악의적인 판정이 나올 땐 박유성도 참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오심 앞에서 당당한 구심에게는 무대응이 최선이었다.
‘괜히 신경을 긁으면 그 핑계로 오심을 정당화할 테지.’
시즌 중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어쩌면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 무대였다.
여기서 이기면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승하게 된다.
그런 중요한 대회를 고작 저런 저급한 심판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이 녀석이야. 아마 계속해서 이 코스를 우려먹을 것 같은데…….’
지난 LA 올림픽 결승전에서도 조이 패런트는 바깥쪽 슬라이더를 적극 활용해 대한민국 타자들을 요리했다.
경기 시작부터 커터를 얻어맞아서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구심이 바깥쪽을 넉넉하게 잡아준다는 걸 알고는 일부러 더 집요하게 공략했다.
만약 여기서 물러난다면 조이 패런트는 하이 패스트 볼을 적극적으로 주문할 터.
‘그렇게는 안 되지.’
박유성은 단단히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바깥쪽 낮은 코스로 빠른 공이 들어오자 욕심부리지 않고 가볍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파울. 박유성 선수가 빠른 공을 걷어냅니다.
-3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로 공이 들어왔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놓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 반스가 작심하고 던진 공이 통하지 않자 조이 패런트는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이 패스트 볼.’
사인을 확인한 크리스 반스가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심이 왜 4구를 잡아줬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 반스도 박유성을 잡아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