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38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상)(10)
“젠장할! 왜 3루로 안 뛴 거야?”
“마크 스테리는 걸음이 느리잖아. 3루까지 못 뛴다고.”
“다저스 파크잖아! 타구가 중견수 뒤로 넘어갔는데 3루를 포기한다는 게 말이 돼?”
“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3루로 내달렸어. 마크 스테리도 그렇게 뛰었어야 했다고.”
일부 팬들이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마크 스테리를 두둔했지만.
대다수 팬들은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메이저리그 기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러모로 아쉬운 플레이였어.”
“마크 스테리의 주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야. 2루타 이상은 무리라고.”
“타구가 컸어. 펜스를 다이렉트로 맞고 튕겨 나온 것도 아니고 원바운드로 펜스를 맞아서 썬이 한참 더 들어와야 했다고. 그 정도면 3루까지 뛸 만해.”
“그러다 죽으면? 기껏 잡은 찬스를 날리게 되는 셈이잖아?”
“중요한 건 분위기라고. 마크 스테리는 2루타를 때려냈지만 그뿐이야. 이 엿같은 분위기를 바꾸지 못했다니까?”
어느 스포츠나 마찬가지겠지만 경기에서 이기려면 흐름을 가져와야 했다.
상대에게 흐름을 내주면 그 흐름을 되찾아오기 전까지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저스의 스카우트 조나단 짐머맨은 여전히 야구를 볼 줄 모르는 미셸 라슨에게 팬들이 분노한 이유를 설명했다.
“지금 몇 점 차지?”
“한 점이죠.”
“한 점은 큰 점수인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의 선발 투수는 림이잖아요? 그럼 큰 점수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 아마 너처럼 다른 팬들도 생각하고 있을 거야. 한 점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말이야.”
“그 판단이 틀렸다는 건가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 판단을 기준으로 삼아서 마크 스테리의 주루 플레이를 평가해야 한다는 거야.”
조나단 짐머맨은 다저스 스카우트들 중에 이성적인 편이었다.
빌리 게스파노처럼 자신만의 주관을 앞세우지 않고 네일 램포드처럼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지 않으며 마셸 라슨처럼 야구를 책으로 배우지도 않았다.
이성적으로 봤을 때 방금 전 마크 스테리의 2루타는 나무랄 게 없었다.
투 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에서 몸 쪽 빠른 공을 잘 잡아당겨 중견수 키를 넘기는 장타를 만들어냈고 무리하지 않고 2루에서 멈췄다.
마크 스테리의 발이 빠르지 않고 중견수 박유성의 수비가 좋다는 걸 감안했을 때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한 점 차 리드를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는 팬들이라면 마크 스테리의 주루 플레이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마크가 무리해서 3루로 뛰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높은 확률로 죽었겠죠.”
“근거는?”
“썬은 어깨가 좋은 편이잖아요?”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썬이 3루 주자를 잡아내는 어시스트를 한 적이 있었나?”
“한 번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걸 팬들이 기억할 확률은?”
“지금 경기를 보고 있는 팬들이요? 아마 없을걸요? 그런 걸 일일이 다 찾아보지는 않으니까요.”
“지금 경기를 보고 있는 팬들 대부분은 썬의 어깨가 좋다는 걸 몰라. 좋다는 얘기는 들었더라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방금 전 상황에서 마크 스테리가 충분히 3루까지 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래서 다들 이렇게 화가 난 건가요?”
“앞서 썬의 주루 플레이와 너무 대비되잖아. 썬은 원래 발이 빠른 선수야. 한 베이스를 더 가는 데 능숙하다고. 썬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본 야구 팬들이라면 아마 타구의 방향만 보고 3루타를 예상했을 거야.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야구장에 와서 자신의 두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야구 팬들은 여전히 많으니까.”
“뭔가 복잡하네요.”
미셸 라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팬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얼추 이해했지만 그 분노가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때 갑자기 경기장이 술렁였다.
임찬기가 4번 타자 코리 베츠를 상대로 던진 공이 빠진 것이다.
“마크가 3루까지 들어갔어요!”
경기장 쪽으로 눈을 돌린 미셸 라슨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하지만 조나단 짐머맨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이 달갑지 않았다.
“갑자기 불길한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기서 코리가 하나 해준다면 참 좋겠지만…… 만약에 아웃이 되면 엄청 욕을 먹게 될 거야.”
조나단 짐머맨과 미셸 라슨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경기를 지켜봤다.
다저스의 간판 타자인 코리 베츠가 적시타를 때려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코리 베츠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라는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바깥 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를 건드렸다.
그리고 그 타구가 다시 한번 센터 쪽으로 날아가면서 2사 3루의 득점 기회가 수포로 돌아갔다.
“하아. 망했어.”
조나단 짐머맨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미셸 라슨이 냉큼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조금만 더 제대로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아쉽다고? 대체 뭐가?”
“배럴이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방금 전 공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공이었어.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저 공을 친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타구가 멀리 뻗어 나간 것과는 별개로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를 억지로 잡아당긴 건 욕심이었다.
1사 상황이었다면 그나마 희생플라이로 연결됐겠지만.
2사에 폭투로 주자가 3루까지 간 상태였다면 심리적인 우위를 활용해 조금 더 좋은 공을 노려야 했다.
하지만 코리 베츠는 평소 하던 대로 나쁜 공을 건드렸고.
그 결과 동점을 만들 기회를 날려버렸다.
“만약에 케빈이 병살타를 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케빈의 타석 때 희생 번트를 댔다면 지금쯤 역전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상황만 바꾸면 그렇지 않아요? 희생 번트로 대니 존슨이 2루에 갔을 테고 마크 스테리가 2루타를 쳐서 한 점, 그리고 폭투 이후에 코리 베츠의 희생타로 한 점. 그럼 2대 1이잖아요.”
“쓸데없는 가정이야. 만약 대니 존슨이 2루에 있었다면 림이 마크 스테리를 상대로 몸쪽 승부를 걸었을까?”
“하긴. 그렇겠네요.”
“루상의 주자가 없어졌기 때문에 림도 마크 스테리를 상대로 과감하게 승부를 걸었던 거야. 발빠른 주자가 나가 있었다면 더 신경 써서 던졌겠지.”
“그럼 작전에는 문제가 없었던 거네요?”
“솔직히 말해서 고작 한 점 뒤지고 있다고 희생 번트를 댔다고 생각해 봐. 기분이 어떨 거 같아? 마크 스테리가 안타를 쳐준다면 모르겠지만 내 말대로 볼넷으로 나가고 코리 베츠가 나쁜 공을 건드려 땅볼을 쳤다면?”
“그런 최악의 상황을 굳이 가정해야 할까요?”
“케빈 모랄은 공격적인 1번 타자야. 시즌 중에도 번트를 거의 대지 않아. 반면 좌타자에게 강하고 진루타를 칠 줄 알아. 네가 감독이라면 과연 희생 번트를 주문할까?”
“하지만 최악의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건 어쩔 수가 없어. 케빈 모랄이 초구를 건드린 건 아쉽지만 3루 강습 타구였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타격을 한 거야.”
“마크 스테리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마크 스테리도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집중력 있는 타격을 보여줬어. 다만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하지 않았어. 제아무리 썬이라 해도 중앙 펜스 앞에서 3루까지 완벽한 어시스트를 하는 건 힘들다고. 만약에 마크 스테리가 그 가능성을 비집고 들어갔다면 경기 분위기는 지금과 달랐겠지.”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어요.”
미셸 라슨이 멋쩍게 웃었다.
조나단 짐머맨의 설명이 이해는 가지만 그렇게까지 따지고 들어가야 하나 싶었다.
“굳이 이해할 필요 없어. 오늘 경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이 분위기를 깨뜨리지 못한다면 아마 1회 말 공격을 두고 두고 아쉬워하게 될 테니까.”
조나단 짐머맨도 더는 떠들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로서의 경험 상 1회 공방이 승부처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미셸 라슨의 말처럼 아직 공격 기회는 많이 남아 있으니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2회 공방은 무득점으로 끝이 났다.
선두 타자로 나선 6번 타자 감백호는 5구째 들어온 바깥쪽 커터에 속아 헛스윙 삼진을 당했고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박준수는 4구째 빠른 공을 건드려 2루수 앞 땅볼로 물러났다.
8번 타자 박경호는 투구수를 늘려보겠다고 공 3개를 내리 지켜보다 스탠딩 삼진 아웃.
크리스 반스가 공 12개로 두 개의 탈삼진을 솎아내며 페이스를 끌어올리자 임찬기도 지지 않고 맞불을 놓았다.
-헛스윙 삼진 아웃! 임찬기 선수도 오늘 경기 두 개째 탈삼진을 잡아냅니다!
-바깥쪽 꽉 찬 포심 패스트 볼이었는데요. 조시 스트로우 선수가 타이밍을 잡지 못했습니다.
2사 이후 7번 타자 바비 데이브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8번 타자 조이 페런트를 유격수 땅볼로 유도하고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양 팀 선발 투수들의 투구수가 35구로 동일해졌다.
“찬기야! 지금처럼만 버티면 돼.”
“네. 감독님.”
강기태 감독은 임찬기의 피칭에 만족감을 보였다.
정타를 주지 않기 위해 유인구를 적극적으로 던지다 보니 평소보다 투구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어차피 마운드 총력전을 준비한 만큼 이 패이스대로 4회까지만 버텨 줘도 고마울 것 같았다.
반면 에릭 지터 감독은 고민이 많았다.
2회에 투구수를 아꼈다지만 3회 초에는 다시 박유성을 상대하게 된다.
크리스 반스의 천적 노릇을 하는 박유성과 승부가 길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박유성이 다시 루상에 나가서 크리스 반스를 흔들어 놓으면 5이닝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조이!”
“네. 감독님!”
“선두 타자는 무조건 잡아. 그리고 여차하면 썬은 거르고.”
“알겠습니다.”
에릭 지터 감독의 특명을 받은 조이 페런트는 초구에 몸쪽 빠른 공 사인을 냈다.
선두 타자는 9번 타자 박찬희.
수비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조차 인정할 만큼 수준급이지만 공격력이 많이 아쉬운 타자였다.
이번 대회 타율도 고작 0.200
결승전에서 뛰는 주전급 타자들 중에서 가장 낮았다.
하지만 박찬희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앞서 박경호를 상대로 공격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노리는 걸 지켜 본 박찬희는 2구째 들어온 슬라이더를 힘것 잡아당겨 3유간을 꿰뚫었다.
-1회에 이어 3회 초에도 선두 타자가 출루합니다.
-민찬희 선수도 박유성 선수만큼이나 발이 빠른 타자거든요? 게다가 타순이 한 바퀴 돌아 박유성 선수의 타석인 만큼 추가 득점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모처럼만에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타석에 서게 된 박유성은 상기된 얼굴로 3루 베이스 코치를 바라봤다.
희생 번트 사인이 나오더라도 기꺼이 웃으며 댈 생각이었는데 정작 대한민국 벤치는 별도의 작전을 걸지 않았다.
대신 지금껏 잘해왔고 앞선 1회에도 선취점을 만들어낸 박유성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는 신뢰를 보여주었다.
만약 다른 프로 신입 선수였다면 부담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고 숨을 골랐겠지만 박유성은 달랐다.
‘내 마음대로 해보라는 거지? 좋아. 그럼 크리스 반스 좀 괴롭혀 볼까?’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천천히 루틴을 펼쳤다. 그러다 크리스 반스가 투구를 준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번트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크리스 반스가 화들짝 놀라며 투구판에서 발을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