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36화 (236/412)

타자 인생 3회차! 236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상)(8)

송현민이 몸 쪽 공을 걷어내자 크리스 반스의 표정도 굳어졌다.

파울이나 헛스윙을 유도하고 던진 공이긴 했지만 송현민의 방망이가 너무나 가볍게 빠져나온 것이다.

“몸 쪽 공을 노리고 있었던 건가?”

조이 패런트는 신경 쓰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크리스 반스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서 박유성에게도 비슷한 코스의 공을 던졌다가 3루타를 얻어맞았는데 송현민마저 그 공에 대응하니까 몸 쪽 공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조이 패런트는 다시 한번 몸 쪽 사인을 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투구판에서 발을 뺍니다.

-아무래도 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박유성 선수에게 선취점을 내준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걸까요?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겁니다. 후속 타자인 민병규 선수를 범타로 처리하긴 했지만 지금 타석에 들어선 상대는 송현민 선수니까요.

-그것도 지난 시즌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을 거머쥔 선수죠.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득표로 송현민 선수가 신인상을 받았는데요. 신인상 투표에 비하면 MVP 투표와 사이영 상 투표는 치열했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지난 MVP/올해의 신인 시상식에서 송현민은 1위 표 47표와 2위 표 13표를 받아 총 274점이라는 압도적인 점수로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을 받았다.

투표 권한을 가진 60명의 기자들 중에 80퍼센트에 가까운 이들이 송현민을 지지한 것이다.

심지어 아메리칸 리그 쪽에서 활동하는 기자 30명은 전원 송현민에게 1위 표를 던졌을 만큼 지난해 송현민의 활약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반면 마크 스테리(양키즈)와 로비 마르티네즈(레드삭스)가 맞붙은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와 게릿 벌렌더(애스트로스)와 크리스 반스(레드삭스), 제임스 모이아(양키즈)가 경쟁한 사이영 상은 1위 표 몇 장에 수상자가 갈렸다.

결과적으로 받을 사람이 받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1위가 받은 1위 표 몇 장이 2위에게 갔다면 수상자의 이름이 바뀌었을 만큼 격차가 크지 않았다.

재작년 사이영 상 수상에 이어 작년 사이영 상 2위를 차지한 크리스 반스라 하더라도 2028년 최고의 신인이라 불리는 송현민을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다시 4구를 준비합니다. 이번에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났습니다.

-슬라이더인데요. 크리스 반스 선수가 어렵게 승부를 하고 있습니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공을 하나 뺐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선철 해설위원은 크리스 반스가 심리적으로 몰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유성이한테 맞은 3루타 때문이겠지.’

현장의 지도자들은 지난 투구에 연연하지 않는 투수가 좋은 투수라고 말한다.

이미 맞은 건 잊어버리고 타자에게 집중해야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투수도 인간인 이상 지난 피칭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 수가 없었다.

‘현민이가 몸 쪽 빠른 공을 잘 걷어냈어. 크리스 반스도 다시 몸 쪽으로 붙이기 부담스러울 거야.’

이선철 해설위원의 예상대로 크리스 반스의 5구는 다시 바깥쪽을 향했다.

이번 공으로 승부를 끝내려는 듯 빠른 공이 스트라이크 존 낮은 구석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따악!

송현민이 빠르게 방망이를 휘둘러 파울을 만들어냈다.

-또다시 파울. 크리스 반스 선수의 투구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공은 승부구였는데요. 송현민 선수가 침착하게 잘 때려냈습니다.

-사실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바깥쪽 낮은 코스의 빠른 공을 걷어내기가 쉽지 않은데요.

-아마 송현민 선수는 바깥쪽으로 승부가 들어올 거라고 예상한 것 같습니다.

“좋아, 좋아! 잘하고 있어!”

“현민아! 마지막까지 집중해!”

대한민국 더그아웃에서도 독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민병규가 살짝 가라앉혔던 분위기가 송현민의 투지로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그 응원에 힘입어 송현민은 풀카운트 접전까지 승부를 끌고 갔다. 그러고는.

따악!

8구째 들어온 몸 쪽 체인지업을 잡아당겨 기어코 안타를 때려냈다.

“젠장할!”

먹힌 듯한 타구가 2루수 키를 넘어가자 크리스 반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볼넷에 대한 부담감을 이겨내고 던진 공인데 이게 운 좋게 안타로 이어지니 짜증이 치솟았다.

그러자 포수 조이 패런트가 다급히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크리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말라고?”

“앞선 실책 플레이는 잊어버려. 그냥 쏭에게 적시타를 맞은 걸로 하자고. 그럼 좀 낫지 않겠어?”

조이 패런트가 웃으며 달랬지만 크리스 반스의 굳어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 중에 가장 경계해야 할 타자로 꼽힌 건 박유성.

그다음이 송현민이었다.

기정후와 감백호, 김하선도 까다로운 타자지만 1번 타자 박유성이 출루하고 3번 타자 송현민이 불러들이는 공격 루트를 차단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1회부터 그 둘에게 안타를 얻어맞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너무 그렇게 인상 쓰지 마. 아직 1회고 아직 우리에게는 9번의 공격 기회가 남아 있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후우…….”

“베스트 컨디션이 아니니까 얻어맞는 건 어쩔 수가 없어. 침착하게 아웃 카운트를 늘리자. 너를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은 팬들이 왔는데 네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팬들은 가슴 아플 거야. 그러니까 타자들이 뒤집어줄 거라고 믿고 피칭에 집중하자. 일단 한국의 기세를 꺾어야 해.”

내셔널리그 최고의 포수답게 조이 패런트는 투수들을 달래는 재주가 좋았다.

처음에 장난스럽게 굴던 조이 패런트에게 이맛살을 찌푸리던 크리스 반스도 이어지는 위로에 이내 표정을 풀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생각? 무슨 생각?”

“……?”

“이봐. 크리스. 네 공을 믿어. 네 공은 쉽게 얻어맞을 공이 아니야. 썬이 첫 타석 때 때린 타구를 생각해 보라고. 홈런은 아니었잖아? 심지어 담장을 직격하는 타구도 아니었어. 코스가 좋은 3루타였을 뿐이라고. 쏭의 타구는 어때? 방망이 끝에 걸려서 운 좋게 안타가 된 거잖아?”

“그래서? 그냥 이대로 가자고?”

“넌 크리스 반스야. 작년에는 조금 아쉬웠지만 재작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였지.”

“내셔널리그에도 내 상대는 없었어.”

“그 얘기는 경기 끝나고 맥주 한잔하면서 하도록 하자고. 암튼 자신감 있게 던져. 맞아도 괜찮아. 야수들을 믿고 조금 더 편하게 던져줬으면 좋겠어. 지금은 그렇게 이겨낼 때라고.”

크리스 반스의 어깨를 두드린 뒤 조이 패런트가 포수석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김하선을 상대로 초구부터 몸 쪽 빠른 공을 주문했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른 크리스 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1루 쪽을 바라봤는데 송현민은 도루를 할 의사가 없던지 1루 베이스에 꼭 붙어 있었다.

‘좋아. 어디 칠 수 있으면 쳐보라고.’

김하선을 힘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마음으로 크리스 반스는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하지만 김하선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평소 좋아하는 코스의 공이었지만 최대한 오래 공을 지켜보자는 모두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렇게 2구째 바깥쪽으로 파고드는 커터까지 흘려보낸 김하선은 3구째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참아낸 뒤에 4구째 다시 한번 몸 쪽으로 들어오는 공을 힘껏 잡아당겼다.

따악!

제대로 힘이 실렸던지 타격음이 날카롭게 울렸지만.

애석하게도 타구는 3루수 바비 데이브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아, 이 타구를 바비 데이브 선수가 몸으로 막아냅니다! 그대로 공을 잡아 1루로. 타자 주자 김하선 선수를 처리합니다.

-잘 맞은 타구였는데요. 바비 데이브 선수가 길목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송현민 선수가 빠르게 스타트를 끊은 덕분에 병살타를 면했는데요.

-박유성 선수라는 슈퍼 루키에 살짝 가려지긴 했습니다만 사실 송현민 선수도 데뷔 때는 5툴 플레이어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발이 빠른 선수였습니다. 무릎 부상을 한 번 당한 이후로 도루는 자제하고 있지만 베이스 러닝은 상당히 잘하는 편이죠.

-이제 2사에 주자 2루를 두고 기정후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기정후의 타석은 공 3개 만에 끝이 났다.

워낙에 선구안이 좋고 유인구에 잘 속지 않아서 조이 패런트가 공격적으로 리드했기 때문이다.

초구에 바깥쪽 꽉 찬 공을 흘려보낸 기정후는 2구째 몸 쪽 높게 날아드는 공을 파울로 걷어냈다.

그리고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바깥쪽으로 꺾여 나가는 슬라이더를 건드려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비록 두 개의 안타를 허용하긴 했습니다만 크리스 반스가 1회 초를 잘 막아냈습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피칭입니다. 이제야 조금 크리스 반스답네요.

미국 중계석은 한 시름 놓았다는 반응이었지만 에릭 지터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1회에 투구수가 23개라. 하아. 미치겠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의 한계 투구수는 95구.

이닝당 평균 16개 정도인 메이저리그 통계상 6이닝이 한계였다.

그래서 최소한 크리스 반스를 6회까지는 끌고 갈 생각이었는데 1회부터 평균 투구수를 한참 초과해 버렸으니 이대로는 보다 일찍 불펜 투수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반면 대한민국 대표팀은 일찍부터 불펜 투수들을 대기시켰다.

“찬기야. 우승이 먼저다. 투구수가 늘어나도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어렵게 승부해. 알았지?”

“네. 감독님.”

“5회 이전에 바꿔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닙니다. 우승할 수만 있다면 그전에 강판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크리스 반스라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에 의존하는 미국 대표팀과 달리 대한민국 대표팀에는 확실한 에이스 카드가 없었다.

송찬우와 임찬기가 좌우 원투 펀치로 활약 중이긴 하지만 상대가 미국인 이상 승부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기태 감독은 마운드 총력전을 준비했다.

준결승전 때 호투를 펼친 송찬우를 제외하고 모든 투수들을 대기시킨 것이다.

“지금 마운드에 누가 나가 있지?”

“일웅이하고 원우가 나가 있습니다.”

“일웅이는 몸 푸는 데 시간이 걸리지?”

“찬기하고 함께 몸을 풀었으니까 언제든지 투입은 가능합니다.”

“원우는? 오래 둬도 괜찮은 거야?”

“이번 대회에서 한 번밖에 등판을 못 해서요. 무조건 나오고 싶어 할 겁니다.”

라이온즈 김일웅은 선발 자원이었다. 다소 딱딱한 투구폼 때문에 워밍업 시간이 오래 걸려서 임찬기의 다음 투수로 선택됐다.

파이터즈의 좌완 불펜 투수 박원우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 대기 중.

바뀐 투수는 최소 3타자를 상대해야 하는 규정이 생겼지만 투구수 제한을 둘 정도로 선수 부상 관리에 신경 쓰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투수 교체의 제한이 없었다.

“한 점만 더 뽑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강기태 감독이 작전 지시를 끝내자 이병구 타격 코치가 슬쩍 다가와 말을 붙였다. 그러자 강기태 감독이 쓰게 웃었다.

“우리 바람대로 된다면 그게 야구겠어? 아무튼 이 한 점의 리드를 잘 지켜보자고.”

“그래도 크리스 반스의 투구수를 많이 늘렸으니까 후반으로 가면 해볼 만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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