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35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상)(7)
경기 전.
에릭 지터 감독은 선수들의 수비 위치를 하나하나 지정해 주었다.
“썬에게 장타를 줘서는 안 돼. 그러니까 마크와 바비는 최대한 베이스라인에 붙어 있어.”
“네. 알겠습니다.”
“루이스와 조시는 좌중간과 우중간을 커버하고.”
에릭 지터 감독의 작전은 간단했다.
1루 베이스와 3루 베이스를 타고 넘어가는 장타성 타구들은 체격 좋은 코너 내야수들에게 맡기고.
타격은 좋지만 그만큼 수비 범위가 떨어지는 우익수 루이스 넬슨과 좌익수 조시 스트로우에게는 코너 대신 좌중간과 우중간에 집중하도록 했다.
“그런데 감독님. 만약에 코너로 타구가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만에 하나 그런 경우가 생기면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플레이 해. 그런 경우는 대부분 3루타일 테니까.”
“썬을 잡으려고 무리하게 플레이하지 말라는 거죠?”
“다들 여유를 가져. 우리는 미국 대표팀이야. 썬에게 한 점을 주더라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어.”
타격에 자신이 있던 선수들은 에릭 지터 감독의 주문에 씩 웃었다.
몇 점을 내주든 뒤집으면 된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 넬슨도 박유성의 타구가 펜스 앞까지 굴러갔을 때 서두르지 않았다.
“썬의 발이라면 무조건 3루까지 들어갔겠지. 지금 던져봐야 늦었을 거야.”
그렇게 타구를 잡고 몸을 돌리는데…….
“……!”
박유성이 3루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베이스를 돌아버렸다.
“이런 미친!”
루이스 넬슨은 다급히 홈으로 공을 던졌다.
2루수 브룩 로우가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 중이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만에 하나 박유성이 이대로 홈을 밟아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만들어낸다면!
미국 야구팬들의 분노는 전부 자신을 향하게 될 것이다.
‘제발 잡혀라!’
시즌 중에 홈 보살도 몇 차례 해냈을 만큼 루이스 넬슨은 어깨가 좋았다.
좁은 수비 범위에도 불구하고 나름 수비력이 준수하다고 평가받는 것도 좋은 어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어깨가 좋은 야수라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홈 송구를 정확하게 해낼 리가 없었다.
“이런 미친! 어디다 던지는 거야?”
루이스 넬슨의 송구가 오른쪽으로 빗나가자 포수 조이 패런트가 악을 내질렀다.
홈플레이트 쪽으로 굴러와도 박유성을 잡을까 말까인데 방향이 완전히 틀어졌으니 이대로는 답이 없었다.
그때 조이 패런트의 등 뒤에서 크리스 반스의 날 선 외침이 들려왔다.
“내가 잡을게!”
조이 패런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그곳에 크리스 반스가 서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 바로 던져!”
조이 패런트는 홈플레이트 주변에 한 발을 걸친 채로 크리스 반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홈플레이트를 비우는 게 원칙이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한 점을 내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아직 박유성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
‘크리스가 바로 잡아서 던져준다면……!’
조이 패런트는 머릿속으로 최선의 시나리오를 상상했다.
크리스 반스가 송구를 잡기가 무섭게 자신의 미트 속으로 공을 꽂아 넣고.
그 상태 그대로 몸을 돌려 홈플레이트 쪽으로 무리하게 손을 뻗는 박유성을 태그한다면 이 분위기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조이 패런트의 상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루이스 넬슨이 던진 공이 원바운드가 되면서 크리스 반스가 깔끔하게 포구하지 못했고.
“조이!”
크리스 반스가 다급히 던진 공은 너무 빠르고 낮게 날아왔다.
조이 패런트가 자리를 잡은 채로 팔을 쭉 뻗어봤지만 그 공은 그대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 버렸고.
그사이 박유성은 유유히 홈을 밟았다.
“젠장할!”
너무나 허무하게 선취점을 내주자 조이 패런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크리스 반스도 마찬가지였다.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멍하니 전광판 쪽을 보다가 스코어가 1 대 0으로 바뀌자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크리스 반스도, 조이 패런트도 아니었다.
바로 말도 안 되는 짓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6만여 관중들이었다.
“저 멍청이들! 대체 뭘 한 거야?”
“지금까지 내가 봤던 야구 경기 중에 최악이야!”
박유성의 도발적인 주루 플레이에 당황한 선수들은 시야가 좁아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경기장보다 높은 관중석에서 지켜본 관중들은 박유성의 움직임을 똑똑히 봤다.
3루를 돌아 홈으로 내달릴 것처럼 굴던 박유성은 중간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크리스 반스와 조이 패런트는 박유성이 홈으로 달려들 거라는 압박에 못 이겨 자멸해 버렸다.
리플레이 화면을 돌려보던 미국 중계석도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썬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겁니다.
-경기 전에도 얘기했지만 썬은 뛰어난 베이스러너입니다. 어지간한 2루타로 3루까지 갈 수 있는 선수예요. 그렇다면 조금 더 타이트하게 수비를 했어야 합니다.
-일단 마크 스테리의 수비 위치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 같은데요.
-마크 스테리는 바로 직전까지 1루 베이스에서 붙어 수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1루 베이스를 비우고 나왔어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1루가 비었죠.
-만약에 마크 스테리가 1루 베이스를 지키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썬의 타구가 워낙에 빨랐으니까 마크 스테리가 잡아내긴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최소한 어떻게든 막아서 썬을 3루까지 가지 못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마크 스테리가 수비에 실패하면서 타구는 텅 빈 우익선상으로 굴러갔습니다. 걸음이 빠르지 않은 루이스 넬슨에게는 최악의 타구였을 텐데요.
-루이스 넬슨의 수비도 잘못됐습니다. 먼저 달려가서 타구를 잡아내지 못할 것 같으면 최단 거리로 펜스에 가서 펜스 플레이를 준비했어야죠. 저런 식으로 안이하게 수비를 하니까 썬이 망설이지 않고 3루로 내달리잖아요!
-지금 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일단 진정하고요. 루이스 넬슨의 송구는 어떻습니까?
-최악의 판단이었습니다. 2루수 브룩 로우에게 연결했다면 설사 썬이 홈으로 뛰었다 해도 승부를 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곧장 홈을 선택했죠.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지만 루이스 넬슨의 송구는 홈플레이트를 크게 벗어났습니다. 송구의 궤적도 좋지 않아서 마크 스테리가 커트를 할 수도 없었고요.
-사실 여기까지는 짜증 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메이저리그 경기에서도 종종 나오는 장면이고요.
-루이스 넬슨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여러 차례 홈 어시스트를 성공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죠.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송구가 홈으로 날아오는 걸 보고 썬이 중간에서 멈췄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마크 스테리는 물론이고 내야수들 중 누구도 썬의 움직임을 체크하지 못했어요. 전부 루이스 넬슨의 형편 없는 송구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썬은 왜 중간에 멈춘 걸까요?
-3루 베이스 코치가 멈추라는 사인을 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화면에도 나오지만 조이 패런트가 홈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어요.
-사실 저건 메이저리그 규정 위반인데요.
-썬도 이번 대회가 끝나면 한국에서 데뷔 시즌을 치러야 하니까 무리해서 홈을 파고들 이유가 없었겠죠. 하지만 보세요. 그렇다고 아예 진루를 포기한 게 아닙니다. 단순히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에 욕심을 내지 않았을 뿐이에요.
-확실히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춘 다음에도 계속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네요. 언제든 홈으로 뛰어들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썬의 판단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만약에 크리스 반스가 홈이 아닌 3루로 송구를 할 경우 홈으로 뛰면 되니까요.
-반대로 홈으로 송구를 하면 그대로 몸을 돌려 3루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죠.
-그런데 주변에서 얘기를 해주지 않으니까 크리스 반스가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조이 패런트에게 투구나 다름없는 송구를 했고 그게 옆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송구는 그 누구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3루수 바비 데이브는 혹시 모를 송구에 대비해 3루를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썬은 힘들이지 않고 실책을 유도해 홈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 대표팀이 한 점을 리드하게 됐습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홈런을 맞는 게 나았습니다. 썬 한 명에게 이렇게 농락당하는 건…… 미국의 야구가 아니에요.
미국 중계석은 이번 실책이 크리스 반스의 피칭에 영향을 끼칠 거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해서일까.
크리스 반스는 2번 타자 민병규를 2루수 땅볼로 돌려세우며 한숨을 돌렸다.
“진짜 왜 나한테만 저러냐?”
벤치로 들어온 민병규가 여느 때처럼 구시렁거렸다.
최대한 많은 공을 지켜보자는 주문에도 불구하고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를 무리해서 잡아당겼다가 범타로 물러났지만 민병규는 크리스 반스가 무시무시한 마구라도 던진 것처럼 굴었다.
만약에 박유성이 3루에 머무르고 있던 상황이라면 더그아웃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겠지만.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그러려니 하며 웃어넘겼다.
그만큼 박유성이 혼자 만들어낸 한 점의 임팩트가 컸다.
“잘했어요.”
“그냥 욕을 해.”
“왜 욕을 해요? 형도 최선을 다했는데.”
박유성도 웃으며 민병규를 달랬다.
타격은 빨랐지만 그래도 키킹을 최소화해서 빠른 공에 대비하자는 큰 틀의 약속을 지킨 민병규가 대견하기만 했다.
“그냥 빠른 공을 기다릴 걸 그랬나?”
“다음 타석 때는 몸 쪽 빠른 공을 노려봐요.”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아까 보니까 마크 스테리가 계속 베이스 라인에 붙어서 수비를 하더라고요. 1, 2루간은 브룩 로우 혼자서 커버하고 있으니까 그쪽으로 더 힘껏 때려봐요.”
“힘을 실어서 때리면 빠질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죠.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게 아닌 것처럼 수비수 있다고 안타 못 치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저렇게 공간을 넓혀주면 우린 땡큐죠.”
타자가 바뀌었지만 마크 스테리의 수비 위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박유성 타석 때는 베이스라인을 타고 나가는 장타를 주지 않기 위해 1루에 붙어 있었다면.
민병규 타석 때는 크리스 반스의 피칭 스타일에 맞춰 수비 위치를 잡았다.
어지간한 좌타자가 몸 쪽을 주로 공략하는 크리스 반스의 빠른 공을 잡아당겨 박유성처럼 때려내지는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나도 파울이고.
먹히면 수비 범위가 넓은 브룩 로우 앞으로 굴러갈 테니 마크 스테리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번트 타구에 대비하며 수비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은 지난 올림픽 때 빈공으로 욕을 먹던 그 선수들이 아니었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크리스 반스 선수가 3구를 던집니다. 파울. 몸 쪽 빠른 공에 송현민 선수가 반응합니다.
-스트라이크 존에 꽉 차게 들어오는 공이었는데요. 타이밍이 맞았습니다.
박유성의 조언대로 크리스 반스의 공이 보이기가 무섭게 타격 준비에 들어간 송현민은 어렵지 않게 히팅 포인트를 만들어냈다.
“생각보다 쉬운데? 이거 이러다 홈런 나오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