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34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상)(6)
“이걸 잡아주네.”
타석 밖으로 한 발 물러나며 박유성이 쓰게 웃었다.
초구에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에 콜이 없어서 당연히 볼일 거라 여겼는데.
조이 패런트의 프레이밍에 속은 건지 구심이 초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의 공에 손을 들어버렸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며 박유성은 스트라이크 존을 재설정했다.
구종이 포심 패스트볼에서 커터로 바뀌긴 했지만 구심의 판정이 볼에서 스트라이크로 바뀌었으니 이제 이 코스의 공은 스트라이크라고 봐야 했다.
박유성이 다시 타석으로 돌아오자 조이 패런트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구심의 판정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한 번 더 찔러보자고.’
조이 패런트의 사인을 확인한 크리스 반스가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다.
후앗!
크리스 반스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또다시 바깥쪽으로 향하자 박유성도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끌어당겼다.
내심 포심 패스트볼이 들어오길 기다렸지만.
‘커터!’
피칭 터널을 빠져나온 공은 빠르게 꺾여 나갔다.
방망이를 멈추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한 박유성은 팔을 힘껏 뻗으며 허리를 돌렸고.
따악!
방망이 끝에 걸린 타구는 그대로 백네트 쪽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파울. 볼카운트가 원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뀝니다.
-2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의 커터였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잘 걷어냈습니다.
-S존상으로는 2구보다 살짝 빠진 공인데요. 박유성 선수의 눈에는 스트라이크처럼 보였을까요?
-초구는 볼이었지만 2구는 스트라이크를 잡아줬으니까요. 박유성 선수 입장에서는 구심이 어떤 판정을 내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무래도 조이 패런트 선수의 프레이밍도 영향이 있겠죠?
-그렇습니다. 조이 패런트 선수는 내셔널리그에서 프레이밍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요. 애매한 코스로 들어오는 공은 일단 타격을 하는 게 낫습니다.
순식간에 볼카운트가 불리해졌지만 대한민국 중계석은 애써 담담하게 중계를 이어나갔다.
반면 미국 중계진은 크리스 반스가 박유성을 잡아낼 기회를 잡아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크리스 반스가 스트라이크 존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직 경기 초반이라 구심도 명확한 스트라이크 존을 설정하지 못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평소에 잘 던지던 공을 잡아주지 않으니까 연거푸 같은 코스를 공략해 구심이 설정한 존을 파괴해 버렸어요.
-만약에 저 공을 썬이 건드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제 생각에는 구심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스트라이크를 줬을 것 같습니다. 초구와 비교하자면 공 하나 정도 빠진 공이지만 2구와 비교하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공이니까요.
-구심 입장에서는 첫 판정보다 이후의 판정대로 이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겠죠?
-썬이 이번 공을 타격하지 않았다고 가정하자고요. 그 공을 구심이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럼 앞서 스트라이크를 잡은 2구가 문제가 생깁니다. 타자 입장에서는 스트라이크 하나를 도둑맞은 기분이겠죠. 하지만 반대로 이번 공을 잡아줬다면 타자는 구심이 초구를 놓쳤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썬이 공을 건드렸어요.
-썬도 아는 겁니다. 구심의 스트라이크 존이 흔들린다는 것을 말이죠. 덕분에 구심도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저 공을 썬이 왜 때렸겠습니까? 스트라이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공략한 거예요.
-결국 크리스 반스가 공 3개로 구심과 썬을 모두 당황하게 만든 셈이네요.
-비록 아직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지만 크리스 반스는 크리스 반스입니다. 우리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모습이에요!
미국의 해설진은 지난 LA 올림픽을 중계했던 해설진으로 꾸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볼카운트가 유리해진 것만으로도 해설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제부터는 크리스의 시간입니다. 썬은 바깥쪽과 몸 쪽, 전부를 대비할 수밖에 없어요.
-빠른 공만으로 1-2를 잡은 것과 여러 구종을 섞어서 1-2를 만들어낸 건 타자가 받는 압박감 자체가 다르겠죠?
-물론이죠. 지금 썬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가득 차 있을 겁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썬. 지난 올림픽에서 3안타를 때려냈잖아요? 오늘 경기에서 부진하더라도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당분간 우위를 이어갈 수는 있을 겁니다.
볼카운트가 유리해지자 조이 패런트도 과감한 사인을 냈다.
‘몸 쪽 커터라.’
지난 LA 올림픽 때 박유성에게 홈런을 얻어맞은 그 공이었지만 크리스 반스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완벽에 가까운 공을 제대로 얻어맞았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나고 정밀 분석한 결과 평소보다 공이 조금 몰려서 들어갔고 생각만큼 제대로 채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미국 언론에서 실추된 크리스 반스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애쓴 거지만.
덕분에 크리스 반스도 몸 쪽 커터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설마하니 크리스 반스가 몸 쪽으로 커터를 붙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랬으면 2구를 그런 식으로 던지지 않았겠지.’
좌타자를 상대로 크리스 반스는 주로 몸 쪽에 붙이는 커터를 선호했다.
빠른 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타자들에게 던지면 효과가 좋기 때문이었다.
빠른 공이 빠졌다고 생각하고 놔두면 그대로 안쪽 스트라이크 존을 타고 들어가 버리고.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채고 대응했을 때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헛스윙이나 파울이 나게 마련이었다.
가끔 노림수에 걸리거나 제구가 되지 않아 얻어맞을 때도 있지만 커터의 피안타율은 포심 패스트 볼의 피안타율보다 낮았다.
그런 크리스 반스가 2구째 바깥쪽으로 카운트를 잡는 커터를 던졌으니 몸 쪽 커터는 없을 줄 알았는데.
후앗!
크리스 반스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은 곧장 박유성의 몸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만약 박유성이 경험이 부족한 타자였다면 살짝 빠진 듯한 공에 멈칫했겠지만.
박유성은 프로 40년 차 타자였다.
이렇게 애매하게 걸쳐 들어오는 공은 걷어내는 게 최선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유성은 팔꿈치를 겨드랑이에 붙이고 가볍게 방망이를 휘돌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스트라이크 존으로 꺾이듯 파고든 공은.
따악!
방망이 안쪽에 걸려 1루 쪽 파울 라인 오른쪽을 스쳐 지나갔다.
“와아, 커터네?”
조금만 안쪽에 걸렸더라도 페어가 됐을 타구를 보며 박유성이 혀를 내둘렀다.
볼카운트가 불리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지난 올림픽 때 홈런을 맞은 코스로 공을 던질 줄은 예상 못 했다.
조이 패런트도 살짝 당황했다.
‘이걸 치다니. 집중력이 좋은데?’
바깥쪽에 신경 쓰느라 몸 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줄 알았건만.
어지간한 메이저리그 좌타자들이라면 꼼짝없이 당했을 공을 걷어내는 걸 보니까 다시 박유성이 커 보였다.
‘아니야. 과잉대응하지 말자. 상대는 루키야. 아직 프로 데뷔조차 하지 않았다고.’
조이 패런트가 길게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다시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몸 쪽 하이 패스트 볼.’
사인을 확인한 크리스 반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유성이 속아줄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던진 4개의 공이 전부 벨트 라인 밑으로 들어갔던 만큼 박유성의 시선을 높여줄 필요가 있었다.
-볼 카운트는 여전히 원 볼 투 스트라이크인 상황에서 크리스 반스가 5구째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몸 쪽! 153㎞/h의 빠른 공이 박유성 선수의 가슴 높이로 날아들었습니다!
-하이 패스트 볼인데요. 저런 공은 박유성 선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보통 어퍼 스윙을 하는 타자들에게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해 던지는 공인데요. 박유성 선수는 상황마다 다른 스윙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낮게 떨어지는 공에는 어퍼 스윙을 하지만 보통은 레벨 스윙을 하는 편입니다. 베럴이 대세가 된 이후로 국내에도 많은 타자들이 퍼 올리는 데 주력하고 있는데요. 송현민 선수를 비롯해 민병규 선수와 박준수 선수, 그리고 박유성 선수의 스윙을 보세요. 무리하게 퍼 올리지 않아도 홈런만 잘 치고 있습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 입장에서는 공 하나를 버린 꼴이 됐는데요.
-헛스윙을 하면 좋고 그냥 걸러내더라도 박유성 선수의 히팅 존을 흔들어보겠다는 속셈이었던 것 같은데요.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박유성 선수는 자신만의 히팅 존이 확실한 선수입니다. 방금 공을 구심이 잡아줬다면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예상대로 박유성은 어깨 높이로 들어오는 빠른 공을 쑥 훑고 말았다.
뭔가 반응해 주기에는 시작부터 공이 너무 높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구심의 반응을 살폈는데 구심도 이 정도 높이는 잡아줄 생각이 없는지 그대로 자세를 풀어버렸다.
‘이걸 잡아주면 승부 조작이지.’
타석 밖으로 한 발 물러난 박유성은 가볍게 방망이를 한 번 휘둘렀다. 그러고는 달라진 볼카운트를 확인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노란 불 두 개가 위협적으로 번쩍였는데 이제 그 위로 초록 불 두 개가 짝을 맞추고 있었다.
고작 볼이 하나 늘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투 스트라이크 원 볼과 투 스트라이크 투 볼은 엄연히 다른 볼 카운트였다.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상황에서는 타자가 심리적으로 쫓길 수밖에 없지만.
투 스트라이크 투 볼은 투수와 타자, 모두에게 해볼 만한 카운트였다.
오히려 지금처럼 투 스트라이크 원 볼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볼카운트를 쫓아온 상황에서는 타자가 유리했다.
비록 크리스 반스가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 상을 수상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투수라지만 절대적인 경험치에서는 박유성을 따라갈 선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뭘 던지시려나?’
타석으로 돌아온 박유성이 여유롭게 방망이를 들었다.
그러자 1루수로 나가 있던 마크 스테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 녀석은 대체 뭐지?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저럴 수가 있는 거야?”
메이저리그에도 크리스 반스의 공을 기가 막히게 공략하는 타자들이 몇 있었다.
소위 말하는 크리스 반스 킬러들인데 그들 중에 홈런 타자는 없었다.
전부 단타 위주로 공을 맞혀내 안타를 노리는 유형들.
그래서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은 크리스 반스를 천적이 없는 투수로 평가했다.
크리스 반스가 데뷔했을 당시만 해도 천적으로 군림했던 마크 스테리조차 지금은 크리스 반스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때려봐야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몸 쪽 꽉 찬 포심 패스트 볼에 정신이 팔리다 보면 어느 순간 볼 카운트가 불리해지고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을 쫓아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유성은 달랐다.
구심의 바깥쪽 판정에 멘탈이 흔들릴 만한데도 아슬아슬한 공을 연거푸 걷어내더니 기어코 볼 카운트의 균형을 맞춰냈다.
특히나 방금 전 들어온 하이 패스트 볼은 자신도 참기 힘들었을 만큼 좋은 공이었다.
‘한국 벤치에서 높은 공은 치지 말라는 사인을 준 건가? 아니야. 그러기에는 너무 반응이 없었어.’
크리스 반스만큼이나 머릿속이 복잡해진 마크 스테리는 라인을 단단히 지키라는 벤치의 주문을 잠시 망각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크리스 반스는 다시 몸 쪽 낮은 코스로 빠른 공을 찔러 넣었고.
따악!
그 공을 박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잡아당겼다.
“……!”
요란한 타격음과 함께 타구가 자신의 왼쪽으로 날아오자 마크 스테리는 잠시 멈칫했다.
딴생각에 빠지느라 자신이 정수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그러다 뒤늦게 수비 위치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몸을 날렸을 때는 이미 타구가 1루 베이스 위를 꿰뚫고 사라진 뒤였다.
-박유성 선수 뜁니다! 1루를 돌아 2루로! 2루에서 다시 3루로!
-이건 살았습니다.
-우익수 루이스 넬슨 선수가 이제야 타구를 처리합니다. 아아, 박유성 선수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