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33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상)(5)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캐스터 장호영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과 미국, 미국과 대한민국 간의 202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을 중계해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오늘도 제 옆에는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이선철입니다.
-지금 중계 화면으로 오늘 경기를 펼칠 다저스 파크의 전경이 나오고 있는데요.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는 아주 뜻깊은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반년쯤 됐나요? 지난 LA 올림픽 때 이곳에서 미국을 잡고 금메달을 따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마 지금 중계를 지켜보고 계시는 시청자들도 같은 생각일 것 같은데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이요?
-지난 LA 올림픽 때 대한민국 대표팀이 20년만에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 대회도 20년만에 결승에 올라온 겁니다.
-생각해 보니까 지난 2009년 대회 때 준우승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도 경기장은 다저스 파크였습니다.
-당시는 상대가 일본이었는데요. 지금과는 대회 방식이 달라서 일본과 무려 5번을 맞붙었습니다.
-그때는 두 번의 조별 리그를 치렀는데 일본과 계속 한 조가 되면서 승패를 주고받았었죠. 지금과 비교하면 다소 난잡한 시스템이었습니다.
-일본도 지난 2009년 대회 이후 우승이 없어서 이번에 20년 만의 우승을 노렸는데요. 조별 풀리그에서 대한민국에게 덜미가 잡히면서 4강전에서 미국을 만나 아쉽게 결승진출에 실패했습니다.
그때 자막으로 4강전 결과가 나왔다.
-사흘 전이죠. 목요일에 열린 4강 1차전에서 미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을 6 대 2로 꺾고 결승전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열린 4강 2차전에서는 우리 대한민국 대표팀이 우승 후보였던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을 13 대 1로 대파했습니다.
-대회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우승을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만 연전연승을 거듭하면서 지금은 미국과 거의 비등한 수준까지 올라왔습니다.
-미국 현지 도박 업체들 대다수가 미국의 약우위를 전망했는데요. 배당률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누가 이겨도 이상할 게 없다는 의미겠죠.
-지난 LA 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서 기적이라는 표현을 썼었는데요. 아마 이번 대회가 끝나고 나면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자막이 바뀌며 양 팀의 주요 선수들이 소개됐다.
-지금 현지 중계방송에서 꼽은 키 플레이어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미국 대표팀은 크리스 반스 선수와 마크 스테리 선수가 뽑혔습니다.
-마크 스테리 선수는 말이 필요없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죠.
-2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MVP를 차지했으며 이번 대회에도 4할의 타율과 8개의 홈런을 기록 중에 있습니다.
-단순히 힘만 좋은 게 아니라 선구안도 좋고 찬스를 연결해 주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완성형 타자인데요.
-거포 중에서는 그렇습니다.
-지금 뭔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 하시는 거 같은데 그건 조금 이따가 이어서 듣도록 하고요. 크리스 반스 선수를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는 선수입니다. 지난 시즌에는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 상 2위에 머물렀지만 2027년에는 사이영상을 수상했죠.
-메이저리그를 잘 보지 않으시는 국내 야구팬들에게는 박유성 선수에게 홈런을 맞았던 투수로 기억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지난 올림픽 결승전에서 패전의 멍에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선발로 나올 만큼 실력 있는 투수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아니라면 크리스 반스 선수나 마크 스테리 선수를 상대할 일 자체가 없을 겁니다.
-이에 맞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키플레이어는 두 명 다 타자입니다.
-먼저 송현민 선수부터 얘기해 볼까요? 야구팬분들이라면 모르시는 분이 없는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 중 한 명입니다. 2027년에 타격 3관왕과 MVP를 차지하고 메이저리그로 건너가 지난해 레인저에스에서 0.303의 타율과 19홈런, 87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말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간판 타자였는데요. 요즘에는 살짝 이 선수에게 밀린 느낌입니다.
-박유성 선수는 장호영 캐스터가 소개하시죠.
-또 왜 그러십니까아.
-제가 말하면 오히려 박유성 선수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이 말을 꺼내기 전부터 채팅창에는 이선철 해설위원을 겨냥하는 채팅들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LA 올림픽 때부터 이어져 온 박유성의 활약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거의 모든 선수들에게 냉정한 이선철 해설위원이 박유성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 제가 대한민국 대표팀의 새로운 에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박유성 선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LA 올림픽 때 혜성처럼 등장해 대한민국 대표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올림픽 야구 MVP를 받았고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타율과 최다안타, 도루, 득점, 장타율, 출루율 부분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을 대신에 입을 뗀 장호영 캐스터는 평가보다 정보 전달에 집중했다.
야구인 출신이 아니다 보니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단 하나.
박유성이 이번 대회에서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오늘 경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 수는 없겠지만 지금 분위기상으로는 박유성 선수가 대회 MVP를 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미국 대표팀 선수들 중에 MVP 후보가 마크 스테리 선수뿐인데요. 타율과 홈런, 타점 모든 부분에서 송현민 선수에 밀리고 있습니다. 두 선수 다 전 경기를 출전했기 때문에 마크 스테리 선수가 오늘 경기에서 홈런을 몰아 때리지 않는 한 순위가 뒤바뀔 가능성이 낮은데요. 그런 두 선수보다 박유성 선수가 한참 앞서서 달리고 있습니다.
-일단 타율부터가 10할이니까요.
-지금까지 총 17번 타석에 들어와서 16개의 안타와 1개의 볼넷을 기록 중입니다. 타율 10할에 출루율도 10할. 그리고 장타율은 무려 2.938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OPS가 1.0만 넘겨도 초특급 선수로 평가받는데 박유성 선수는 장타율이 2.9입니다.
-물론 타석 수가 적기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 부여는 어렵겠지만 지금 박유성 선수와 비견될 만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선수는 한 명도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2위 그룹이 송현민 선수와 마크 스테리 선수인데요. 오늘 두 선수가 4타석 연속 홈런을 때려내고 박유성 선수가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한다 하더라도 순위가 뒤집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때 다시 자막이 바뀌면서 양 팀의 스타팅 라인업이 공개됐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미국 대표팀의 선발 투수는 크리스 반스 선수입니다. 베네수엘라와의 8강전 때 선발로 나서고 일주일 만의 등판입니다.
-지난 8강전 때는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어하는 느낌이었는데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나온 만큼 오늘 경기에서는 어떤 피칭을 보여줄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앞선 4강전과 같은 라인업을 들고 나왔습니다.
-톱타자로 출전하는 박유성 선수를 비롯해 송현민 선수와 김하선 선수, 기정후 선수, 감백호 선수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어떻게든 점수를 뽑아줘야 합니다.
-박유성 선수와 중심 타자들을 연결해 주는 민병규 선수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박유성 선수가 집중 견제를 당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민병규 선수가 테이블 세터로서 박유성 선수를 잘 도와줘야 할 것 같습니다.
중계 카메라가 다시 마운드를 비췄다.
묵묵히 연습구를 던지는 크리스 반스의 표정은 평소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 크리스 반스를 보며 에릭 지터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가 준비를 잘해 온 모양이야.”
“크리스는 대표팀의 에이스이기 이전에 레드삭스의 에이스니까요. 에이스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을 겁니다.”
본래 에이스란 팀의 연승을 잇고 연패를 끊어줘야 했다.
또한 어떤 팀과 맞붙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아야 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공을 던져서 팀의 사기를 끌어올려 줘야 했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 반스는 에이스라는 칭호에 가장 잘 어울리는 투수였다.
비록 100퍼센트 컨디션은 아니지만 크리스 반스가 마음을 다잡고 경기에 임하는 것만으로도 에릭 지터 감독은 마음이 든든했다.
“썬은 어때?”
“썬의 컨디션도 나빠보이진 않습니다.”
에릭 지터 감독의 시선이 3루 쪽 대기 타석에서 몸을 푸는 박유성에게 향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은 올림픽 결승전과 또 다를 텐데도 박유성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타고난 건가?”
결승전 같은 큰 경기에 긴장하지 않는다는 건 크게 셋 중 하나였다.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어서 익숙해졌거나 원래 긴장을 안 하는 체질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경기의 중요성을 모르거나.
아직 프로에 데뷔조차 하지 못한 박유성의 경력을 고려했을 때 이런 큰 무대에 익숙해졌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경기의 중요성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취급하기에는 잘해도 너무 잘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나이답지 않게 배짱이 두둑하다는 것.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잘하겠지.”
에릭 지터 감독이 쓰게 웃었다. 하지만 언론의 우려만큼 박유성이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크 스테리처럼 수많은 경기를 치른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선수들도 결승전 앞에서 긴장을 하는데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는 건 그만큼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크리스 반스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나왔을 때도 과연 지금의 여유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 십중팔구 당황하다가 자신의 페이스를 놓치게 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에릭 지터 감독이 보는 것처럼 박유성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 결코 아니었다.
“후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이라 그런가 떨리네.”
1회차와 2회차 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참가하긴 했지만 결승전까지 올라온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주력 선수로 활약하며 이뤄낸 결과이다 보니 뭔가 기분이 남달랐다.
다만 박유성은 그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억지로 감추려 하지 않아도 프로 40년 차의 경험이 박유성의 긴장을 잘 가려주었다.
-이제 1회 초 대한민국 대표팀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1번 타자 박유성 선수. 이번 대회에서 10할의 타율을 기록 중에 있습니다.
-앞서 LA 올림픽 때 크리스 반스 선수를 상대로 3안타 경기를 치렀는데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타격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중계석뿐만 아니라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대한민국 야구팬들은 박유성이 어떻게든 출루해 주길 바랐다.
박유성의 출루에 이은 선취점이야말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가장 확실한 승리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 반스는 박유성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초구는 바깥쪽 볼. 153㎞/h의 빠른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났습니다.
-일단 박유성 선수의 반응을 살피려는 것 같은데요. 박유성 선수가 속지 않고 잘 참아냈습니다.
초구를 하나 뺀 크리스 반스는 2구 째 비슷한 코스로 커터를 찔러 넣었다.
‘빠듯한데?’
코스를 읽은 박유성은 이번에도 빠질 거라 여겼지만.
포수 조이 페런트가 손목을 비틀며 공을 받아내면서 구심의 콜을 이끌어냈다.
-아, 구심이 이 공을 잡아 줍니다.
-지금 S존 상으로는 초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였는데요. 구심이 이번에는 반응을 했습니다.
-지금 커터를 던진 것 같은데요.
-크리스 반스의 주무기죠. 지난 LA 올림픽 때는 박유성 선수에게 커터를 얻어맞고 나서 커터를 거의 던지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시작부터 자신의 스타일대로 피칭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