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31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상)(3)
지난 LA 올림픽에서 크리스 반스가 박유성에게 홈런을 얻어맞았을 때.
메이저리그 주요 언론들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며 크리스 반스를 두둔했다.
“투수도 인간입니다. 항상 잘 던질 수는 없어요.”
“크리스 반스를 비롯해 많은 선수들이 조국을 위해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어요.”
“크리스 반스가 10점을 내줬습니까, 20점을 내줬습니까. 6회까지 마운드에 올라서 단 2점만 내줬습니다. 그 정도면 제 몫은 다 한 겁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크리스 반스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약 타자들이 점수를 뽑아줬다면 경기 결과는 달라졌겠죠.”
일부 타자들이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받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대다수 야구 팬들은 언론의 주장에 동조했다.
└본래 토너먼트에서는 미친 선수가 한 명씩 나오게 마련이야. 그래야 우승할 수 있어. 한국에서는 그게 썬이었을 뿐이야. @Justin TQ
└썬이 잘했던 건 인정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올림픽 때만큼 잘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봐. @barbie_C77
└흔히들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하지. 썬은 순수하게 올림픽을 즐겼어. 하지만 크리스 반스는 미국을 우승시켜야 하는 부담감이 컸던 것 같아. @frogman72
└솔직히 썬에 대한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했을 거야. 썬은 아마추어 선수라고. @playball435
└난 크리스 반스가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크리스 반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투수야. 내년에 있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에이스로 활약해 줘야 한다고. @MomsOopsBaby
결승전의 아쉬운 피칭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다수 야구 팬들은 여전히 크리스 반스를 미국 대표팀의 에이스로 꼽으며 굳건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작 크리스 반스는 아직도 지난 올림픽 결승전에 머물러 있었다.
“크리스. 난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어. 그러니까 팀을 위해 던져줘.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만약 다른 감독이 이런 소리를 했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겠지만.
“네. 감독님.”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레전드의 한마디에 크리스 반스도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 반스가 고민 가득한 얼굴로 감독실을 나오자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가 다가왔다.
“크리스. 감독님이 뭐래?”
“팀을 위해 던지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네. 어느 정도는요.”
“썬과의 승부에 집착하지 마. 썬은 내일 상대해야 할 수많은 타자들 중에 한 명일 뿐이니까.”
“…….”
“아예 썬을 마크 스테리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마크 스테리요?”
마크 스테리는 2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한 미국 대표팀의 3번 타자였다.
그리고 크리스 반스가 속한 레드삭스의 숙적, 양키즈의 간판타자이기도 했다.
“마크 스테리를 상대할 때 가장 신경 쓰는 게 뭐야?”
“마크 스테리 앞에 주자를 모아두지 않는 겁니다.”
“또?”
“마크 스테리에게 장타를 맞지 않는 거죠.”
“만약에 마크 스테리에게 안타를 내줬어. 그럼 어떻게 해?”
“잊어버리고 다음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합니다.”
“만약에 홈런을 맞으면?”
“……잊어버리고 다음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합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크리스. 기본을 잊지 말라고. 네가 상대해야 할 타자는 썬뿐만이 아니야. 무슨 얘기인지 알겠지?”
“네. 코치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크리스 반스는 책상 위에 쌓아놨던 박유성에 대한 전략 분석 자료를 치웠다.
그리고 제대로 보지 않았던 대한민국 타자들에 대한 자료들을 살폈다.
아직 구속도, 구위도 100퍼센트 올라온 게 아니라 박유성의 전략 분석 자료에 집착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 에릭과 제이슨의 말이 맞아. 팀을 위해 던지자. 그게 에이스야.”
그 시각.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도 박유성의 방에 몰려와 있었다.
“아, 진짜 좁아 죽겠네. 왜 다들 여기로 온 거야?”
박유성의 고정 룸메이트인 송현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에 한두 명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기정후와 감백호에 이어 김하선에 최일준, 유장한까지 들어오니까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선수들이 모인 건 박유성 때문이지 송현민 때문이 아니었다.
“현민아. 답답하지?”
“네. 미치겠어요.”
“그럼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에?”
“나가 인마. 너한테 볼일 없으니까.”
김하선의 한마디에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현 대한민국 대표팀의 간판타자인 송현민에게 저렇게 면박을 줄 수 있는 건 최고참인 김하선뿐이었다.
“여기 제 방인데요?”
“그럼 나하고 바꿔. 내 방 가서 쉬어라.”
“싫은데요?”
“싫으면 시집가 인마.”
“…….”
“크흠. 암튼 유성아. 우리가 왜 모였는지 알지?”
김하선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자 박유성이 멋쩍게 웃었다.
오전에 있었던 전체 미팅에서 강기태 감독은 박유성에게 크리스 반스의 공을 때린 소감에 대해 물었고.
박유성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상황을 피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배들이 전부 지켜보는 앞에서 영웅담처럼 떠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LA 올림픽 때 크리스 반스에게 농락당하다시피 했던 선수들은 막내의 그 영웅담조차 간절했다.
“유성아.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말해.”
“그래. 크리스 반스를 처음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두 번째 상대하는 건데 또 삼진만 먹을 수는 없잖아.”
“형은 큰 거 안 바란다. 그냥 안타 하나면 돼.”
“야. 그게 큰 거지.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안타를 친다고?”
“그럼 너는 여기 왜 왔냐?”
“난 그냥 플라이면 만족해. 관광 다녀왔다는 비아냥거림 그만 듣고 싶다.”
“그럼 정후 형이나 백호 형이 말해주면 안 돼요?”
박유성이 기정후와 감백호를 바라봤다.
메이저리그 경력은 김하선이 가장 길지만 주로 내셔널리그에서 뛰었던 터라 크리스 반스를 거의 상대해 보지 못했다.
반면 기정후와 감백호는 같은 아메리칸 리그.
심지어 기정후가 속한 오리올스는 레드삭스와 같은 지구였다.
단순히 경험치만 놓고 보자면 기정후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지만 기정후는 씁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크리스 반스 공은 잘 못쳐.”
“형이 못 치는 공이 어디 있어요?”
“형을 높이 평가해 주는 건 고마운데 크리스 반스의 공은 뭔가 어려워. 다른 좌완 투수들보다 딜리버리 타임이 짧은데 그것보다 더 빨리 공이 날아드는 느낌이라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더라.”
“정후 형 말이 딱 맞아. 나도 몇 번 상대해 봤는데 이 악물고 휘둘러도 스윙에 안 걸리더라. 그래서 전광판을 보면 97mile/h(≒156.1㎞/h)이야. 느낌은 한 170㎞/h 정도인데.”
기정후와 감백호의 고백에 다른 선수들도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데뷔 초 때처럼 101mile/h(≒162.5㎞/h)의 빠른 공을 던지지는 게 아닌데도 크리스 반스의 포심 패스트 볼은 해마다 피안타율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저 빠르기만 했던 공에서 빠른데 치기 어려운 공으로 진화한 것이다.
기정후와 감백호처럼 메이저리그에서 오래 뛴 베테랑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크리스 반스의 체감 구속은 상상 이상이었다.
“크리스 반스는 해마다 스트라이드 폭을 늘린다는 데 사실이에요?”
“본인이 의식하고 늘리는 건 아닌 거 같고 더 위력적인 공을 던지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평균 스트라이드 폭이 늘어난다고 하더라.”
“와, 그럼 진짜 괴물인데?”
“크리스 반스 데뷔 때보다 몸도 엄청 좋아졌잖아요?”
“가까이서 보면 가슴 두께가 상당해. 원래부터 체격은 좋았던 거 같고.”
“그럼 올림픽 때보다 더 치기 어렵겠네요.”
“그나마 3월이니까 다행이긴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그렇죠.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베스트 컨디션인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박찬희의 말에 순간 모든 선수들이 한곳을 바라봤고.
또다시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 박유성은 멋쩍게 웃고 말았다.
“저야 고교 야구 일정이 일찍 끝났잖아요. 9월 이후로 푹 쉬었으니까 형들하고는 다르죠.”
“그게 더 대단한 거 아냐? 경기도 없는데 이만큼 치는 건 초천재 수준이잖아?”
“초천재는 뭐냐?”
“천재를 초월한 천재죠. 솔직히 유성이 쟤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안 어울리잖아요.”
“그렇긴 해. 정후 형도 그렇고 백호 형, 현민이 형도 한창때 천재 소리 들었는데 유성이는 뭐랄까……. 좀 느낌이 다르지?”
“우리 눈치 볼 거 없어. 유성이가 우리보다 잘해. 대회 성적이 증명해 주고 있잖아?”
“제가 선배이긴 하지만 저는 진짜 유성이 존경해요. 저 나이에 저렇게 야구 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요. 거의 생태계 파괴 수준?”
“진짜 유성이가 우리 팀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박준수의 한마디에 이곳저곳에서 눈총이 날아들었다.
박준수와 최일준을 제외하고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끝나고 박유성이라는 괴물을 리그에서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넌 진짜 눈치가 없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휴. 눈치 없는 놈. 그러니까 연애를 못 하지?”
“안 하는 거라니까?”
“그래. 나도 홈런왕 안 하는 거야.”
이때다 싶어 민병규가 박준수를 구박했다.
그러자 김하선이 다시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지방방송은 거기까지 하고. 암튼 유성아. 그냥 편하게 어떤 느낌이었고 어떻게 공략했는지 정도만 말해주면 안 될까?”
다른 사람도 아닌 대표팀의 최고참이자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김하선이 정중히 요청하는데 박유성도 더는 뻗댈 수가 없었다.
“그럼 그냥 참고만 하세요.”
“그야 당연하지. 솔직히 여기서 너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현민이도 못 해.”
“왜 또 저를 걸고넘어져요.”
“너도 안 되잖아. 인마.”
“저 그래도 크리스 반스 상대로 안타 쳤거든요?”
“그래? 그럼 너는 빠져 있어.”
“…….”
“왜 안 나가? 자신 있다며?”
“안타 쳤다고 했지 자신 있다고는 안 했는데요.”
“여기 있을 거면 조용히 있어. 쓸데없이 자존심 세울 사람들은 지금 나가고.”
김하선이 경고하듯 선수들을 둘러봤다.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은 15명.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온 건 아닐 거라 여겼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다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사상 첫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유성아. 이제 시작하자.”
“후우……. 네. 일단은 크리스 반스의 공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부터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
“정후 형하고 백호 형은 많이 상대해 봐서 알겠지만…….”
“유성아. 괜찮으니까 우리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말해.”
“그래 인마. 우리 배우러 온 거야. 여기서 크리스 반스 상대로 한 경기에 3안타 친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럼 사족 빼고 말할게요. 제가 보기에 크리스 반스는 다른 좌완 투수들보다 공이 늦게 빠져나와요. 어깨 회전이 늦죠.”
“어깨 회전이 늦다는 말이 무슨 소리예요?”
“너 송구할 때 생각해 봐. 앞으로 던지다 보면 어깨가 돌아가잖아? 투수도 마찬가지야. 그 회전을 최대한 늦추는 거지.”
“왜요?”
“그만큼 홈플레이트와 가까운 곳에서 던지기 위해서.”
“네. 정후 형 말처럼 크리스 반스는 메이저리그 좌완 투수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공이 늦게 나와요. 그런데 워낙에 몸이 유연해서 공이 끝까지 살아 들어오죠. 이 공을 정석으로 치면 답이 없어요.”
“일반 타이밍보다 조금 더 빠르게 쳐야 한다는 말이지?”
“그렇죠. 결국 타이밍 싸움이니까요. 물론 타이밍을 너무 당기면 변화구 대처가 힘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감당하고 버터야 해요. 빠른 공에 대처를 못 하면 모든 공의 먹이가 되지만 적어도 빠른 공에 대응하면 크리스 반스가 던질 수 있는 공은 줄어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