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30화
29. 태양을 피하는 방법(상)(2)
“크리스 반스는 미국 대표팀의 에이스야. 존중이 필요하다고.”
“실력에 대한 존중은 소속팀에 가서 받아도 충분해요. 대표팀에서 존중을 받을 선수는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라고요.”
“크리스 반스는 지난 올림픽과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까지 군말 없이 참가했어. 충분히 대표팀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그건 대표팀에 합류한 대다수 선수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예요. 지난 올림픽 때와 선수 구성은 거의 동일하니까요.”
마이크 영 벤치 코치는 이번 결승전 때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 했다.
하나는 미국 대표팀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4연패.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완벽한 복수.
에릭 지터 감독을 비롯해 모두가 푸에르토리코를 결승 파트너로 원할 때도 마이크 영 벤치 코치만큼은 대한민국이 올라오길 바랐다.
선수 구성상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올림픽은 일종의 사고야. 크리스 반스가 기습 홈런을 맞고 무너진 것뿐이라고.’
LA 올림픽 당시 미국 대표팀은 완전체가 아니었다.
선수 구성은 좋았지만 코칭스태프가 문제였다.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데리고 프리미어 12에 참가했던 코칭스태프를 그대로 끌고 왔기 때문이다.
협회는 에릭 지터 감독을 수장으로 앉혔으니 별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제 선수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코치들이 선수들의 눈치를 보는데 팀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반면 지금은 달랐다.
자신을 비롯해 제이슨 피비와 마크 할리데이 등 메이저리그에서 내로라하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들이 합류하면서 선수단이 유기적으로 굴러가는 중이었다.
단순히 기술적인 조언만 해줄 수 있는 코치와 현역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코치는 엄연히 다른 법.
다들 한가락 하는 선수들로 구성된 초호화 대표팀이기 때문에 코치진들도 급을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지난 올림픽에서 한국에게 진 건 선수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모두의 문제지. 그리고 우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어. 그런데 해보지도 않고 몸을 사리자는 거야?”
마이크 영 벤치 코치의 반문에 에릭 지터 감독과 마크 할리데이 타격 코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수 구성을 떠나 확실히 현 대표팀은 지난 LA 올림픽 대표팀보다 단단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제이크 피비 투수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결국 경기는 선수들이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도 또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가능성을 낮추자는 겁니다. 한국의 키 플레이어는 썬이에요. 썬이 날뛰지 못하게 만든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원하는 야구를 할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크리스 반스에게 맡기자는 거잖아. 크리스 반스가 이날이 오길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 줄 알아?”
미국 대표팀 선수들 중에서 마이크 영 벤치 코치처럼 대한민국을 응원했던 선수는 한 명뿐이었다.
바로 크리스 반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으로 합류하면서 SNS에 남긴 글에서도 지난 올림픽의 굴욕을 꼭 만회하겠다고 다짐했을 정도였다.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도 크리스 반스가 다시 박유성을 상대한다면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거라는 데 동의했다.
크리스 반스의 호언장담대로 박유성을 찍어 누르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자존심은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크리스 반스가 100퍼센트 컨디션일 때의 이야기였다.
“마이크. 지난 올림픽 때 크리스 반스와 지금의 크리스 반스 중에 어느 쪽이 더 강하다고 생각해요?”
“그야 당연히…….”
별생각 없이 대답하려던 마이크 영 벤치 코치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3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열리지 않았다면 캠프에서 한창 컨디션을 끌어 올릴 시기였다.
“한국은 일찍부터 합숙을 시작했어요. 푸에르토리코전 때 나왔던 쏭을 봤어요? 그 친구는 거의 완벽하게 몸을 만들어 왔다고요.”
“장염으로 8강전 때 결장하지 않았어?”
“장염으로 결장해서 그 정도 던졌다는 건 준비가 잘 됐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경기 초반부터 썬이 홈런을 때려줬죠. 심리적인 부담감이 사라지니까 베스트 피칭이 나온 거라고요.”
“크리스 반스의 컨디션은 어때?”
에릭 지터 감독이 마이크 영 벤치 코치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마이크 영 벤치 코치가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완벽해요.”
“정말이야?”
“그럼요. 제이슨한테 물어봐요.”
에릭 지터 감독의 시선이 다시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에게 향했다. 하지만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는 마이크 영 벤치 코치처럼 장담을 하지 못했다.
“나쁘진 않습니다. 다만 100퍼센트 컨디션은 아닙니다.”
“그건 모두가 다 마찬가지잖아?”
“썬은 다릅니다. 썬은 지난 올림픽 때보다 더 성장했습니다. 더 무서운 괴물이 됐다고요.”
전문가들은 올림픽의 실패를 극복하고 게릿 벌렌더와 마지막까지 사이영 상 쟁탈전을 벌인 크리스 반스가 LA 올림픽 때보다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이미 최고의 좌완 투수라 평가받던 크리스 반스가 좀 더 위로 올라갔으니 메이저리그 역대급 좌완 투수들과 경쟁을 붙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관건은 컨디션.
LA 올림픽 때는 시즌을 치르다 넘어와서 체력적인 부담을 제외하고 모든 감각들이 최상이었던 반면.
지금은 체력을 포함해 모든 감각들이 완벽하게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지난 베네수엘라와의 8강전 때도 팽팽하던 상황에서 6회를 채우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어느 정도야?”
“시즌 기준으로 80퍼센트 정도입니다.”
“90퍼센트쯤 되지 않아?”
“그 정도만 됐더라도 썬을 맡겼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썬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 힘듭니다.”
사이영 상 투수 출신인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는 투수의 심리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베네수엘라전 때 크리스 반스는 가장 자신 있는 포심 패스트 볼 대신 커터와 슬라이더 비중을 높였다.
언론은 베네수엘라 타자들의 노림수에 대응한 좋은 전략이었다고 칭찬했지만.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의 눈에는 포심 패스트 볼이 얻어맞을까 봐 겁을 낸 것처럼 보였다.
지난 8강전 때 크리스 반스가 기록했던 포심 패스트 볼 최고 구속은 94mile/h(≒151.3㎞/h).
평균 구속이 97mile/h(≒156.1㎞/h) 이상인 시즌 중에는 구경하기 힘든 구속이었다.
“흠…….”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의 말에 에릭 지터 감독도 길게 신음했다.
선수단 운영 원칙대로라면 마이크 영 벤치 코치의 말대로 크리스 반스에게 경기를 맡기는 게 옳았다.
마이너리그 선수들도 아니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선수들만 모아놨는데 거기다 대고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의 말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크리스 반스가 시즌 중의 80퍼센트 컨디션밖에 되지 않는다면 박유성을 이기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어렵게 승부하라는 주문을 하기도 힘들었다.
박유성이 대한민국 프로 리그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냈다면 모르겠지만 아직 프로에서 데뷔전조차 치르지 않은 루키 중의 루키였기 때문이다.
“장타만 조심하게 하면 어떨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마크 할리데이 타격 코치가 한마디 보탰다.
지난 올림픽 결승전과 푸에르토리코와의 4강전 때 박유성의 선제 홈런에 경기 흐름이 넘어가 버렸으니 장타만 피하면 해볼 만할 것 같았다.
그러자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가 냉큼 반박했다.
“썬은 타석에 있을 때보다 루상에 있을 때 더 짜증 나는 타자야.”
“그래도 홈런을 맞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자리한 세 명의 코치들 중에 투수 출신은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 한 명뿐이었다.
에릭 지터 감독을 비롯해 마이크 영 벤치 코치와 마크 할리데이 타격 코치는 레전드 타자 출신들.
그렇다 보니 투수의 심리 자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후우. 좋아요. 제 기준에서 설명을 해보죠. 일단 안타를 얻어맞는 거? 이건 그냥 넘길 수 있어요.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졌는데 맞으면 좀 짜증 나지만 그게 아니라면 속으로 욕 한번 내뱉고 끝이에요.”
“볼넷은?”
“볼넷은 상황에 따라 달라요. 엄청 부담스러운 타자를 만나서 어렵게 승부하다가 볼넷이 나오면 어쩔 수 없다 싶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면 짜증이 나죠. 하지만 벤치에서 지시를 내려서 볼넷을 주면 그건 그럭저럭 넘길 수 있어요. 핑곗거리가 생기니까요.”
“결국 안타보다는 볼넷이 낫다는 거네.”
“흔히들 볼넷을 줄 바에야 차라리 안타를 맞는 게 낫다고 하는데 그건 승부를 하지 못하는 투수들에게 하는 이야기죠. 썬은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가장 잘 치는 타자예요. 지난 올림픽 때도 MVP를 받았죠. 아마 올 시즌에 한국에서 어마어마한 성적을 낼 겁니다. 그런 타자를 상대로 승부를 권하면 투수는 심리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어요. 그 과정에서 안타를 맞으면 제아무리 멘탈이 좋은 투수라 해도 흔들리게 되고요.”
“썬은 타석보다 루상에 있을 때 더 짜증 나는 선수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크리스 반스의 숨통을 트여줘야 한다는 겁니다. 크리스 반스. 너를 믿을게. 넌 잘할 수 있어. 이건 아직 100퍼센트 몸이 올라오지 않은 크리스 반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요.”
다소 빙 돌아왔지만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가 하려던 말은 간단했다.
크리스 반스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줄 것.
크리스 반스가 제대로만 던져준다면 무조건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줄 점수는 주고 따낼 점수를 따는 데 초점을 맞출 것.
“우리가 참고해야 할 경기는 일본전입니다. 그날, 니키타 쇼우도 박유성에게 두들겨 맞고 강판당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끈질기게 따라붙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결승전 선발 투수가 일본전 때 무너졌던 그 투수잖아?”
“경기 초반 흐름이 중요합니다. 크리스 반스가 썬에게 점수를 내주더라도 우리가 곧바로 경기를 뒤집는다면 내일 경기는 얼마든지 우리의 계획대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상대를 과소평가하고 만만하게 보면 큰코다칠 겁니다. 지난 올림픽 때처럼 말이에요.”
코치들과의 미팅을 마친 에릭 지터 감독은 곧바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은 강한 팀이야. 푸에르토리코를 13 대 1로 꺾고 올라왔어. 경기 중반에 썬에게 휴식을 줬지만 경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는 걸 다들 명심해.”
다소 안이한 마음을 먹고 있던 선수들을 재무장시킨 뒤 에릭 지터 감독은 크리스 반스를 따로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감독님.”
“어때? 내일 경기 자신 있어?”
“네. 자신 있습니다.”
“크리스. 결승전이라고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이번 대회가 끝나면 곧바로 시즌이라고. 올해는 작년에 놓쳤던 사이영 상을 되찾아와야 하잖아?”
“……!”
“그러니까 편하게 던져. 점수는 타자들이 뽑아내 줄 거야. 너는 5이닝만 책임져.”
“5이닝이요?”
“괜히 길게 던지겠다고 욕심부리지 말라는 거야.”
“…….”
“참고로 5실점까지는 괜찮아. 아, 그렇다고 5실점 정도 예상한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5실점을 하기 전까지는 바꾸지 않을 거라는 얘기야.”
“……네.”
“네 개인적인 복수심은 일단 집어넣어 둬. 어차피 썬은 메이저리그에 올 거야. 그때 동등한 조건에서 싸워서 이기라고. 지금 썬을 이겨봐야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