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27화
28. 황소개구리(8)
3회 말.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송현민은 길게 숨을 골랐다.
다행히도 푸에르토리코의 마운드는 호세 로페즈가 지키고 있었다.
아직 경기 초반이고 점수 차이가 크게 벌어진 건 아니다 보니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이 계속해서 끌고 가는 모양이지만.
홈플레이트 쪽을 바라보는 호세 로페즈의 눈빛은 첫 타석에 비해 많이 죽어 있었다.
‘무조건 하나 쳐야 해.’
송현민은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호세 로페즈의 팔꿈치를 바라봤다.
송현민이 자신의 버릇을 훔쳐보려 한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호세 로페즈는 평소처럼 그립을 고쳐 쥐었다.
‘양팔이 가지런한 거 보니까 포심인가?’
팔꿈치 위치에 대한 정확한 기준점을 잡지 못한 송현민은 초구를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잠시 후.
퍼엉!
153㎞/h의 빠른 공이 바깥쪽 꽉 차게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구심의 콜이 울리자 송현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심 빠지길 바랐는데 마지막 순간에 걸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런 송현민을 보며 지오반니 페레즈는 노림수를 짐작했다.
‘몸쪽 공을 노리는 모양인데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2회 말을 끝내고 지오반니 페레즈는 호세 로페즈와 볼배합에 대해 의논했다.
“한국의 좌타자들은 다들 유명해. 쏭과 키, 캄은 메이저리그 선수고 민과 팍도 메이저리그의 관심을 받고 있어. 거기에 썬까지 합류했고.”
“그래서? 좌타자들을 전부 거르기라도 하라는 거야?”
“쉽게 승부를 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거야. 다들 네 몸쪽 공만 기다리고 있는데 볼카운트가 불리하면 몸쪽으로 승부를 걸 수가 없어.”
오늘 선발 출전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좌타자는 무려 6명.
우타자 5명에 좌타자 4명으로 밸런스를 맞춘 푸에르토리코 입장에서 봤을 때 오른손 투수인 호세 로페즈를 저격하는 라인업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대한민국 대표팀의 좌타자들은 하나같이 펀치력을 가지고 있었다.
송현민과 기정후, 감백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20개 전후의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고.
민병규와 박준수는 지난 시즌 84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날리며 토종 거포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거기에 막내인 박유성은 오늘 경기에서만 홈런을 2개나 때려냈다.
“후우…… 좋아. 던지라는 대로 던질 테니까 잔소리는 여기까지만 해.”
호세 로페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오반니 페레즈의 요구대로 초구에 바깥쪽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만약 이 공이 빠졌다면 몸쪽 승부를 걸기가 어려웠겠지만.
볼카운트가 유리한 만큼 지오반니 페레즈도 과감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볼 카운트 원 볼에서 호세 로페즈 선수가 2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몸쪽! 송현민 선수가 잡아당긴 타구가 3루 쪽으로 벗어났습니다.
-이번에는 투심 패스트 볼이었는데요. 조금 빠지는 공이었습니다만 송현민 선수가 반응을 했습니다.
“쳇!”
몸쪽 공에 힘껏 방망이를 휘둘러봤던 송현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살짝 높게 날아들어서 욕심을 부려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무브먼트가 좋았다.
‘역시 투심은 아니야. 체인지업을 기다리자.’
타석 밖으로 한발 물러났던 송현민은 마음을 다잡고 타석으로 돌아왔다.
비록 파울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볼카운트만 까먹은 건 아니었다.
일단 박유성이 말하는, 왼 팔꿈치가 들린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됐고.
투심 패스트 볼을 때려 홈런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또다시 투심 패스트 볼이 날아온다면 정신 바짝 차리고 걷어내면 그만이었다.
“좋아. 송현민. 한 번 더 해보자.”
송현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날 선 기합소리와 함께 호세 로페즈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후앗!
호세 로페즈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바깥쪽으로 움직이자 송현민은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투구 전 왼팔과 오른팔이 가지런했으니 포심 패스트 볼이 아니면 슬라이더라고 예상을 한 것이다.
지오반니 페레즈는 송현민의 허를 찌르기 위해 다시 한번 빠른 공을 주문했지만.
따악!
송현민의 방망이 끝에 걸린 타구가 그대로 백네트 쪽으로 넘어가면서 삼진을 잡을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지오반니 페레즈는 실망하지 않았다.
‘빠른 공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은데 좋아. 어디 이것도 쳐 봐.’
투심 패스트 볼과 포심 패스트 볼에 연달아 반응했으니 이제 체인지업을 꺼낼 차례라고 여겼다.
송현민도 속으로 체인지업이 들어오길 간절히 바랐다.
자신의 바람대로 무릎 앞쪽으로 체인지업이 예쁘게 떨어져 준다면.
과장을 조금 보태 우주 끝까지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발 체인지업. 제발.’
사인 교환을 마친 호세 로페즈가 투구 준비에 들어가자 송현민은 다시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다 오른쪽 팔꿈치가 살짝 쳐지는 걸 확인하고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아냈다.
‘아직 아니야. 바깥쪽일 수도 있어. 흥분하지 말자. 침착하게.’
송현민은 애써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때 호세 로페즈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고.
후앗!
새하얀 공이 몸쪽으로 치기 좋게 날아오는 걸 확인한 송현민은 인정사정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마치 골프를 하듯 퍼올린 방망이 중심에 공이 걸리는 순간.
“젠장할!”
호세 로페즈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반대로 송현민은 하늘 높이 솟구친 타구를 보며 씩 웃었다.
“완벽하게 걸렸어.”
만약에 갑자기 지구상에서 중력이 사라진다면.
그대로 대기권을 뚫고 우주까지 날아갈 만큼 멋진 타구였다.
미국 중계석에서도 메이저리거다운 타격을 선보인 송현민에게 찬사를 퍼부었다.
-정말 완벽한 타격이었습니다.
-호세 로페즈가 성급하게 던진 체인지업을 망설이지 않고 퍼올렸어요.
-리플레이 화면이 나오는데 다시 한번 보시죠.
-역시 쏭은 체인지업이 들어올 걸 예상하고 있었어요. 완벽한 타이밍에 공을 때려냈습니다.
-이로써 쏭이 이번 대회 첫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게 됐는데요.
-정말 대단합니다. 아마 이 경기를 지켜보는 레인저스 팬들은 올 시즌이 기대될지도 모르겠어요.
-텍사스 지역 언론에서는 쏭을 5번에 고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요. 쏭이 이렇게만 해준다면 클린업 입성은 시간문제입니다.
빠르게 그라운드를 돌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송현민은 환호하는 동료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로 박유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봤지?”
“뭘 그렇게 죽어라 쳐요?”
“그럼? 뒤에서 어떤 미친놈이 쫓아오고 있는데 죽어라 쳐야지.”
“설마 그 미친놈이 저는 아니죠?”
“왜 아니겠냐. 이 야구에 미친 놈아.”
송현민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뒤쪽에 앉아 있던 민병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어들었다.
“현민이 형. 지금 홈런 10개 아니에요?”
“아마 그럴걸?”
“유성이는 2개 쳐도 6개인데 유성이가 무슨 수로 형을 따라잡아요?”
4강전 전까지 송현민은 9개의 홈런으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홈런 랭킹 1위를 달리고 있었다.
2위 그룹과는 3개 차이라 미국 주요 언론들은 송현민의 홈런왕 등극을 기정사실화했지만.
정작 송현민은 5개 차이가 나는 박유성이 신경 쓰였다.
만만한 투수를 상대로 홈런을 몰아 때리는 자신과 달리 박유성은 투수가 강하면 강할수록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사이영상 듀오인 게릿 벌렌더와 크리스 반스를 상대로 결승포를 때려냈고.
일본 대표팀 원투펀치인 마츠다 유이토와 니키타 쇼우를 집요하게 괴롭혀 패전 투수로 전락시켰다.
미국전 선발 투수로 크리스 반스가 유력한 상황에서 송현민이 홈런을 추가할 수 있는 기회는 4강전이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송현민은 이번 타석에 모든 걸 걸었다.
그리고 끝내 박유성과의 격차를 4개 차이로 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두 타석 연속 땅볼을 친 민병규가 까불어대니 흥이 깨져 버렸다.
“병규야. 형 기분 좋으니까 헛소리는 나중에 하자.”
“아, 넵.”
“짜식이 눈치가 없어요.”
민병규에게 한마디 한 뒤에 송현민은 다시 박유성의 팔에 어깨를 걸쳤다.
“무거워요오.”
“무겁긴 뭐가 무거워? 암튼 나하고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홈런 사이클이요?”
“장난치지 말고 인마. 너 홈런 2개 쳤어. 여기서 더 치면 반칙이야.”
“저도 더 치고 싶은데…… 왠지 투수 바뀔 거 같은데요?”
송현민이 더그아웃에서 동료들의 환호를 받는 동안 푸에르토리코 내야수들은 호세 로페즈와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 있었다.
“안 돼. 나 아직 하나밖에 못 쳤다고.”
송현민이 정색하며 마운드 쪽을 바라봤다.
박유성에게 연타석 홈런을 얻어맞을 때는 가만 있어 놓고 이제 와서 투수를 바꾼다고 하니까 약이 올랐다.
하지만 겨우 다잡은 호세 로페즈의 멘탈을 부숴 버린 건 다름 아닌 송현민이었다.
“바뀌네요.”
“젠장할.”
송현민은 진심으로 아쉬워했지만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호세 로페즈 선수가 내려가고 올랜도 디아즈 선수가 마운드로 올라옵니다.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이 오늘 경기에 1+1 작전을 쓸 수도 있다고 언급했었는데요. 불펜 투수들 대신 네덜란드와의 조별 예선 때 나왔던 올랜도 디아즈 선수 카드를 뽑아 들었습니다.
-아직 오늘 경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투수 교체인데요.
-우승이 목표인 푸에르토리코 입장에서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늘 경기를 내주면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끝이니까요.
-이제 4번 타자 김하선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지는데요. 김하선 선수가 바뀐 투수를 상대로 뭔가 하나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장호영 캐스터의 바람대로 김하선은 올랜도 디아즈의 초구를 잡아당겨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때려냈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라는 야구계의 격언을 떠나 워낙에 공격적인 스타일이라 살짝 몰려 들어오는 포심 패스트 볼을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다.
다시 실점 위기에 몰리자 지오반니 페레즈는 최대한 까다롭게 승부를 걸었다.
초구에 바깥쪽에서 살짝 빠지는 빠른 공으로 간을 본 뒤.
2구째 비슷한 코스에 슬라이더를 요구해 스트라이크를 잡고.
3구째 곧바로 몸쪽으로 투심 패스트 볼을 붙였다.
송현민 때처럼 건드려주기를 바랐지만.
기정후는 데뷔 때부터 공을 잘 보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몸쪽 깊숙이 들어온 투심 패스트 볼을 가볍게 골라낸 기정후는 4구째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지켜본 뒤에 기어코 볼넷을 얻어냈다.
-기정후 선수가 1회에 이어 다시 한번 볼넷으로 출루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무사 1, 2루 기회에서.
따악!
감백호가 특유의 호쾌한 스윙을 터트렸다.
-아아, 큽니다!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것도 넘어갔어요.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우익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집니다! 쓰리런 홈런! 감백호 선수가 이번 대회 첫 홈런포를 4강전에서 때려냅니다!
대표팀에 합류한 이후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어 왔던 감백호까지 부활하자 대한민국 더그아웃은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반면 푸에르토리코 벤치에서는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앞서 송현민에게 홈런을 얻어맞았을 때까지만 해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며 선수들을 독려했던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조차 그라운드를 도는 감백호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미국 대표팀의 결승 파트너를 가리는 4강 2차전은 대한민국 대표팀의 13 대 1, 완승으로 끝이 났다.
선발로 나온 송찬우는 6이닝을 3피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냈고.
송현민은 7회에 3타점 홈런을 때려내며 홈런과 타점 부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반면 박유성은 5회 말 공격 때 교체가 됐다.
푸에르토리코의 바뀐 투수가 자꾸만 박유성을 맞추려 했기 때문이다.
“4강전에서 다치면 안 돼서 뺀 거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네. 감독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