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26화
28. 황소개구리(7)
재작년 겨울.
ESPM에서 송현민을 2027년 FA 톱 10으로 꼽았을 때 메이저리그 팬들은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쏭이 누구야?
국제 경기에 관심이 많은 메이저리그 팬들은 송현민이 대한민국 대표팀의 간판타자라고 말했지만.
대다수 팬들은 언론이 호들갑을 떠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
송현민은 메이저리그 팬들이 주목하는 스타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데뷔 첫 시즌에 3할 타율을 지켜내며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시작되기 전.
메이저리그 주요 언론들은 송현민과 박유성을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타자로 꼽았다.
“썬은 말이 필요 없는 슈퍼 루키입니다. 반년 전 LA 올림픽에서 믿을 수 없는 활약으로 한국에 금메달을 안겨줬죠.”
“레인저스에서 뛰고 있는 쏭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키와 캄이 30대가 된 지금 쏭이 대한민국 타선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덕분에 송현민의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기반으로 한 판타지게임 <마이 메이저리그>에서 송현민이 인기 순위 1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10위도 아니고 고작 100위가 뭐가 대단하겠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마이 메이저리그> 내 선수 인기 순위는 실제로 해당 선수 카드를 구입하고 로스터에 올릴 때만 적용된다.
다시 말해 <마이 메이저리그>를 즐기는 대다수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송현민은 100번째로 인기 있는 선수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송현민이 박준수와 어깨동무를 하고 1루 쪽으로 걸어가자 1루 쪽 관중석에 앉아 있던 메이저리그 팬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지금 송현민 선수가 박준수 선수와 뭔가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무슨 얘기일까요?
-글쎄요. 내야 수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내야 수비요?
-푸에르토리코의 하위 타선은 지금껏 등장했던 선수들에 비해 이름값이 떨어집니다. 케니 리베라 선수는 메츠의 유틸리티 플레이어이고 지오반니 페레즈 선수는 트윈스의 백업 포수죠.
-자이언츠에서 뛰고 있는 엔리케 히메네스 선수도 아직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죠.
-한 점 차 상황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박유성 선수의 연타석 홈런으로 3점까지 점수가 벌어졌으니까 푸에르토리코 벤치에서도 작전을 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작전이 걸릴 걸 대비해서 다시 한번 상황 정리를 하는 것이로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입니다만 또 모르죠. 경기 끝나고 술 한잔하자고 했을지도요.
이선철 해설위원의 우스갯소리에 채팅창이 자지러졌다.
일부 짓궂은 팬들은 선 넘는 드립을 쳤다가 관리자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박준수가 송현민을 어려워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유성은 두 사람의 밀착 대화가 수상하기만 했다.
“뭐지? 왠지 내 얘기 하는 거 같은데. 더그아웃 들어가면 바로 화장실로 도망쳐야겠다.”
푸에르토리코의 3회 초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났다.
3점 차이를 만회하기 위해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이번 4강전을 위해 만반의 채비를 갖췄던 송찬우의 공을 건드리지 못했다.
-헛스윙 삼진 아웃! 송찬우 선수가 지오반니 페레즈 선수에 이어 엔리케 히메네스 선수까지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송찬우 선수 오늘 컨디션이 상당히 좋아 보이는데요. 빠른 공의 구속이 155㎞/h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송찬우 선수가 갑작스럽게 복통을 호소해서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요. 마운드에서 던지는 모습을 보니까 다 털어낸 것 같습니다.
-송찬우 선수 별명이 괜히 코리안 헐크가 아니죠. 박유성 선수의 연타석 홈런으로 3점의 리드까지 잡았으니까 지금처럼 편하게 던지면 될 것 같습니다.
호주와의 조별 리그 개막전 때 선발로 나선 송찬우는 8강전 선발로 예정되어 있었다.
무려 7일을 쉬고 등판하는 일정이라 컨디션 관리가 어느 때보다 중요했는데 경기를 하루 앞두고 송찬우가 장염에 걸려 버렸다.
“무식하게 처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송찬우는 임찬기의 잔소리에 대꾸하지 못할 만큼 모든 걸 다 쏟아내고 탈진했고.
강기태 감독은 대체 선발로 김일웅을 이스라엘 전에 투입해야 했다.
그런 송찬우를 두고 일본의 언론들이 급성맹장염이 의심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내 인생 첫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화장실에서 끝낼 수는 없어.”
이틀간 체력 회복에 집중한 송찬우는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다시 기력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강기태 감독을 찾아가 4강전에 내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4강전은 찬기에게 맡기고 결승 준비하자.”
강기태 감독은 송찬우를 만류했다.
이번 경기를 끝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을 그만둔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난 LA 올림픽 우승 직후 올림픽 2연패를 목표로 대표팀을 이끌어달라는 주문을 받은 터라 송찬우를 무리해서 등판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송찬우는 박유성과 대한민국 야구를 깔보는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저한테는 푸에르토리코전이 결승전입니다. 감독님.”
송찬우의 의지를 확인한 강기태 감독은 코칭스태프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코치들과 논의한 끝에 송찬우에게 4강전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당초 계획대로 송찬우를 결승으로 돌리기에는 등판 간격이 너무 길어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명예 회복을 바라는 임찬기도 신경을 써줘야 했다.
“푸에르토리코 타자들은 적극적이니까 찬기보다는 찬우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좌타자들이 많은 미국 타선을 생각한다면 찬기를 결승전으로 돌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마운드에 오른 송찬우는 경기 시작부터 푸에르토리코 타자들을 요리했다.
푸에르토리코 타자들이 빠른 공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설 거라는 걸 예상하고는 스플리터와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 등 구사 가능한 모든 구종을 총동원해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송찬우의 영리한 피칭 앞에 대한민국 대표팀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출루를 성공시킨 테이블 세터는 물론이고 가장 많은 홈런을 생산해 낸 클린업 트리오도 힘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출루하라는 특명을 받은 하위 타선도 송찬우의 공을 쫓아다니기 바빴다.
“형. 바로 메이저 가도 되겠는데요?”
3회 초 수비가 끝나자 박유성이 후다닥 달려와 송찬우의 엉덩이를 때렸다.
평소였다면 까다로운 타구를 쫓느라 땀 좀 흘렸을 텐데 송찬우 덕분에 짧게 수비를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송찬우의 호투의 비결은 다름 아닌 박유성이었다.
“너 믿고 편하게 던진 거야.”
“그래요. 저만 믿고 편하게 던져요.”
“이미 그러고 있어.”
대한민국의 우완 에이스 송찬우의 주무기는 포심 패스트 볼이었다.
최고 구속은 156㎞/h 정도지만 타석에서 느끼는 체감 구속은 160㎞/h를 넘어 170㎞/h 수준이라고 극찬을 받을 만큼 송찬우의 포심 패스트 볼은 묵직했다.
그렇다고 송찬우가 빠른 공만 앞세우는 투수인 건 결코 아니었다.
파이터즈 소년 가장 시절에 형편없는 득점 지원과 잦은 불펜 방화로 승리를 따내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나자 송찬우는 마운드에서 오래 버티는 걸 목표로 삼았다.
이닝 이터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100구쯤은 우습게 던질 수 있는 체력.
다른 하나는 빠른 공의 위력을 배가시켜 줄 레퍼토리.
데뷔 시즌이 끝나고 곧바로 증량에 들어간 송찬우는 해마다 5㎏씩 체중을 불리며 몸을 키웠고.
그 결과 코리안 헐크라는 별명을 얻어냈다.
레퍼토리를 늘리는 건 체력을 키우는 것보다 쉬웠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손재주가 좋기로 유명했던 송찬우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수준급으로 던졌는데 거기에 새롭게 손에 맞는 파워 커브를 장착했고.
스플리터까지 추가하면서 외국인 용병 투수들과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송찬우는 그런 자신의 능력을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 LA 올림픽 때도 나쁘지 않은 피칭을 선보였지만.
올 시즌이 끝나면 해외 진출이 가능해지는 만큼 LA 올림픽 때보다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때마침 박경호가 포심 패스트 볼을 대신해 변화구 위주의 승부를 제안하자 송찬우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타 걱정은 하지 마. 코너 워크만 되면 네 공 쉽게 못 쳐. 그리고 네 등 뒤에는 유성이가 있으니까 어지간한 타구들은 전부 처리해 줄 거야.”
박경호는 노파심에 박유성을 언급했지만.
정작 송찬우는 박유성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
지난 LA 올림픽 때 박유성의 호수비가 아니었다면 송찬우는 아마도 패전의 멍에를 썼을 것이다.
따악, 하고 파열음이 나는 순간 눈앞이 깜깜했는데 그 절망을 환희로 바꿔준 게 바로 박유성이었다.
그때 봤던 박유성의 신기에 가까운 플레이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을 정도.
“형하고 유성이 믿고 던질 테니까 맘껏 부려먹으세요.”
송찬우의 요구대로 박경호는 최대한 어렵게 사인을 냈다.
임찬기였다면 몇 번이고 고개를 저을 만큼 까다로운 코스를 요구했고.
송찬우는 군말 없이 박경호의 리드를 따라왔다.
야구의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공을 완벽하게 던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던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맞는 건 박유성과 수비수들이 어떻게든 막아줄 거라 여겼다.
그 과정에서 네 개의 뜬공이 나왔고 그중 세 개를 박유성이 가볍게 처리해 줬다.
박유성은 딱히 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송찬우는 박유성의 안정적인 수비 지원 덕분에 마음 편히 공을 던질 수 있었다.
게다가 박유성은 수비만 잘해준 게 아니었다.
1회 선제 솔로포에 이어 2회 도망가는 투런포까지.
오늘 경기에서 나온 모든 점수를 박유성 혼자 뽑아내고 있었다.
“암튼 다음번 타석 때 홈런 하나만 더 쳐줘라.”
“또요? 이미 두 개 쳤는데요?”
“현민이 형도 3연타석 홈런 쳤잖아. 너도 할 수 있어.”
“하하. 글쎄요. 제가 또 홈런 친다고 하면 현민이 형이 방망이 뺏어갈걸요?”
박유성이 멋쩍게 웃었다.
송현민에게 홈런왕 타이틀을 양보하기로 약속했던 터라 더 이상 홈런을 치는 건 눈치 보였다.
그때 저만치서 송현민이 검지를 까닥거렸다.
“하아, 젠장.”
“왜?”
“현민이 형이 오래요.”
박유성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송현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송현민이 박유성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호세 로페즈 공략법이 있으면 이 형한테 먼저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
“형은 자신 있다면서요?”
“안타 칠 자신이 있다는 거지 홈런 칠 자신이 있다는 건 아니었는데?”
“원래 안타를 치다 보면 홈런이 나오고 그러는 거죠 뭐.”
“그럼 너는 10할 타자니까 이쑤시개를 들고 쳐도 잘 치겠다. 그렇지?”
“이쑤시개는 좀…….”
“그러니까 다 꺼내봐. 나도 손맛 좀 봐야지.”
송현민이 준 방망이를 지키기 위해 박유성은 어쩔 수 없이 밑천을 털었다.
“왼쪽 팔이 살짝 들리면 투심. 오른쪽 팔이 살짝 처지면 체인지업. 커브는 던질 때 티가 나고 슬라이더는 포심하고 거의 비슷하니까 한 타이밍에 공략하고요.”
“다른 공은 필요 없어. 어차피 투심 아니면 체인지업이야.”
박유성의 조언을 들은 송현민은 비장한 얼굴로 타석에 들어섰다.
송찬우의 호투 속에 홈런왕 경쟁을 벌이는 푸에르토리코 클린업들이 주춤한 상황이지만.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박유성이 홈런 두 개를 추가했으니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유성이 저 녀석, 결승전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그러니까 벌릴 수 있을 때 최대한 벌려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