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23화
28. 황소개구리(4)
“뭐야? 삼진을 잡는다더니 첫판부터 바깥쪽이야?”
타석 밖으로 한발 물러서며 박유성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어제 경기 전 인터뷰 때 송현민과 신경전을 벌이며 세 타석을 전부 삼진으로 잡겠다고 떠들어대서 내심 몸쪽 승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깥쪽으로 빠져 들어오는 공을 보니까 김이 다 샜다.
“그래. 초구는 그럴 수 있어.”
다시 타석으로 돌아온 박유성은 천천히 루틴을 펼쳤다.
그리고 방망이를 왼쪽 어깨에 살짝 걸친 뒤 다시 한번 몸쪽 공을 노렸다.
하지만 이번 공도 시작부터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설마 이걸 건드려 달라는 건 아니지?”
박유성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호세 로페즈를 바라봤다.
바깥쪽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듯 들어오는 공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초구는 물론이고 2구도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2개 이상 벗어났다.
바깥쪽을 후하게 잡아주는 구심도 결코 손을 들어줄 수가 없는 코스.
그렇다고 엉겁결에 방망이가 딸려 나갈 만큼 구속이 빠른 것도 아니다 보니 속아주고 싶어도 속아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호세 로페즈는 칠 만한 공을 던져도 반응하지 않는 박유성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도대체 무슨 공을 노리는 거지?”
메이저리그에서 8년을 버티면서 호세 로페즈는 몇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그중 하나가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방망이가 길다는 것.
체격이 좋은 선수들이 무거운 방망이를 들고 있는 힘껏 휘두르다 보니 적당히 코너워크가 된 공으로는 이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호세 로페즈는 메이저리그에서 터득한 요령대로 초구와 2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지만 타이밍을 맞춰 힘껏 휘두르면 방망이 중심에 걸릴 것 같은 그런 코스로.
메이저리그의 힘 있는 좌타자들이 환장하고 달려드는 공이라 박유성도 당연히 걸려들 줄 알았는데 스윙은커녕 반응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계산이 꼬였다.
초구와 2구 중에 하나를 건드리면 파울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몸쪽 승부에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볼카운트가 투 볼이 되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포수 지오반니 페레즈도 다시 한번 바깥쪽 사인을 냈다.
‘높은 체인지업이라.’
호세 로페즈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공은 어떻게든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한다는 건 이해하지만 여차하면 장타를 얻어맞을 수 있는 코스였다.
하지만 호세 로페즈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루키.
LA 올림픽에 이어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절대적인 경험치 자체는 다른 프로 선수들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체인지업을 높게 던질 거라고는 생각 못 하겠지.’
가슴 앞으로 글러브를 모은 호세 로페즈가 마음의 준비를 하듯 잠시 뜸을 들였고.
그런 호세 로페즈를 보며 박유성은 앞선 투구 때와 뭔가 달라진 걸 느꼈다.
‘오른쪽 팔꿈치가 살짝 내려온 거 같은데. 체인지업인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공을 쥔 오른팔의 긴장이 살짝 풀린 게 빠른 공이 아니라 변화구가 들어올 것 같았다.
그때 호세 로페즈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다.
후앗!
호세 로페즈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시야로 들어오자 박유성은 일단 내디딘 오른발에 힘을 주며 버텼다.
바깥쪽 상단의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듯 빠르게 날아드는, 제대로 맞혀내기만 해도 쭉쭉 뻗어 담장을 넘어갈 것 같은 공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했다.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으로도 모자라 푸에르토리코 선수들에게까지 무시당하고 있는 거라면 할 말 없지만.
‘그랬다면 초구와 2구를 바깥쪽으로 빼지도 않았겠지.’
만약에 빠른 공이라면 파울을 만들 생각으로 허리 회전을 지연시켰는데 피칭 터널을 빠져나온 공의 회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
구종을 파악한 박유성은 서두르지 않고 떨어지는 공을 향해 정확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오랜만에 쳐보는 체인지업이라 방망이 중심에 맞힐 수 있을까 싶었지만.
따악!
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한 방망이는 애매하게 날아온 공을 그대로 집어삼켰고.
제법 많은 관중들이 들어찬 LA 파크를 환호로 이끌었다.
-박유성 선수가 힘껏 때려낸 타구가 그대로 전광판을 직격합니다!
-바깥쪽 높게 들어온 체인지업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놓치지 않고 때려냈습니다.
리플레이 화면에 이어 중계 카메라가 홈으로 들어오는 박유성의 모습을 잡았다.
맞는 순간 홈런이라는 걸 직감해서일까.
유유히 홈플레이트를 밟은 박유성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민병규, 송현민과 손뼉을 부딪치고는 1루 쪽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이 이내 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 생각보다 더 잘하잖아?”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조 바에르가 타격코치가 말을 받았다.
“체인지업이 높았습니다. 실투라고 봐야겠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볼카운트가 원 볼 원 스트라이크였다면 절대 저 코스로 던지지 않았을 겁니다.”
조 바에르가 타격코치는 운이 나빴다며 호세 로페즈를 두둔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레전드 포수 출신인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조금 전 공은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던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공이었어. 그걸 썬이 잘 때려낸 거라고.”
지오반니 페레즈는 트윈스의 백업 포수였다.
호쾌한 타격을 선보이는 중남미 선수들과 어울리지 않는 1할대의 타격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수비가 좋아서 3년째 메이저리그에 잔류 중이었다.
그런 지오반니 페레즈가 허를 찌르는 사인을 냈을 때.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은 무조건 통할 거라 여겼다.
바깥쪽 빠른 공을 연달아 맛본 타자라면 십중팔구 몸쪽 공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설 것이다.
그때 하이 패스트볼처럼 바깥쪽으로 체인지업을 던지면 엉겁결에 방망이가 끌려 나오게 마련이었다.
야구에서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체인지업이라는 공을 높게 던지는 건 죄악이나 다름없지만.
체인지업을 높게 던지지는 않을 거라는 기본 인식을 깨뜨린 피칭인 만큼 타자도 허를 찔릴 가능성이 컸는데 박유성은 그 공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받아쳤다.
게다가 그 타구는 다저스 파크에서 가장 깊숙한 센터 쪽으로 날아가 전광판 상단을 때리고 튕겨 나왔다.
‘정확도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힘이 좋았나?’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의 시선이 벤치에 앉은 박유성에게 향했다.
TV에서 봤을 때보다는 조금 탄탄해 보이긴 했지만.
박유성의 체격은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상대로 홈런을 때려낼 만큼 건장한 건 아닌데 비거리가 확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박유성도 생각 이상으로 힘이 실린 타구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유성아. 뭐야?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찍힌 거야?”
“그런 것도 있는데 배트 바꿨거든요.”
“이거 너 원래 쓰던 방망이 아니야?”
“거의 비슷한데 현민이 형이 준 거예요. 원래 쓰던 것보다 살짝 무거워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치르면서 박유성은 김석률 감독이 줬던 기정후 방망이를 다시 꺼내 들었다.
본래는 집에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박유신에게 물려주려고 했는데 기정후가 귀국하고 나서 똑같은 방망이를 열 자루나 선물해 줘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현민이 배트만 쓰지 말고 내가 준 배트도 좀 써봐. 손에 맞으면 내가 스폰 연결해 줄게.’
배트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라 박유성은 조별 예선부터 방망이를 돌려가며 썼다.
덕분에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조차 박유성의 방망이가 바뀌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살짝 무겁다고? 나도 한번 들어보자.”
“여기요.”
박유성은 보관함에 넣으려던 방망이를 박준수에게 건넸다. 그러자 무게를 가늠하던 박준수가 박유성을 보며 말했다.
“나 다음 타석 때 이거 빌려주면 안 돼?”
“형한테는 가볍지 않아요?”
“살짝 가볍긴 한데…… 나 지금 7번이잖아. 뭐라도 해야지 안 되겠어.”
지난 LA 올림픽 때까지만 해도 주로 클린업을 맡았던 박준수는 이번 대회에서 하위 타순으로 내려왔다.
강기태 감독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처음인 박준수의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한 조치였다고 말했지만.
당사자인 박준수는 실력에서 밀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형.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요. 다음 대회부터는 클린업 복귀할 텐데요 뭘.”
국가대표 최고참인 김하선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내년에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이 기다리고 있지만 자신보다는 벤치에서 대기 중인 이종률이 3루를 보는 게 낫다고 말했다.
김하선이 은퇴하면 그다음은 기정후와 감백호 차례였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아시안게임은 불참이 유력한 상태고.
내후년 프리미어 12가 끝나고 나면 김하선을 따라 은퇴를 발표할 가능성이 높았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혹사시킨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강기태 감독이 송현민과 김하선, 기정후, 감백호로 클린업을 짠 것도 그동안 고생해 온 해외파 선수들의 노고에 대한 답례에 가까웠다.
하지만 박준수는 선배들이 떠난 자리를 물려받기보다 실력으로 제 자리를 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2할대에 머물러 있는 타율부터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암튼 이것 좀 빌려주라.”
“상관은 없는데 괜찮겠어요?”
“요즘 공이 안 맞아서 조금 가벼운 배트를 들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게 딱 적당한 것 같아.”
무게를 떠나 손에 쥔 방망이는 박유성이 홈런을 때려낸 방망이였다.
흔히들 미신이라고 치부하지만 홈런을 친 타자의 방망이를 빌려 타격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박준수와 다니엘 브리토가 슬럼프에 빠졌다 싶으면 서로의 방망이를 빌려 쓰는 것도 좋은 기운을 나눠 받기 위해서였다.
이번 대회 들어 박준수가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유성도 박준수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깨 먹으면 안 돼요.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걱정하지 마. 난 병규 녀석처럼 아무 공에나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으니까.”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타구가 유격수 앞으로 굴렀고.
그리고 민병규가 1루를 향해 허겁지겁 내달리기 시작했다.
“뭐예요? 뭐 친 거예요?”
박유성이 옆에 앉아 있던 나경석에게 물었다. 그러자 나경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병규?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
“그걸 왜 쳐요?”
“그걸 치니까 민병규지.”
타석에서는 민병규만큼이나 적극적인 나경석이지만 방금 전 타격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라면 바깥쪽 빠지는 공은 지켜보는 게 국룰인데 그걸 굳이 건드렸으니 포장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정작 벤치로 돌아온 민병규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젠장. 방망이 끝에 걸렸어.”
“노리던 공이에요?”
“바깥쪽 체인지업이잖아. 네가 홈런 친 공.”
“……?”
“너 따라서 홈런 치려고 했지.”
“…….”
처음에는 농담인가 싶었지만 민병규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평소였다면 한마디 했다가 싸움이 났을 박준수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그런데 너 저거 어떻게 친 거야?”
“체인지업이요? 그냥 타이밍 맞춰서 힘껏 친 건데요?”
“그게 다야?”
“그럼요? 체인지업 치는 요령이 따로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