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220화 (220/412)

타자 인생 3회차! 220화

28. 황소개구리(1)

1

U-18 야구 월드컵이 끝이 났을 때.

로열스의 북중미 담당 스카우트 토미 헌트는 박유성의 등장으로 북중미 선수들의 시장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번 대회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는 북미 선수도 중남미 선수도 아닌 아시아 선수였습니다. 피지컬적으로 북중미 선수들이 아시아 선수들을 압도하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은 국제 무대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고 아시아의 야구 시장은 미국 다음으로 큽니다. 썬이라는 슈퍼 루키의 등장이 우연의 산물은 아니라는 거죠.”

토미 헌트는 박유성을 필두로 아시아 지역 유망주들의 미국 진출이 활발해질 거라 예상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아마추어 유망주 시장에서 우위를 점했던 북중미 선수들에 대한 재평가가 동반될 거라 덧붙였다.

LA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토미 헌트의 말에 동조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썬? 잘하지. 이번 대회에서 본 최고의 재능이야. 하지만 아마추어 무대잖아? 메이저리그는 다를 거라고.”

“게다가 이번 대회는 한국에서 열렸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무시해서는 안 돼.”

“그런데 아마추어 계약을 한 한국 출신 선수들 중에 성공한 케이스는 거의 없지 않아?”

“기준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올스타급은 추, 한 명뿐일걸?”

“당시 추도 한국에서는 최고의 재능을 가진 아마추어 선수였어. 하지만 메이저리그로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

“썬의 등장으로 북중미 아마추어 시장이 타격을 입을 거라는 건 지나친 비약이야. 썬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실제로 박유성의 몸값에 대한 전망이 나왔을 때 대다수 스카우트들이 300만 달러를 넘기긴 어려울 거라고 단언했다.

해외 아마추어 계약 규제로 북중미 유망주들 중에 300만 달러 수준의 계약을 받는 선수는 채 10명도 되지 않았다.

비록 박유성이 10할 타율에 비공식 타격 8관왕을 달성하긴 했지만 왜소한 체격에 아시아 선수인 걸 감안해 해외 아마추어 유망주 TOP10 정도로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박유성이 민찬수를 대신해 LA 올림픽에 합류해 멱살을 잡고 대한민국 대표팀을 우승시키자 말이 달라졌다.

“썬은 지금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도 충분한 선수야. 썬의 재능은 다른 아마추어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올해 국제 아마추어 시장으로 나올 수 있는 선수들을 통틀어 썬을 따라잡을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어. 썬의 재능은 그만큼 독보적이라고!”

“메이저리그 단장 중에 썬을 300만 달러에 데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거야.”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썬을 데려오라고!”

올림픽 MVP까지 차지한 박유성이 기준점을 확 높이자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이 영입 대상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썬처럼 타격이 좋지도 않고 썬처럼 베이스 러닝이 빼어난 것도 아닌 데다가 썬처럼 수비할 수도 없는 선수에게 200만 달러를 주자는 거야?”

“썬은 빼고 봐야 합니다. 애당초 썬을 이 그룹에 포함시키는 건 잔인한 짓이에요.”

“쓸만한 유망주들은 줄어드는데 반대로 몸값이 오르는 이유가 뭐야? 게다가 우리가 투자한 시설에서 성장한 선수잖아!”

“그걸 저한테 따지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그저 작년 기준으로 계약금을 책정했을 뿐입니다.”

메이저리그 노사 협정에 따라 책정된 해외 아마추어 계약금 총한도는 평균 600만 달러였다.

쓸 수 있는 보너스 풀이 한정적이다 보니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금을 받는 선수도 소수에 불과했다.

최대한 쪼개 쓴다고 해도 최대 4명 정도.

누군가 300만 달러 이상을 받아간다면 같은 해 계약을 맺은 나머지 선수들은 100만 달러 이상을 받기 어려웠다.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이 80만 달러를 넘긴 상황에서 100만 달러는 더 이상 큰 금액이 아니었지만.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못하는 해외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는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 금액은 안 돼. 기존에 계약했던 선수들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어.”

“이미 이 계약을 지불하겠다고 에이전트와 얘기가 끝났습니다.”

“그럼 다시 얘기해. 이 금액은 안 된다고. 이런 선수에게 200만 달러를 주니까 팜이 그 모양인 거라고.”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박유성을 기준으로 삼자 계약을 진행 중이던 선수들과 에이전트들이 반발했다.

“젠장할! 갑자기 계약금을 절반으로 후려치는 게 말이 돼?”

“그래도 아직 계약은 살아 있잖아. 우리는 아예 계약이 취소됐어. 망했다고.”

“도대체 뭐야?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이게 다 썬인지 뭔지 하는 녀석 때문이야. 그 녀석 때문에 우리 모두가 피해를 보는 거라고!”

“썬은 한국에 남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 녀석 에이전트가 메이저리그 구단들과 접촉 중이었어. 최저 250만 달러 계약을 제안 받았대!”

“그러니까 결국 썬의 영입 자금을 만들기 위해 이 난리를 치는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아마추어 시장에서는 썬이 최고인데.”

그렇게 에이전트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찰라 다저스가 방아쇠를 당겼다.

“다저스 얘기 들었어? 썬에게 올인한대!”

“올인이라니? 그럼 진행 중인 계약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알아봤는데 전면 보류야.”

“말도 안 돼! 아무리 썬을 잡고 싶어도 그렇지 그런 미친 짓을 한다고?”

“다 함께 다저스를 보이콧 해야 하는 거 아냐?”

“다저스뿐만 아니야. 다른 구단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다저스에 이어 자이언츠, 양키즈, 레드삭스 등 빅마켓 구단들이 박유성 쟁탈전에 뛰어들면서 중남미 시장에는 역대급 한파가 몰아쳤다.

다행히 박유성이 너무 늦지 않게 국내 잔류를 선언하면서 멈췄던 시장이 재개됐지만 분위기는 예전만 못했다.

-그래서 괜히 너한테 화풀이 중인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미국에 따라오지 못한 송광철 대표는 전화를 통해 박유성을 달랬다.

“그러니까 제가 황소개구리였네요.”

-거의 그런 셈이지. 너만 없었다면 북중미 시장은 여느 때처럼 평온했을 테니까.

송광철 대표는 박유성이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의 발언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는 걸 경계했다.

앞서 스즈키 이치이로도 30년 발언을 했다가 경기중에 빈볼을 얻어맞았던 터라 에이전트로서 걱정이 많았다.

-암튼 언론에서 긁더라도 절대 반응하지 마. 알겠지?

“그러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될지 모르겠어요.”

-정 참기 힘들 것 같으면 내가 협회에 얘기할까?

“그렇게 해 주세요. 저도 이번에는 좀 쉬고 싶어요.”

지난 LA 올림픽에서 MVP를 차지한 이후 박유성은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간판스타가 됐다.

송현민을 비롯해 기정후와 감백호, 김하선, 송찬우 등 대신할 선수가 많았지만 일본 언론들은 모든 경기 전 인터뷰 때마다 박유성을 불러내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박유성은 이번 4강전만큼이라도 경기에 집중하고 싶었다.

박유성의 요청을 받은 송광철 대표는 곧장 협회에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

“그러니까 박유성 선수를 사전 인터뷰에서 빼 달라는 말입니까?”

“네. 미국 언론에서 애피타이저로 삼을 거라며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미국 언론에서 그렇게까지 할까요?”

“푸에르토리코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4회 연속 준우승을 차지한 강호입니다. 그리고 미국 대표팀은 지난 세 번의 대회에서 푸에르토리코를 힘겹게 꺾고 우승을 차지했고요.”

“미국 언론에서 우리가 푸에르토리코를 이기고 올라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싸움을 붙일 거라는 얘기로군요.”

“푸에르토리코가 올라오더라도 최소한 혈투가 벌어지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미국도 만만찮은 일본을 상대해야 하니까요.”

미국 주요 도박사이트들이 발표한 우승 배당에서 미국 대표팀은 3.6으로 20개국 중 1위였다.

2위는 4.0의 푸에르토리코.

일본이 5.0으로 그 뒤를 이었고 LA 올림픽 우승국인 대한민국은 9.0으로 4위였다.

처음 배당이 발표됐을 때 대한민국과 일본의 전력을 지나치게 고평가한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배당률 하위 4개국이 전부 4강에 오르면서 미국 도박사이트의 분석력이 다시 한번 인정받게 됐다.

이 배당대로라면 미국 대표팀에게 가장 거슬리는 존재는 일본이 아닌 푸에르토리코.

내심 푸에르토리코와 일본이 맞붙고 대한민국을 4강에서 이기고 결승에 올라가는 그림을 그렸을 미국 입장에서는 대한민국과 푸에르토리코의 4강전 결과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박유성 선수 에이전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 18살입니다. 언론 때문에 멘탈이 흔들리면 우리만 손해입니다.”

“흠…….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또 난리를 치겠군요.”

“사전 인터뷰 선수는 어차피 각 팀에서 정하는 거니까 원칙적으로는 상관없을 겁니다. 그리고 결승전에 올라가려면 푸에르토리코를 잡아야 하고요.”

다음 날.

경기전 인터뷰에 응하는 선수가 박유성에서 송현민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자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뭐야? 썬이 나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왜 바뀐 거야?”

“야디에르 모리나의 발언 때문이겠지 뭐.”

“그게 뭐 어때서? 국제 대회에서 그 정도 발언은 할 수 있는 거잖아?”

“야디에르 모리나는 푸에르토리코 감독이기 이전에 메이저리그 레전드라고.”

통산 9번의 골드 글러브를 차지한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수비형 포수였다.

게다가 은퇴한 지 6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현역 기자들이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보니까 말을 잘하던데?”

“썬이 인터뷰를 잘한다고 해도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야. 상대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슈퍼스타야. 기자들이 집요하게 싸움을 붙일 건데 조금이라도 말실수를 했다간 두고두고 꼬투리 잡힐 거야.”

“썬에게 질문할 기회가 사라진 건 아쉽지만 난 한국 대표팀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해.”

“썬은 언론에 물어뜯기기에 아직 어려. 벌써부터 메이저리그 언론의 집요함을 겪을 필요는 없다고 봐.”

박유성은 불참했지만 경기 전날 열린 사전 인터뷰의 열기는 뜨거웠다.

“야디에르 감독님의 발언이요? 글쎄요. 유성이에 대한 분석을 안 하신 거 같은데 그러다 후회하실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문제의 발언에 대해 질문을 받은 송현민이 박유성을 대신해 일침을 놓자 야디에르 모르니 감독이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쏭의 플레이를 좋아합니다. 올 시즌 쏭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습을 전부 봤고요. 오늘 인터뷰에 쏭이 나온다고 해서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썬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했다고 얘기해주고 싶네요.”

메이저리그 레전드들에게 경솔했다는 지적을 받아서일까.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은 최대한 마찰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과 함께 나온 카를로스 마틴과 호세 로페즈는 달랐다.

“우리는 지난 4번의 대회에서 전부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아니죠.”

“대한민국은 지난 LA 올림픽 우승국입니다. 푸에르토리코는 올림픽 본선에 참가하지 못했고요.”

“푸에르토리코는 자국 리그 선수들로 올림픽 예선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좋지 않았죠. 하지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다릅니다. 우리와 견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입니다.”

“푸에르토리코는 최근 국제 대회 결승에서 미국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전 대회에서 미국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죠.”

특별히 선을 넘는 발언은 없었지만.

양 팀 대표 선수들의 입씨름이 계속되면서 기삿거리가 풍성해졌다.

그리고 송현민은 쓸데없이 입을 털었다는 이유로 송광철에게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