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19화
27. 다시 만난 일본(하)(4)
장호영 캐스터의 재치 있는 설명에 채팅창으로 주작범이라는 채팅들이 쏟아졌다.
“아, 걔야?”
“아는 투수에요?”
“그 올림픽 때 있잖아. 일본이 베네수엘라한테 일부러 져줬거든. 조 1위 해봐야 4강에서 미국을 만나게 될 거 같으니까 베네수엘라 1위 하라고 등 떠밀었는데 그때 점수 내준 투수가 얘야.”
박명철은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하고많은 투수들 중에 하필 미야기 하사토가 나왔으니 이대로 역전을 할 것 같았다.
“후우…….”
타석에 들어선 송현민도 한결 마음이 편했다.
동점이 된 상황에서 니키타 쇼우가 내려가고 오른손 투수가 올라왔으니 부담감이 확 줄어들었다.
첫 타석 때 투런 홈런을 때려내긴 했지만 니키타 쇼우는 메이저리그에서 2년 연속 10승을 거둔 투수였다.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은 다소 단조로운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만들지 못하면 에이스급 투수로 성장하기 어려울 거라고 내다봤지만.
그걸 뒤집어 말하자면 단조로운 레퍼토리만으로도 평균 이상을 해냈다는 의미였다.
박유성이 센스 있는 주루 플레이로 3루를 파고들었을 때 송현민은 머릿속으로 외야 플라이를 그렸다.
앞서 초구를 건드려 유격수 땅볼을 쳤던 민병규가 적시타를 때려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박유성에게 멘탈이 갈려 버린 니키타 쇼우가 한복판으로 빠른 공을 던졌고 그걸 민병규가 놓치지 않고 잡아당기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0대 0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가자. 서두를 필요 없어. 니키타 쇼우가 내려갔으니까 이제부터는 할 만해.”
일본 대표팀이라고 해서 메이저리그에서 성적을 내는 투수를 다수 보유한 건 아니었다.
이름값으로 주눅이 들 만한 선수는 마츠다 유이토와 니키타 쇼우 뿐이었다.
그 이외에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투수들은 자국 리그 투수들에게 밀려 이번 일본 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했다.
마츠다 유이토가 8강전을 포기하고 구원등판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8강 진출을 확정 지은 상황에서 그런 무리수를 둘 리는 없었다.
반면 대한민국 대표팀 라인업에는 오늘 경기를 지배하고 있는 박유성이 버티고 있었다.
“유성이가 앞으로 두 번은 더 나올 거야. 기회는 많으니까 천천히 하자.”
느긋하게 루틴을 마친 송현민이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동점과 함께 에이스 투수를 강판시켰으니 이제 급해진 건 일본 대표팀이라 여겼다.
실제로 미야기 하사토는 제대로 몸을 풀지도 못하고 마운드로 불려 나왔다.
박유성에게 3루 도루를 허용한 순간 불펜으로 뛰어가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치고 공을 하나 던졌는데 곧바로 연락이 온 것이다.
부족한 불펜 피칭을 연습구로 대체하려 했지만.
느긋하게 워밍업을 하는 것과 곧바로 실전 투구에 들어가는 건 차이가 컸다.
-초구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납니다.
-확실히 몸이 덜 풀린 것 같은데요. 포심 패스트 볼의 구속이 143㎞/h밖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미야기 하사토 선수도 최고 155㎞/h까지 던질 수 있는 투수인데요. 3월에 열리는 대회인 걸 감안하더라도 구속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한일전의 긴장감에 어울리지 않는 터무니없는 초구에 대한민국 벤치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야, 저거?”
“완전히 쫄았는데?”
“우리 조카가 던져도 저것보단 빠르겠다.”
“형 조카가 몇 살인데요?”
“중학생인데 키가 벌써 나만 해.”
박준수를 비롯해 오늘 안타를 치지 못한 타자들은 자신의 타석까지 미야기 하사토가 버텨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송현민의 방망이가 불을 뿜었다.
“후우…….”
초구에 이어 2구째 던진 체인지업까지 바깥쪽으로 빠지자 송현민은 길게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빠른 공, 하나만 생각했다.
제구가 되지 않는 투수가 투 볼 상황에서 던질 수 있는 공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쓰리 볼로 몰리면 볼카운트 싸움이 절대적으로 불리해지기 때문에 어떻게든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 터.
‘결국 포심 아니면 포크볼인데…… 포크볼을 던질 배짱은 없겠지.’
마츠다 유이토쯤 되는 투수라면 쓰리볼이 될 각오로 유인구를 던지겠지만 미야기 하사토는 그 정도로 대담하지 못했다.
그 예상대로 미야기 하사토의 손끝을 빠져나온 3구는 한복판으로 몰리듯 들어왔고.
따악!
송현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공을 잡아당겨 다시 한번 도쿄 돔을 침묵에 빠뜨렸다.
-아아, 큽니다.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건 넘어갔어요.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하지만 우익수는 이 타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홈런! 투런! 대한민국의 3번 타자 송현민 선수가 1회에 이어 3회에도 투런포를 쏘아 올립니다!
요란스럽게 그라운드를 돈 송현민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병규, 김하선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그러고는 환호하는 대표팀 선수들을 지나 박유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봤냐?”
“투수를 바꾸는 게 아니었는데…….”
“뭐래, 인마. 니키타 쇼우였어도 똑같았어.”
“과연 그럴까요?”
“짜식이 좀 친다고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그보다 들어오면서 일본 관중하고 눈 마주쳤는데 살벌하더라.”
“한일전이잖아요. 가위바위보조차 지면 안 된다는 한일전. 제가 관중이었더라도 짜증 나죠.”
4대 3으로 겨우 뒤집었던 경기가 6대 4로 다시 뒤집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본 관중들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다.
설상가상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김하선이 백투백 홈런을 때려내고 바뀐 투수를 상대로 기정후와 감백호, 박준수까지 연속 안타를 때려내자 관중석에서 야유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집어치워!”
“이 멍청이들아!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웃 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몇 점을 내주는 거야!”
“아나바! 사퇴해! 넌 사무라이 제팬을 이끌 자격이 없어!”
성난 홈 관중들을 달래기 위해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은 다시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
그리고 바뀐 투수 요시카와 카이토가 박경호와 박찬희를 각각 2루수 뜬공과 병살타로 유도하면서 길고 길었던 3회 초를 끝냈다.
“괜찮아. 아직 경기 초반이야. 한 두 점씩 따라가다 보면 역전할 수 있어.”
3회 말 공격에 앞서 야마카와 겐스케가 동료 선수들을 불러모으고 파이팅을 주문했다.
5점까지 벌어진 점수를 쫓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도쿄 돔을 가득 채운 일본 관중들 앞에서 다른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에게 대패하는 건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한국도 임찬기가 내려갔어.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다고!”
일본 대표팀의 간판타자인 곤도 타쿠야도 한마디 보탰다.
그러고는 임태규를 상대로 추격의 솔로포를 때려내면서 경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역시 일본은 만만치 않다니까.”
야마카와 겐스케의 2루타와 가이 호타카의 적시타로 일본 대표팀이 3점 차까지 따라붙자 박유성도 가만있지 않았다.
따악!
4회 초 선두 타자로 나와 요시카와 카이토의 초구를 잡아당겨 담장 밖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이번 홈런으로 박유성 선수가 4경기 연속 3안타 행진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도 단타가 빠진 히트 포 더 사이클인데요. 남은 타석에서 일본 투수들이 승부를 해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이후에도 대한민국 대표팀과 일본 대표팀은 주거니 받거니 추가점을 올렸다.
5회 말, 일본 대표팀이 코다 요시히로의 2루타와 곤도 타쿠야의 적시타, 도노사키 료마의 2루타로 10대 8까지 따라붙자 대한민국 대표팀도 민병규의 적시타로 한 점을 도망쳤고.
7회 말, 곤도 타쿠야가 추격의 투런포를 때려내기가 무섭게 8회 초 박준수도 솔로 홈런으로 응수했다.
12대 10으로 두 점을 앞선 8회 말.
강기태 감독은 자이언츠의 수호신, 김재신을 마운드에 올렸고.
추가 실점을 막으라는 중임을 밭은 김재신이 6번 타자 가이 호타카와 7번 타자 구와하라 세이지, 8번 타자 우에바야시 마사유키를 각각 유격수 앞 땅볼과 중견수 플라이,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일본의 흐름을 끊어 놓았다.
-역대 한일전 중에 오늘처럼 뜨거웠던 경기가 또 있을까 싶은데요. 이제 9회 초, 대한민국 대표팀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이 시작됩니다.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선두 타자로 나선 송현민은 일본 대표팀의 불펜 에이스라 불리는 야부타 슈타의 포크 볼을 잡아당겨 다시 한번 담장을 넘겨 버렸다.
그리고 3타수 3안타 2볼넷으로 맹활약한 박유성을 대신해 경기 MVP에 뽑혔다.
“오늘 대한민국의 해결사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는데요. 비결이 있을까요?”
“앞에서 유성이가 경기를 풀어줘서 편하게 타격에 임했던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오늘 많은 선수들이 고생했지만 송현민 선수 다음으로 잘했던 선수, 한 명을 꼽아주신다면요?”
“제 다음이요? 그럼 유성이는 아닌데. 사실 저는 제가 왜 MVP를 받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경기 MVP는 경기 직후 주최 측에서 선정한다.
일본에서 치르는 B조 조별 리그의 경우 일본 야구 협회에서 선정하는데 결승타를 포함해 5타수 3안타에 3홈런 5타점 3득점을 올린 송현민은 MVP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송현민의 생각은 달랐다.
“어려운 순간마다 유성이가 경기를 풀어줬습니다. 유성이가 아니었다면 오늘 경기를 이기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일본 대표팀의 간판 타자인 곤도 타쿠야도 일본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박유성을 언급했다.
“오늘 경기 패인이요? 그건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나요? 우리는 박유성을 막지 못했습니다. 박유성에게 안타 빠진 사이클링 히트를 내줬죠. 박유성은 오늘 경기에서 5타석 모두 출루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4번 홈을 밟았죠. 이번 대회에서 다시 한국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다시 맞붙게 된다면 박유성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박유성을 막지 못하면…… 한국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최종 스코어 13대 10으로 일본 대표팀을 잡아내고 조별 리그 전승을 거둔 대한민국 대표팀은 B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4일 후 펼쳐진 8강전에서 18안타를 때려내며 이스라엘을 12대 0으로 대파하고 쿠바를 잡아낸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4강을 확정지었다.
4강전 상대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13대 9로 꺾고 올라온 푸에르토리코.
“현시점에서 미국 대표팀이 세계 최강이긴 하지만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의 전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임찬기 선수가 얼마만큼 해주느냐가 관건입니다. 일본전은 잊고 심기일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푸에르토리코는 4회 연속으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을 차지한 강팀입니다. D조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1위를 차지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 언론들은 푸에르토리코 경계령을 내리며 상대를 추켜세웠지만.
정작 메이저리그 레전드 출신인 푸에르토리코 감독 야디에르 모리나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을 넘는 발언을 내뱉었다.
“대한민국 대표팀 중에 경계해야 할 선수요? 글쎄요. 키나 캄, 쏭 정도? 썬이요? 그게 누구죠? 메이저리그 선수인가요?”
질문을 던진 기자가 LA 올림픽 MVP라고 설명해주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박유성의 이름까지 포함시켜 줬지만.
해당 영상을 본 국내 야구팬들은 푸에르토리코를 꼭 잡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며 이를 갈았다.
ㄴ직전에 열린 LA 올림픽 우승국을 무시한다고? 이게 맞아?
ㄴ팩트 : 푸에르토리코는 도미니카 공화국에게 밀려 LA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ㄴ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만 득달같이 달려드는 포상금 사냥꾼 놈들이 혓바닥이 기네.
ㄴ그런데 야디에르 모리나가 모를 만도 한 게 푸에르토리코는 주전 전원이 메이저리그 선수들이라;;;
ㄴ이치이로 망발 vs 야디에르 모리니 망발. 어느 쪽?
ㄴ이건 닥전이지.
ㄴ이치이로 발언은 대한민국 야구를 무시한 거라 비교가 안 됨.
ㄴ그런데 이거 와전됐다고 하지 않았음?
ㄴ와전된 건 맞지만 한국 야구 무시한 것도 맞음. 30년간은 감히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하게 박살 내야 한다는 소리였음.
ㄴ야디에르 모리나의 박유성 무시도 짜증 나지만 이치이로는 못 이김.
ㄴ이런 거 일일이 대응할 필요 없음. 일본 대표팀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박유성 신경 안 쓴다고 했음.
ㄴ그리고 박유성 맛을 제대로 봤죠. ㅋㅋㅋ
ㄴ그냥 메이저리그 선수가 아니라서 무시한 거 같은데?
ㄴ노노. 그런 거 아님. 메이저리그 언론들도 박유성 때문에 한국을 다크호스로 꼽고 있는데 핸드폰 요금 못 내서 세상 돌아가는 거 모르지 않는 이상은 일부러 도발한 거 맞음.
ㄴㅋㅋㅋ 무슨 핸드폰 요금 미납드립까지 나오냐.
야디에르 모리나 감독의 발언을 전해 들은 박유성은 푸에르토리코와의 경기 때 실력으로 보여주겠다는 말로 각종 야구 커뮤니티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흘 후.
올림픽 결승 무대였던 다저스 파크에서 대한민국 대표팀과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의 4강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