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16화
27. 다시 만난 일본(하)(1)
3
3 대 0으로 이기고 있던 경기가 순식간에 4 대 3으로 뒤집혔을 때 더그아웃의 풍경은 어떨까.
그것도 가위바위보조차 져서는 안 된다는 한일전라면 서로 눈치를 보느라 숨조차 편하게 쉬기 어려웠다.
먼저 마운드를 내려간 임찬기는 고개를 숙인 채 죄인처럼 구석에 앉아 있었다.
고참 선수들이 다가가서 괜찮다고 다독여 줬지만 땅으로 처박힌 얼굴을 쉽게 들지 못했다.
‘진짜 후배였다면 가서 꿀밤을 먹이는 건데.’
박유성은 그런 임찬기가 한심스러웠다.
1회부터 삐그덕거렸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1회를 잘 막아놓고 2회에 와르르 무너지면 야수 입장에서는 한숨만 나왔다.
아마 임찬기도 자신이 경기를 망쳤다고 자책하고 있겠지만.
경기 후반도 아니고 아직 경기 초반인데 저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다른 선수들도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박유성은 고개를 돌려 김하선을 바라봤다.
이럴 때는 주장이자 팀의 최고참인 김하선이 따끔하게 한마디 해줘야 했다.
하지만 김하선도 소속팀 후배가 아닌 임찬기에게 세게 말하기가 애매했다.
언론에서는 좌완 에이스라고 추켜세워 주고 있지만 아직 임찬기는 어린 투수였다.
2005년생으로 만 24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서 임찬기보다 나이가 어린 선수는 박유성 한 명뿐이었다.
김하선도 지금의 상황이 못마땅하겠지만.
박유성이 들어오기 전까지 막내 소리를 들었던 임찬기에게 어른스러운 대처를 요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무겁게 한숨을 내쉬던 김하선은 박유성과 눈이 마주치자 냉큼 일어났다. 그러고는 박유성에게 다가와 말했다.
“유성아. 미안한데 네가 해줘야겠다.”
자신보다 15살이나 어린 대표팀 막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이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는 건 박유성뿐이었다.
만약 박유성이 야구 좀 잘하는 1회차 야구 선수였다면 자신이 뭔가를 해줘야 하는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웠겠지만.
프로 40년 차 박유성은 이런 상황을 숱하게 겪었다.
“무조건 나갈 테니까 형이 꼭 불러들여 주세요.”
“그래. 나까지 차례가 오면 안타 칠게.”
“약속하신 거예요?”
박유성은 씩 웃으며 방망이를 꺼내 잡았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왼쪽 타석으로 들어섰다.
-3회 초 대한민국의 공격은 1번 타자 박유성 선수부터 시작됩니다. 이번 대회 타율은 10할. 첫 타석 안타를 포함해 10타수 10안타를 기록 중입니다.
-1회 초 선취점은 박유성 선수가 혼자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박유성 선수가 다시 한번 안타를 때려내서 동점의 발판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팅창으로 대한민국 야구 팬들의 염원이 쏟아졌다.
└제발 박유성!
└유성아! 해줘!
└진짜 여기서 흐름 끊어야 해.
└유성아. 너만 믿는다!
└나는 믿을 거야. 유성이 믿을 거야.
└볼넷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가자 유성아!
박유성도 TV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야구 팬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선두 타자의 출루였다.
동점 홈런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일단 루상에 나가서 니키타 쇼우가 피칭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괴롭힐 필요가 있었다.
‘욕심부리지 말고 존 안에 들어오는 것만 치자.’
천천히 루틴을 실행하면서 박유성은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앞서던 경기가 뒤집히고 나서 타석에 들어서면 점수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이 조급해지게 마련이었다.
프로 40년 차인 박유성도 조바심이 생기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평소보다 방망이를 두 바퀴 더 돌리면서 마음을 다잡았는데 그런 행동이 구와하라 세이지에게는 위험 신호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첫 타석보다 분위기가 진지해.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나온 것 같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어.’
구와하라 세이지가 박유성을 처음 상대한 건 지난 LA 올림픽 4강전때였다.
당시 도쿄 자이언츠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마츠다 유이토와 호흡을 맞췄는데.
메이저리그에서 스플리터로 대체했던 포크 볼을 기습적으로 꺼내 들었지만 박유성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날 경기에서 박유성에게 3루타만 3개를 얻어맞았고.
두 번의 득점을 허용하면서 일본 대표팀의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그래서 절치부심 다시 맞붙을 날만을 기다려 왔는데 오늘도 첫 타석부터 3루타를 내주고 말았다.
니키타 쇼우와 오늘 경기에 대해 준비하면서 박유성을 과대평가하지 말자고 약속했지만.
지금까지 박유성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에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박유성이 다시 선두타자로 나와 이를 갈고 있으니 볼배합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일단은…… 하나 빼자.’
구와하라 세이지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상기된 얼굴로 마운드에 서 있던 니키타 쇼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초구부터 볼이라니. 너무하잖아.’
비록 1회에 3점을 내줬지만.
니키타 쇼우는 2회 초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기세를 끌어올린 상태였다.
그런데 박유성이 타석에 서기가 무섭게 레퍼토리가 바뀌니까 메이저리그 투수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니키타 쇼우는 고개를 가로젓지 못했다.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타자들의 분전으로 겨우 기사회생했는데 또다시 자신의 고집만 앞세울 수는 없었다.
“한 점을 지키자. 니키타. 이 리드를 끝까지 지켜야 해.”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중얼거리며 니키타 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구와하라 세이지의 미트를 향해 정확하게 빠른 공을 찔러 넣었다.
-초구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났습니다.
타석에서 한 발 물러난 박유성은 전광판의 구속을 확인했다.
‘149라. 그럼 의도적으로 하나를 뺐다는 거네.’
최고 161㎞/h의 빠른 공을 던지는 것으로 알려진 니키타 쇼우의 오늘 경기 평균 구속은 154㎞/h 정도.
시즌 전에 열리는 대회이다 보니 확실히 100퍼센트 컨디션은 아니었다.
그래도 152㎞/h 밑으로 구속이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온 3회에 3㎞/h가 빠졌다는 건 그만큼 신중하게 던졌다는 방증이었다.
첫 타석의 초구처럼 그저 빠르기만 한 공을 던졌다면 가볍게 흘려내고 말았을 테지만.
방금 들어온 공은 박유성이 마지막 순간까지 타격을 두고 고민하게 만들었다.
매 타석마다 100이라는 집중력이 주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이 공을 걸러내느라 10 이상의 집중력을 소모한 셈이었다.
하지만 프로 40년 차 박유성은 초구만 보고 일본 배터리의 의도를 파악했다.
‘좋은 공은 주지 않겠다라. 그럼 골라 나가야 하나?’
다시 루틴을 펼치며 박유성은 잠시 고민했다.
출루라는 목표를 두고 봤을 때 이대로 까다롭게 볼을 골라서 1루를 밟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런 박유성에게 3루수 가이 호타카의 수비 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 발 빠른 타자가 타석에 서면 1루수와 3루수가 기습 번트에 대비해 수비 라인을 당기게 마련인데 가이 호타카는 반대로 베이스라인 뒤쪽으로 물러나서 3유간으로 빠지는 타구에 대비하고 있었다.
‘설마 내가 기습 번트를 댈 거라는 생각을 안 하는 건가?’
방망이를 가볍게 휘둘러 어깨에 걸치며 박유성은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공이 들어오면 과감하게 때린다.
그리고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볼이 들어온다면 3루 쪽으로 기습번트를 시도한다.
안타 여부를 떠나 어느 쪽이든 기세를 잡은 일본 대표팀을 움찔하게 만들 수 있을 터.
‘제발 칠 만한 공 좀 던져라.’
투구 준비에 들어간 니키타 쇼우를 보며 박유성이 간절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니키타 쇼우가 던진 공은 초구보다 더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2구도 볼. 볼 카운트가 투 볼로 바뀝니다.
-이번 공은 커터였는데요. 제구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앞선 첫 타석 때도 투 볼로 시작했었는데요. 두 번째 타석에서도 박유성 선수가 볼카운트 싸움을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박유성의 파울을 유도하기 위해 요구한 공이 빠져버리자 구와하라 세이지도 고민이 많아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과감하게 몸 쪽으로 포크 볼을 붙여볼까? 아니야. 그래도 아직 범타로 유도할 기회가 남아 있으니까 다시 한번 바깥쪽으로 가자.’
본래 계획은 1회 때 던지지 못했던 포크 볼을 유인구 삼아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간 뒤에 바깥쪽 빠른 공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었지만.
구와하라 세이지는 계획을 바꿔 바깥쪽 슬라이더를 주문했다.
코스는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만에 하나 박유성이 반응하지 않으면 프레이밍으로 어떻게든 스트라이크 존에 욱여넣을 생각이었다.
사인을 확인한 니키타 쇼우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대로 몸쪽 승부를 걸었다가 1회 초의 결과가 재현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니키타 쇼우가 투구에 들어가자 박유성도 미리 오른발을 떼어 앞쪽으로 내디뎠다.
본래라면 공이 손끝을 빠져나온 다음에 타격 여부를 결정했겠지만.
여차하면 기습 번트를 댈 생각이라 먼저 준비를 끝내놓아야 했다.
그사이 니키타 쇼우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한복판을 지나 바깥쪽으로 움직였고.
‘슬라이더!’
구종까지 파악이 끝난 박유성은 그대로 자세를 낮춰 번트를 댔다.
희생 번트는 타구의 숨을 죽여서 선행주자가 잡히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지만 기습 번트는 달랐다.
기습 번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타가 될 만한 코스로 타구를 굴리는 것.
그 과정에서 타구가 뜨더라도 빈 공간으로 떨어뜨리기만 하면 얼마든지 출루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유성은 1회차 때 내야 안타만 408개를 때려냈다.
그중 기습 번트 안타의 비율은 30퍼센트 정도.
최소 120개 이상의 기습 번트를 성공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다 보니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듯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3루 쪽으로 굴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딱.
박유성이 방향만 바꾼 공이 3루 라인 선상을 타고 구르자 포수 구와하라 세이지와 3루수 가이 호타카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러자 박유성과 타구를 번갈아 바라보던 니키타 쇼우가 다급히 소리쳤다.
“잡지 마!”
3루 베이스 뒤쪽에 있던 가이 호타카가 타구 앞에 도착하기 전에 박유성은 이미 1루까지 절반을 내달린 뒤였다.
그렇다면 무리해서 송구를 하기보다 타구가 빠져나가길 바라는 게 낫다고 여겼다.
니키타 쇼우의 외침에 가이 호타카와 구와하라 세이지가 공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본래라면 둘 중 한 명은 자리를 비켜줘야 했지만.
둘 다 공만 쫓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1루로 내달리며 일본 내야수들의 움직임을 체크한 박유성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아, 박유성 선수가 1루를 지나 2루로 내달립니다! 2루에서! 2루에서 세이프!
-하하. 이건 진짜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지금 이선철 해설위원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빠른 발로 다시 한번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2루를 파고든 박유성은 벨트에 박힌 흙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양팔을 들어 올리며 2루심에게 타임을 요청했다.
“젠장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니키타 쇼우는 신경질적으로 로진백을 걷어차 버렸고.
새하얀 로진 가루가 마치 축하의 꽃가루처럼 사방에 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