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15화
27. 다시 만난 일본(상)(4)
2
“니키타. 더 던질 수 있겠어?”
송현민에게 투런 홈런을 맞은 직후.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언론은 니키타 쇼우와 마츠다 유이토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질을 하는 게 취미지만.
일본 대표팀 감독 입장에서는 니키타 쇼우보다 마츠다 유이토에게 더 믿음이 갔다.
마츠다 유이토는 어떤 경기라도 믿고 맡길 수 있는 투수인 반면 니키타 쇼우는 컨디션에 따라 기복이 심한 스타일.
만약에 실점에 납득하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바꾸려고 했는데 정작 니키타 쇼우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 실점하지 않겠습니다.”
“괜찮겠어?”
“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 말을 지키듯 니키타 쇼우는 4번 타자 김하선과 5번 타자 기정후, 6번 타자 감백호를 범타로 돌려세우고 길었던 1회 초를 끝냈다.
그리고 2회 초에는 박준수와 박경호, 박찬희를 전부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페이스를 끌어 올렸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일본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를 내려가는 니키타 쇼우를 보며 임찬기는 승부욕을 불태웠다.
1회 말을 삼자범퇴로 잘 막긴 했지만 탈삼진이 없었는데 니키타 쇼우가 갑자기 닥터 K 모드로 전환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일본 대표팀의 공격은 4번 타자 야마카와 겐스케 선수부터 시작합니다. 1997년생으로 만 31세. 도쿄 자이언츠에서 12년째 뛰고 있는 선수입니다.
-일본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죠. 우리나라로 치면 김하선 선수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김하선 선수와 달리 야마카와 겐스케 선수는 메이저리그 경험이 없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여러 차례 오퍼가 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일본 프로 야구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조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해외 진출을 포기한 것으로 유명하죠.
-지난해 올림픽에서는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만 리그에서는 MVP급 활약을 펼쳤습니다. 0.331의 타율에 37개의 홈런과 118타점을 기록했고 제팬 시리즈 MVP까지 거머쥐었습니다.
-올해 도쿄 자이언츠와 무려 8년간의 재계약을 맺었죠?
-4+4년 계약이긴 하지만 일본 언론에서는 사실상의 종신 계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요. 워낙에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선수라 두 번째 4년 계약도 자동 연장될 거란 예상이 많습니다.
2016년 도쿄 자이언츠에 입단한 야마카와 겐스케는 2018년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았다. 그리고 첫 타석에서 역전 홈런을 쏘아 올리며 지금껏 도쿄 자이언츠의 1루 자리를 든든히 지키는 중이었다.
해외 진출도 마다하고 팀을 위해 헌신하는 야마카와 겐스케를 위해 도쿄 자이언츠는 지난 2025년 4년 총액 30억 엔이라는 거금을 안겨주었다.
한화로 따지면 288억.
연평균 72억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야마카와 겐스케는 이 엄청난 계약에도 만족을 하지 않았다.
목표였던 개인 최고 연봉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진해서 다음 계약 때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일부 언론들은 30억 엔이라는 파격적인 대우에도 만족하지 못한다며 야마카와 겐스케를 비난했지만 야마카와 겐스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성실한 4년을 보냈다.
그 결과 8년(4+4) 50억 엔이라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계약을 받을 수 있었다.
흔히들 일본 대표팀의 간판 타자로 곤도 타쿠야를 꼽지만.
일본 프로 야구 최고의 명문 구단인 도쿄 자이언츠에서 종신 계약을 받아낸 야마카와 겐스케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타자였다.
그래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안방마님 박경호는 초구에 바깥쪽 사인을 냈다.
오늘 임찬기의 빠른 공과 슬라이더가 위력적이긴 하지만 야마카와 겐스케를 상대로 성급하게 승부를 걸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임찬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하러 공을 버려요?”
임찬기가 특유의 똥고집을 부리자 박경호도 한숨을 내쉬었다.
송찬우였다면 어떤 사인을 내더라도 군말 없이 따라와 줬을 테지만 임찬기는 이런 상황에서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 3점을 앞서가고 있으니까.’
임찬기에게 맞춰주기로 마음먹은 박경호는 몸 쪽 낮은 코스의 빠른 공을 주문했다.
야마카와 겐스케가 좌투수의 공을 잘 공략해 낸다 하더라도 무릎 앞쪽을 파고드는 155㎞/h짜리 공을 쉽게 공략하지는 못할 거라 여겼다.
“경호 형. 이런 걸 원했다고요.”
사인을 확인한 임찬기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초구에 비해 코스가 까다로워졌지만 상관없었다.
야마카와 겐스케를 시작으로 도노사키 료마와 가이 호타카를 삼진으로 잡아내려면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했다.
이 공을 과감하게 찔러 넣어야 주도적으로 승부를 끌고 갈 수 있었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른 임찬기가 빠른 템포로 투구판을 박찼다.
그런데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너무 낮게 날아갔다.
“젠장할.”
야마카와 겐스케가 그대로 초구를 걸러내자 임찬기는 재차 고집을 부렸다.
박경호의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거부하고 다시 한번 몸 쪽 빠른 공 사인을 받아낸 것이다.
“느낌이 쎄한데?”
센터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유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1회 초에 3점을 뽑아냈고 1회 말을 삼자범퇴로 틀어막았으니 경기 분위기만 유지해도 될 거라 여겼는데 임찬기가 갑자기 불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마운드로 뛰어가 집중하라고 조언할 수도 없는 노릇.
박유성은 만약을 대비해 수비 위치를 조금 뒤쪽으로 물렸다.
하지만 임찬기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은 시작부터 완전히 빠졌고.
야마카와 겐스케는 거의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피하기 위해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2구도 볼. 임찬기 선수의 제구가 갑자기 흔들리고 있습니다.
-임찬기 선수. 침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는데 뭔가 밸런스가 무너진 느낌입니다.
-앞서 니키타 쇼우 선수의 탈삼진 쇼에 자극을 받은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금 3 대 0으로 앞서가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숨을 크게 고르고 조금 더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순철 해설위원의 말이 들렸던지 박경호도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한번 고르라고 주문했고.
임찬기도 가볍게 어깨를 털며 긴장을 풀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3구도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다.
이번에는 박경호의 요구대로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졌지만.
마지막 순간에 살짝 삐져나간 공을 구심이 인정해 주지 않았다.
-아, 이 공까지 빠집니다.
-이 공은 잡아줄 만했는데요. 앞서 니키타 쇼우 선수 때도 그랬지만 오늘 구심이 바깥쪽 공에 인색한 것 같습니다.
-야마카와 겐스케 선수는 이번에도 공을 지켜봤는데요.
-볼 카운트에 여유가 있어서 하나 지켜본 것 같은데요. 덕분에 볼카운트가 더 유리해졌습니다.
-이 상황을 임찬기 선수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글쎄요. 일단 스트라이크를 잡아야겠지만 그렇다고 정직하게 승부해서는 안 됩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까다롭게 승부해야 합니다.
박경호는 다시 한번 바깥쪽 꽉 찬 슬라이더를 주문했다.
하지만 볼넷에 대한 부담을 느낀 임찬기는 박경호가 원하는 대로 공을 던져주지 못했고.
야마카와 겐스케는 거의 한복판으로 몰려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놓치지 않았다.
따악!
야마카와 겐스케가 힘껏 잡아당긴 공은 그대로 우중간으로 뻗어 나갔다.
타격과 동시에 박유성이 스타트를 끊었지만 타구가 너무 빨라서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다.
“유성아! 2루!”
펜스를 원바운드로 때리고 튕겨 나온 타구를 잡기가 무섭게 박유성은 2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공이 2루로 송구됩니다. 야먀카와 겐스케 선수도 2루에서 멈춥니다.
-발이 빠른 타자였다면 3루까지도 노려볼 만한 코스였는데 일단 박유성 선수가 타구를 잘 처리했습니다.
강기태 감독은 다급히 마운드로 봉정근 투수 코치를 보내 임찬기의 상태를 체크했다.
“찬기야. 3점 차이니까 2루 주자는 신경 쓰지 말고 타자에 집중하자. 알았지?”
“네. 코치님.”
“괜찮으니까 편하게 던져. 편하게.”
봉정근 투수 코치는 임찬기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력했고.
임찬기는 5번 타자 도노사키 료마를 중견수 뜬공으로 돌려세우며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하지만 6번 타자 가이 호타카에게 초구에 몸 쪽 빠른 공을 붙였다가 1루수 옆을 빠지는 안타를 허용하면서 첫 실점을 하고 말았다.
임찬기가 좌타자에게 연속해서 안타를 얻어맞자 스위치 히터 구와하라 세이지는 일부러 왼쪽 타석으로 들어갔다.
“뭐야? 찬기 형 상대로 왼손으로 친다고? 찬기 형이 물로 보이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유성은 어이가 없었다.
스위치 히터의 장점은 상대 투수에 따라 맞춤 타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좌투수를 상대로는 오른쪽 타석에 들어서는 게 기본인데 구와하라 세이지는 과감하게 왼쪽 타석에 섰다.
“찬기 형!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던져요. 이쪽으로 오는 건 내가 다 잡을게요.”
구와하라 세이지의 타격 스타일을 고려해 박유성은 우익수 쪽으로 몇 걸음 옮겨 자리를 잡았다.
비록 제구가 흔들리긴 하지만 오늘 임찬기의 공은 나쁘지 않았다.
힘은 좋지만 정교함이 떨어지는 구와하라 세이지가 몸 쪽 공을 억지로 잡아당겨 봐야 멀리 뻗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구와하라 세이지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임찬기를 상대로 한 점을 쫓아간 상황에서 클린업도 아닌 7번 타자가 장타에 욕심을 낼 수는 없는 노릇.
임찬기의 2구가 바깥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자 구와하라 세이지는 가볍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따악!
방망이 끝에 걸린 타구는 유격수 박찬희와 좌익수 감백호의 사이에 뚝 떨어졌다.
-가이 호타카 선수가 홈을 밟습니다. 스코어 3 대 2. 일본 대표팀이 한 점 차까지 추격했습니다.
-임찬기 선수. 아까부터 계속 얘기했습니다만 너무 급합니다. 지금도 박경호 선수는 공을 빼라고 주문을 했거든요? 그런데 초구가 볼이 되니까 억지로 스트라이크 존으로 공을 밀어 넣다가 얻어맞고 말았습니다.
봉정근 코치에 이어 포수 박경호가 마운드로 올라와 임찬기를 진정시켰고.
박유성도 제자리에서 글러브를 두드리며 임찬기를 독려했다.
“괜찮아요. 형. 아직 한 점 앞서고 있으니까 편하게 던져요. 편하게.”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을 통틀어 일본 대표팀과 편하게 경기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3점 차 이내의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고.
그때마다 조금 더 집중하는 팀이 승리를 가져갔다.
지난 LA 올림픽 때도 마츠다 유이토를 상대로 진땀승을 거뒀으니 점수 차이가 좁혀진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우에바야시 마사유키가 힘껏 잡아당긴 타구가 도쿄 돔의 가장 가까운 담장을 살짝 넘어가면서 경기가 정말로 이상해져 버렸다.
-우에바야시 마사유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는 역전 투런을 때려냈습니다!
-정말 잘 쳤습니다. 일본의 근성을 보여주는 타격이었어요!
-한국의 임찬기, 지금 망연자실한 표정인데요. 박유성은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지네요.
-보나 마나 반쯤 넋이 나가 있을 겁니다. 3 대 0으로 이기던 경기가 순식간에 4 대 3으로 뒤집혔으니까요.
-이제 이 점수를 니키타 쇼우가 지켜주기만 하면 됩니다.
-한국을 상대로 3점이면 줄 점수는 다 준 셈이니까요. 니키타 쇼우도 마음 편히 던지면 됩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강기태 감독은 서둘러 투수를 교체했고.
구원 등판한 임태규가 9번 타자 나시모토 준야와 1번 타자 코다 요시히로를 처리하면서 길었던 2회 말이 끝났다.
그리고 3회 초.
박유성이 다시 한번 선두타자로 타석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