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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214화 (214/412)

타자 인생 3회차! 214화

27. 다시 만난 일본(상)(3)

“크아아아!”

구심이 양팔을 벌리기가 무섭게 박유성이 벌떡 일어나 포효했다.

구와하라 세이지가 마지막까지 홈플레이트를 가로막아서 살짝 위험할 뻔했지만.

프로 40년 짬이 무서운 게 그 상황에서도 파고들 틈이 보였고 그 틈을 향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태그 했어요. 태그 했다고요!”

일본 대표팀 포수 구와하라 세이지가 먼저 태그를 했다며 구심에게 항의했지만.

일부러 구심이 잘 볼 수 있도록 홈플레이트를 팔로 쓸다시피 했으니 판정이 번복될 리 없었다.

“태그 연습 좀 더 해야겠더라.”

씩씩거리는 구와하라 세이지에게 한마디 해준 뒤 박유성은 천천히 3루 쪽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심장 아파 죽는 줄 알았네. 어떻게 그걸 뛰냐?”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송현민이 잔소리를 했지만 박유성은 씩 웃었다.

“에이, 형. 저 박유성이에요.”

“어휴. 이 얄미운 놈.”

송현민과 가볍게 주먹을 부딪치고 박유성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유성아, 잘했다!”

“역시 박유성! 해줄 줄 알았다니까?”

“나이스 박유성!”

“오늘은 꼭 사이클링 히트 치자. 알았지?”

주루 플레이의 기본을 무시한 박유성에게 한마디 하려 했던 이용구 주루 코치는 쓰게 웃고 말았다.

무사 3루 상황이었다.

안타가 나오면 득점이고 희생타나 상대 실책, 하다 못해 느린 땅볼이 나오면 홈을 밟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전처럼 유격수 앞 땅볼이 나왔을 때 홈으로 뛰기보다 귀루를 선택해야 했다.

1사 이후에 안타를 기대하기 힘든 타자가 대기 타석에 서 있는 거라면 몰라도 무사에 송현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박유성의 저돌적인 플레이에 일본의 유격수 우에바야시 마사유키가 휘둘렸으니 망정이지 침착하게 공을 잡고 송구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박유성이 놓친 부분을 일러주려고 했건만.

박유성의 득점에 안도해하는 선수들의 표정을 보니까 어쩌면 박유성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무리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기태 감독과 추신우 수석 코치도 박유성의 적극성을 높이 평가했다.

“유성이 저 녀석, 이 악물고 내달리는 거 봤어?”

“네. 유성이도 100퍼센트 확신을 가지고 뛴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야구에 100퍼센트가 어디 있어? 가능성이 있으면 파고들어야지. 그게 야구잖아. 암튼 유성이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

“병규 녀석이 초구를 건드려서 분위기가 가라앉을 뻔했는데 다행입니다.”

강기태 감독은 물론이고 추신우 수석 코치도 방금 전 박유성의 홈 대시가 무모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득점이 인정됐으니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아웃이 됐다면 좋았던 분위기가 일본 쪽으로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3루로 귀루하는 게 최선은 아니었다.

민병규를 2번 타순으로 끌어올린 건 타격감이 좋아서였다.

박유성이 루상에 나가면 최소한 진루타는 때려줄 거라는 믿음으로 전진 배치 시킨 것이다.

그런 민병규가 초구를 건드려 땅볼로 물러나고 박유성이 3루에 묶이면 경기 흐름이 이상해진다.

다음 타자가 대한민국 대표팀의 간판 타자 송현민이라지만.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는 일본의 좌완 에이스 니키타 쇼우였다.

지난해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을 탄 송현민보다 한 해 앞서 신인왕을 거머쥔 선수였다.

제아무리 송현민이라 해도 니키타 쇼우를 상대로 적시타를 때려낸다는 보장이 없었다.

타격감이 좋았던 민병규가 바깥쪽 커터에 속아 땅볼을 쳤던 것처럼 송현민까지 범타로 물러나면 선취점을 올릴 기회가 무산될지 몰랐다.

경기의 판을 짜는 감독의 입장에서 내주지 말아야 할 점수를 내주는 것보다 짜증나는 건 뽑아야 할 점수를 뽑지 못하는 것이었다.

민병규와 클린업을 믿고 별도의 작전을 내지 않았는데 득점에 실패하면 그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유성이 기어코 홈을 파고들면서 좋았던 흐름을 지켜냈다.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림은 아니지만 어쨌든 선취점을 뽑아냈고.

니키타 쇼우와 일본 대표팀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게다가 본래라면 초구에 땅볼을 치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을 민병규가 2루까지 파고들었다.

“저 녀석은 언제 2루까지 들어간 거야?”

“유성이가 홈으로 뛰는 거 보고 런다운까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추신우 수석 코치가 민병규를 두둔했다.

전 소속팀 후배인 걸 떠나 박유성의 움직임을 보고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는 건 칭찬해 주고 싶었다.

덕분에 송현민도 한결 편한 마음으로 니키타 쇼우를 상대할 수 있었다.

-초구는 바깥쪽으로 크게 빠집니다. 원 볼.

-니키타 쇼우 선수 표정을 보니까 아직 실점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격수 쪽으로 구르는 땅볼을 보면서 주먹을 움켜쥔 장면이 나왔었는데요.

-유격수 땅볼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바깥쪽 승부를 걸었으니까요. 자신의 의도대로 모든 게 맞아떨어졌으니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슈퍼 루키, 박유성 선수가 과감한 홈 대시를 선택하면서 스코어가 1 대 0이 됐습니다.

-게다가 다시 무사 2루에 송현민 선수 타석이니까요. 어기서 안타를 허용하면 오늘 경기가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클 겁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니키타 쇼우 선수가 2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바깥쪽. 구심의 손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후우…….”

종이 한 장 차이로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을 보면서 송현민이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이번 공은 구심이 잡아줘도 할 말이 없었지만.

정작 구심은 팔을 쭉 뻗은 채로 버티는 구와하라 세이지를 무시해 버렸다.

“젠장할. 도대체 판정을 어떻게 하는 거야?”

구와하라 세이지의 입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를 만들고 몸 쪽에 포크 볼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투 볼이 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잠시 고민하던 구와하라 세이지는 구종을 바꿨다.

포크 볼에서 빠른 공으로.

송현민으로 1루를 채울 생각이 아니라면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니키타 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서 박유성에게 빠른 공으로 승부를 걸었다가 얻어맞은 게 떠오른 것이다.

공 하나로 민병규를 처리하고 박유성을 3루에 묶어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니키타 쇼우는 송현민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박유성이 LA 올림픽에서 맹활약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대표팀의 간판 타자는 송현민이었다.

2027년, 소속 팀에게 통합 우승을 안기며 리그 MVP와 한국 시리즈 MVP를 싹쓸이했고.

레인저스로 팀을 옮긴 작년에는 시즌 초반의 부진을 디디고 3할 타율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최근의 활약상만 놓고 봤을 때 송현민은 박유성보다 더 경계해야 할 타자.

니키타 쇼우도 송현민을 비롯해 메이저리그 3인방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뻔한 공은 안 돼. 가장 자신 있는 공으로 승부해야 해.’

니키타 쇼우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젓자 구와하라 세이지는 어쩔 수 없이 포크볼 사인을 냈다.

대신 코스는 몸 쪽이 아닌 바깥쪽.

몸 쪽 공에 대비하고 있을 송현민의 허를 찌르자는 이야기였다.

니키타 쇼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구와하라 세이지의 미트를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니키타 쇼우의 손끝에서 공이 빠져나오자 송현민은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코스를 떠나 이번 공은 때리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홈플레이트 앞에서 뚝 떨어진 공은 송현민이 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헛 스윙! 송현민 선수가 3구를 크게 헛칩니다.

-포크볼이었는데요. 정말 절묘하게 들어갔습니다. 송현민 선수 입장에서는 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니키타 쇼우 선수. 4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몸 쪽! 송현민 선수가 다시 한번 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만 타구는 1루 쪽 관중석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커터 같은데요. 송현민 선수는 빠른 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투 볼이었던 볼카운트가 단숨에 투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뀌자 도쿄 돔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박수를 쏟아냈고.

니키타 쇼우의 표정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반면 대한민국 대표팀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살짝 가라앉았다.

송현민이 투 볼을 골라낼 때까지만 해도 니키타 쇼우가 무너질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볼카운트의 균형을 맞춰 버렸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침착하게!”

고참 선수들이 계속해서 파이팅을 외쳤지만.

정작 타석에 들어선 송현민도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태였다.

그때 박유성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현민이 형! 포크 없어! 자신 있게!”

순간 니키타 쇼우가 투구판에서 발을 뺐다.

한국 대표팀에서 뭐라고 떠들든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포크 볼 사인이 나기가 무섭게 포크 볼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투구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구와하라 세이지도 포수 마스크를 고쳐 쓰며 생각을 정리했다.

박유성이 한국어로 떠들어서 정확하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곧바로 포크 볼로 승부를 보는 건 위험할 것 같았다.

그사이 송현민도 숨을 골랐다.

그렇지 않아도 포크 볼에 대한 부담이 컸는데 포크 볼을 던지지 않을 거라는 박유성의 외침을 듣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암튼 건방지다니까.”

다시 타석에 들어선 송현민은 포크 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대신 앞서 놓친 빠른 공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러다 설사 포크 볼에 헛스윙을 당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 송현민을 힐끔 바라본 구와하라 세이지는 바깥쪽 슬라이더 사인을 냈다.

포크 볼은 위험하고 앞서 커터에 반응했던 송현민을 상대로 빠른 공을 던질 수도 없으니 슬라이더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니키타 쇼우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공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넘겨야 했다.

그렇게 잠시.

공을 쥔 채로 뜸을 들이던 니키타 쇼우가 투구판을 박찼다.

그리고 니키타 쇼우의 손을 빠져나간 공은 한복판을 지나 바깥쪽 멀리 빠져나갔다.

-5구는 바깥쪽! 송현민 선수가 이 공을 참아냅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송현민 선수이다 보니 니키타 쇼우 선수도 쉽게 승부를 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박유성의 외침을 듣지 못한 이선철 해설위원은 니키타 쇼우가 일부러 공을 하나 뺀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구와하라 세이지가 요구했던 건 이렇게까지 빠지는 공이 아니었다.

아슬아슬한 공으로 송현민의 파울을 유도해 내려고 했는데 니키타 쇼우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버렸다.

‘이러면 포크볼은 던지기가 힘들어.’

잠시 미뤘던 포크 볼 승부를 위해서는 2-2라는 볼카운트가 유지되어야 했다.

하지만 볼카운트가 풀카운트로 바뀐 이상 포크 볼을 유인구로 쓰기가 부담스러워졌다.

송현민이 다시 한번 헛스윙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그대로 공이 빠지면 송현민을 고의4구로 내보낸 것만 못하게 될 것 같았다.

‘니키타! 전력으로 이겨내자!’

몸 쪽 빠른 공 사인을 낸 뒤 구와하라 세이지가 자신을 믿으라며 제 보호대를 두드렸고.

단단히 고개를 끄덕인 니키타 쇼우도 기합성을 내지르며 공을 내던졌다.

만약에 송현민이 포크 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면 니키타 쇼우의 기세에 눌려 타이밍을 놓쳤겠지만.

‘걸렸다!’

몸 쪽 빠른 공 하나만 생각하고 타석에 선 송현민은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고.

따악!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걸린 타구가 그대로 도쿄 돔을 침묵에 빠뜨렸다.

-아아, 이 타구가…… 전광판을 직격합니다! 홈런! 대한민국의 해결사 송현민 선수가 투런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타격과 동시에 홈런임을 직감한 송현민이 호들갑스럽게 배트를 내던졌고.

잠시 숨을 죽였던 대한민국 대표팀 더그아웃은 다시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늘 경기는 대한민국 대표팀이 어렵지 않게 잡아낼 것 같았다.

하지만 잘 던지던 임찬기가 갑자기 제구 난조에 빠지면서 경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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