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12화
27. 다시 만난 일본(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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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B조에 대한민국과 일본, 중국, 체코, 호주가 모였을 때 언론들은 한목소리로 대한민국과 일본의 8강 진출을 예상했다.
그 예상대로 대한민국 대표팀과 일본 대표팀은 나란히 3전 전승을 거두며 8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그리고 조별 예선 마지막 날인 3월 8일.
운명의 한일전이 시작됐다.
-지금 자막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일단 양 팀의 행보는 거의 비슷합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호주 대표팀을 15 대 0, 중국을 13 대 0, 체코를 14 대 0으로 잡아냈고 일본 대표팀은 중국을 14 대 0으로 제압한 뒤 호주에 7 대 1, 체코에 11 대 0 승리를 거뒀습니다.
-양 팀 다 경기당 10점이 넘는 점수를 뽑아냈고 실점은 거의 하지 않았네요.
-하지만 지난 경기들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고 봐야겠죠?
-그렇습니다. 결국 오늘 경기에서 이기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이번 대회 8강 토너먼트 대진표가 나오고 있는데 A조는 순위가 확정됐습니다. 1위가 쿠바, 2위가 이스라엘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만의 탈락이 좀 아쉽습니다. 지난 올림픽 때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잡아냈고 우리와도 팽팽한 경기를 펼쳤는데요.
-타국에서 열린 경기도 아니고 자국에서 열린 예선전에서 탈락했다는 건 준비 부족으로 봐야겠죠. 천신위 선수가 불참한 걸 제외하고는 특별히 선수 구성이 바뀌지도 않았으니까요.
-어쨌거나 대만이 탈락하면서 B조 1위는 이스라엘, 2위는 쿠바와 맞붙게 됐습니다.
-사실 8강전보다 중요한 건 4강전입니다. 8강전을 이겨야 4강전이 가능하겠지만 쿠바와 이스라엘은 다 해볼 만한 상대들이니까요.
-반면 B조 2위로 쿠바를 만나 올라가면 C조 1위인 미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C조는 미국과 도미니카 공화국이 올라올 가능성이 높은데 아무래도 미국보다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나을 겁니다.
그때 중계 카메라가 그라운드를 비췄다.
마운드 위에서는 일본의 좌완 에이스인 니키타 쇼우가 부지런히 연습 투구를 하고 있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오늘 일본 대표팀의 선발 투수는 니키타 쇼우 선수입니다.
-매리너스에서 뛰고 있는 선수죠.
-2002년생으로 27살. 190cm에 93kg입니다. 빠른 공의 최고 구속은 161km/h. 그 외에 커터와 슬라이더, 포크볼을 주로 던지는 투수입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비해 구속이 상당히 빠른 편인데요. 그래서 공이 가볍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공이 가볍다는 건 구위가 떨어진다는 의미일까요?
-큰 틀에서 놓고 보자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무브먼트가 좋은 공은 방망이 중심에 타구를 맞추는 것 자체가 어렵지만 그렇지 못한 공은 정타가 아니더라도 장타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요.
-그래도 좌완 투수가 던지는 160km/h는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요?
-물론 까다로울 겁니다. 하지만 국내에도 임찬기 선수를 비롯해 155km/h 이상의 빠른 공을 던지는 좌투수들이 제법 되니까요. LA 올림픽에서 우승을 일궈 낸 대한민국 타자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적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첫 단추를 잘 꿰매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요.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두 타자는 슈퍼 루키, 박유성 선수입니다.
중계 카메라가 다시 타석에 들어서는 박유성을 비췄다.
그리고 잠시 후, 올림픽 때의 성적이 자막으로 나왔다.
-박유성 선수. 지난 올림픽에서 무려 0.786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15번 차례 타석에 들어가서 볼넷 하나 포함 11개의 안타를 때려냈고 4타점에 7득점, 도루도 5개나 성공시켰습니다.
-경기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만 타율과 최다안타, 득점, 도루에서 1위를 기록했죠. MVP도 따냈고요.
-미국 언론에서도 인정한 LA 올림픽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인데요.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박유성 선수의 방망이가 더 뜨거워졌습니다.
장호영 캐스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막이 바뀌고 이번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성적이 나왔다.
-지금 박유성 선수 타율이 1.000으로 나오고 있는데요. 오류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지난 3경기에 선발 출전해 9타수 9안타를 기록 중입니다.
-상대가 호주와 중국, 체코이긴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10할을 치고 있는 선수는 박유성 선수 한 명뿐입니다.
-호주전에서는 홈런 빠진 히트 포 더 사이클을 쳤고 중국과 체코전에서는 단타 빠진 히트 포 더 사이클을 기록했는데요. 이를 두고 박유성 선수의 대기록을 챙겨주지 않는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하. 그건 좀 억지 같은데요? 사실 세 경기 모두 박유성 선수가 4타석을 소화했잖습니까? 볼넷이 하나씩 끼어 있어서 그렇지 박유성 선수도 풀타임으로 뛴 거나 다름없습니다.
-지난 경기들은 점수 차이가 너무 크게 벌어져서 주전 선수들에게 휴식을 줬습니다만 오늘 경기는 다르겠죠?
-감백호 선수가 좌익수로 선발 출전한 것부터 달라졌죠. 상대는 숙적이라 불리는 일본이고 오늘 경기를 꼭 잡아야 4강에서 미국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대한민국 중계진이 기대감을 높이는 동안 박유성은 침착하게 루틴을 실행했다.
평소보다 뒤쪽에 자리를 잡은 뒤에 오른발로 타석 앞쪽을 단단히 다지고.
방망이를 쭉 내밀어 오른쪽 타석 앞선을 길게 긁어낸 다음 방망이를 세 바퀴 돌리고 어깨 위에 올렸다.
‘요란하네. 저 녀석.’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니키타 쇼우가 피식 웃었다.
박유성이 하는 짓이 꼭 일본 고교 야구에서 해마다 튀어나오는 퍼포먼스 장인들 같았다.
올해도 일본 고교 야구에서는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타석 밖으로 물러나 제자리 점프를 하고 돌아오는 이색 타자가 등장했다.
당사자는 그렇게 하체를 풀어야 긴장감이 풀린다고 했지만.
막상 땅볼을 치고 1루로 내달리다 다리가 풀려 넘어지면서 야구팬들의 비난을 사야 했다.
물론 지난 올림픽에서 MVP급 활약을 펼친 박유성과 겉멋만 잔뜩 든 고교 야구 장인들을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니키타 쇼우는 박유성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어차피 저 녀석도 타석에 자신이 없으니까 요란을 떠는 거야. 괜히 말려들지 말자. 나는 내 공만 던지면 돼.’
길게 한숨을 내쉰 니키타 쇼우에게 일본 대표팀의 주전 포수 구와하라 세이지가 침착하게 사인을 냈다.
초구는 몸쪽 높은 코스의 빠른 공.
이번 대회에서 절정의 타격감을 뽐내고 있는 박유성에게 빠른 공의 위력을 보여주자는 주문이었다.
‘좋아. 이런 녀석은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해.’
니키타 쇼우가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다가 기합성과 함께 공을 내던졌다.
후앗!
니키타 쇼우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높이 날아들자 박유성은 타격을 포기하고 상체를 뒤로 젖혔고.
퍼엉!
얼굴 앞쪽을 통과한 공은 묵직한 포구 소리와 함께 구와하라 세이지의 미트 속으로 사라졌다.
-초구는 몸 쪽 높은 볼입니다.
-지금 도교 돔에 156km/h가 찍혔는데요. 아직 3월인 걸 감안하면 상당한 구속입니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일본 중계석에서도 고함이 터져 나왔는데요. 박유성 선수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박유성 선수야 크리스 반스 선수도 상대했으니까요. 니키타 쇼우 선수의 공에 주눅 들지는 않을 겁니다.
이선철 해설 위원의 단언처럼 박유성은 초구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분명 빠른 공이긴 했지만 뭐랄까.
그냥 빠르기만 한 느낌이었다.
오히려 전광판에 찍힌 156km/h라는 숫자가 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예전에도 이랬나?’
1회차 시절에는 니키타 쇼우를 상대할 기회가 없었다.
박유성이 늦은 나이에 국가 대표로 데뷔하던 그해 니키타 쇼우가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1회차보다 4년 앞서 태극마크를 단 2회차 시절에는 니키타 쇼우를 딱 한 번 상대했다.
그때는 초구처럼 구속은 빠르지 않았지만 공이 조금 더 묵직하게 날아와 꽂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전형적으로 힘에 의존에 공을 던지고 있었다.
‘이거 포크 볼을 노려야 하나?’
2회차 시절.
박유성은 니키타 쇼우를 상대로 안타를 때려내지 못했다.
주무기인 포크 볼에 신경 쓰다가 볼카운트가 불리해졌고.
삼진을 피하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잡고 나니까 포크 볼이 날아들었다.
삼진. 땅볼. 그리고 삼진.
6번 타자의 역할에 맞춰 방망이를 크게 휘두른 감독 없지 않았지만 2회차 때 만났던 니키타 쇼우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투수였다.
그래서 포크 볼에 초점을 맞춰 타석에 들어섰는데 정작 니키타 쇼우는 빠른 공으로 승부를 걸어올 것 같았다.
‘일단 이번 공은 버리자.’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할 겸 박유성은 2구를 그대로 지켜봤다.
그리고 그 공은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들어갔다.
-2구는 스트라이크. 139km/h의 슬라이더가 들어왔습니다.
-볼카운트를 잡기 위해 던진 공 같은데요. 예리하게 잘 들어갔습니다.
-방금 공은 박유성 선수가 놓쳤을까요?
-놓쳤다기보다는 초구가 볼이었기 때문에 무리해서 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박유성 선수가 노리는 공이 아니었다는 얘기인데요. 지난 LA 올림픽에서 마츠다 유이토 선수를 상대했을 때처럼 포크 볼을 노리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니키타 쇼우 선수도 여기서 커터를 던지긴 부담스러울 테고요.
니키타 쇼우가 던질 수 있다고 알려진 구종은 총 6개.
포심 패스트 볼을 비롯해 커터와 슬라이더, 포크볼, 체인지업, 커브였다.
그중 커브는 한 경기에서 하나 구경하기도 힘들고.
체인지업도 보통 오른손 타자를 상대할 때 가끔 던지는 편이었다.
게다가 커터를 던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전략 분석 자료를 꼼꼼하게 읽어 봤다면 포크 볼을 노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일본 베터리는 지난 LA 올림픽에서 마츠다 유이토의 포크볼을 공략해냈던 박유성에게 포크 볼 승부를 할 생각이 없었다.
볼카운트 원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구와하라 세이지가 낸 사인은 몸 쪽 낮은 코스의 빠른 공.
“후우…….”
단단히 고개를 끄덕인 니카티 쇼우가 길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박유성의 타이밍을 빼앗듯 뜸을 들이다가 있는 힘껏 투구판을 박찼다.
후앗!
니키타 쇼우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몸쪽으로 날아들자 박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허리를 돌렸다.
포크 볼을 머릿속에 담아뒀다면 조금 더 공을 지켜봤겠지만.
빠른 공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하고 방망이를 휘두르니까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단숨에 허리를 빠져나온 방망이는 정직하게 스트라이크 존으로 파고드는 공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아아, 큽니다! 쭉쭉 뻗어 나갑니다!
-이건 넘어 갈 것 같은데요?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아아, 펜스 상단에 맞고 떨어집니다!
모든 대한민국 야구팬들이 바라던 홈런은 아니었지만.
우익수 곤도 타쿠야가 펜스를 맞고 튕겨 나온 공을 잠시 놓친 사이 박유성은 또다시 3루를 파고들었다.
-공이 3루로 갑니다만 이미 늦었습니다.
-박유성 선수 정말 빠르네요. 사실 저렇게 큰 타구를 치고 나면 홈런인가 싶어서 잠깐 머뭇거리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펜스를 맞을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망설이지 않고 2루를 돌았습니다.
대한민국 중계석은 물론이고 미국 중계석에서도 극찬이 터져 나왔지만 일본 중계진은 어떻게든 박유성을 깎아내리려고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