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211화
26. 박유성 선수를 뽑아야 합니다.(8)
“뭐긴 뭐야. 우리 유성이지.”
“어떻게 저걸 잡냐?”
“이제 알겠어? 투수들이 유성이한테 잘하는 이유를?”
구태여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박원우는 이제야 이해가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2사 만루 상황에서 4번 타자를 상대로 구원 등판을 했는데 방금 전 파울 타구를 박유성이 처리해 준다면?
투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너도 괜히 유성이한테 군기 잡으려고 하지 마.”
“내가? 나 안 그랬는데?”
“넌 인마 눈빛에 써 있었어.”
“진짜 아니라니까.”
박원우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박유성이 지나치게 예쁨받는 게 못마땅하긴 했지만 국가대표에 늦게 들어와 놓고 지난 올림픽 MVP인 박유성에게 선배 노릇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조차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훤히 다 보였다.
“유성이가 대회 때 저런 슈퍼 플레이 하나 할 때마다 더그아웃 분위기가 달라져. 투수들도 맘 편히 공 던질 수 있고. 그러니까 괜히 잘하는 우리 막내 기죽이지 마라.”
“안 한다니까 그러네.”
“내가 지켜보고 있다.”
“안 해. 안 한다고.”
박유성의 수비에 넋이 나간 건 박원우만이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박유성의 수비를 직접 본 유장한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허, 진짜 저 녀석 해도 너무하네.”
“왜 우리 유성이한테 시비냐?”
“아니 제가 백업으로 들어왔는데 유성이가 저렇게 잘해 버리면 저는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죽어라 해야지. 실력으로 안 되면 노력. 몰라?”
백영완이 앓는 소리 말라며 유장한의 등을 툭 때렸다.
그러자 유장한이 확 짧아진 백영완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형, 머리 안 기르실 거예요?”
“관리하기 귀찮아. 진즉 짧게 밀 걸 그랬어.”
지난 시즌이 끝나고 백영완은 훈련소에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고 나왔다.
덕분에 올백으로 멋들어지게 넘기던 헤어스타일이 까까머리로 변해 있었다.
LA 올림픽에서 함께 고생했던 선수들은 백영완을 보기가 무섭게 짧은 머리를 가지고 놀려댔지만 유장한은 그런 백영완이 부럽기만 했다.
유장한도 아직 군복무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봐? 부럽냐?”
“네. 진짜 부럽네요.”
“그럼 유성이한테 잘해.”
“유성이한테요?”
“내년 아시안게임 때 백호나 정후가 합류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
“아시안게임 11월에 하는 거 아니었어요?”
“우리야 아시안 게임에 맞춰서 일정 조정이 가능하지만 메이저리그는 다르지. 프리미어 12도 아니고 카타르까지 가서 고생하고 싶겠냐?”
중동 국가인 카타르의 높은 기온을 감안해 지난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은 12월에 열렸다.
그리고 이번 2030 아시안 게임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과 비슷한 11월 중순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월드 시리즈가 보통 11월 초에 끝이 나는 만큼 카타르 아시안게임은 소속 구단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참가가 가능했다.
하지만 한국 나이로 30대 중반에 들어선 기정후와 감백호에게는 고된 시즌 후 카타르 도하까지 가서 대회를 치르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 대만도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소집하기가 부담스러울 거야. 그럼 자연스럽게 국내 선수 위주로 대회를 치르자는 말이 나올 거고 그럼…….”
“저한테도 기회가 오겠네요.”
“물론 내년 시즌에 성적을 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누군가 병규의 백업을 봐야 한다면 네가 될 가능성이 높지.”
“진짜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때 따악, 하고 다시 파열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공이 거의 센터 쪽으로 날아갔는데 박유성이 사선으로 내달려 가볍게 타구를 처리했다.
“그러니까 유성이한테 잘하라고. 정후와 백호가 빠지더라도 유성이는 합류해야 하잖아? 유성이가 너 마음에 안 든다고 아시안게임 때 불참하면 어떻게 할래?”
“에이, 설마요.”
“왜? 유성이가 어리니까 부르는 족족 대표팀에 합류해야 할 거 같아? 유성이는 이미 LA 올림픽 MVP로 제 역할 다 했다. 시즌 중간에 하는 것도 아니고 시즌 끝나고 열리는 아시안 게임에 안 나간 걸로는 절대 못 까.”
“정후 형도 안 오고 유성이도 없으면 중견수는 누가 보라고요?”
“민찬수?”
“장난해요?”
“그러니까…….”
“알았어요. 유성이한테 잘할게요. 그런데…… 뭘 어떻게 잘해야 해요?”
유장한이 백영완을 보며 물었다. 자신도 박유성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딱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백영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어떻게 할 필요 없어. 그냥 유성이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저 녀석 하는 거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거야.”
박유성의 좌익수 수비 펑고가 끝이 나고 민병규가 자리에 들어갔다.
펑고 배트를 든 추신우 수석 코치가 일부러 잡을 만한 코스로 공을 때렸지만.
민병규가 완벽하게 처리한 타구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병규 저 녀석 좌익수로 넣어도 되는 거야?”
강기태 감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민병규가 외야 전향을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개인 훈련을 소화했을 만큼 열정적이라 기대를 했는데 아직 주전으로 출전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자 이병구 타격 코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중국전과 체코전은 병규가 실책 좀 해줘야 긴장감이 살 겁니다.”
“그게 지금 코치가 할 소리야?”
“어차피 8강전부터는 백호가 고생을 해야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얘깁니다.”
추신우 수석 코치도 이병구 타격 코치의 말에 힘을 보탰다.
“백호도 컨디션을 끌어 올릴 시간만 주면 수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병규도 좌익수로서 경험을 쌓아야 하니까 병규에게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민병규가 1루수에서 좌익수로 포지션을 옮기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추신우 수석 코치는 군말 없이 찬성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남은 숙제가 박준수와 민병규의 공존인데 민병규가 외야로 나가면 모든 게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수비라는 게 하루아침에 완성이 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박준수와 1루를 두고 경쟁하는 것보다 유사시에 1루 수비가 가능한 주전 좌익수로 뛰는 게 민병규를 위해서도 백번 나았다.
“유성이도 코너 수비가 가능하니까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진짜 유성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강기태 감독이 푸념하듯 주절거렸다. 처음 올림픽 대표팀에 대체 선수로 합류했을 때만 하더라도 무럭무럭 자라주기만을 바랐는데 어느새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핵심 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성이 말이야. 이번 평가전 때는 좀 쉬게 할까?”
“핵심 전력 노출을 막자는 말씀이십니까?”
“겸사겸사 백업 선수들에게도 출전 기회를 주면 좋잖아?”
“벌써부터 배테랑들 챙기시는 건가요?”
“이 코치 말대로 어차피 8강 넘어가면 베스트 전력만 돌릴 텐데 뭘.”
베테랑도 베테랑이지만 강기태 감독은 박유성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지난 LA 올림픽에서 MVP를 받았으니 박유성도 잘해야겠다는 압박감이 심할 터.
괜히 선발 출전시켰다가 집중 견제를 받게 만드느니 해외파 선수들에 준하는 특별 관리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해외파 선수들이 합류한 가운데 쿠바 대표팀과의 첫 번째 평가전이 펼쳐졌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수비 위치를 알려 드립니다. 1루에 박준수. 2루에 최일준. 3루에 이종률. 유격수에 박찬희. 외야는 차례대로 민병규와 유장한, 백영완 선수가 맡습니다. 포수는 나경석. 선발 투수는 송찬우 선수입니다.
-지금 해외파 선수들을 포함해 김하선 선수와 박유성 선수가 빠졌는데요. 쿠바 대표팀의 전력을 감안했을 때 너무 배짱을 부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LA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지만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대거 합류한 쿠바 대표팀은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강기태 감독과 코치진은 평가전의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다.
“져도 좋으니까 우리가 얻어갈 것만 얻어가자고. 그럼 되는 거야.”
이틀 연속 펼쳐진 쿠바와의 평가전은 사이좋게 1승씩을 주고받았다.
첫날 경기는 우완 에이스 송찬우의 호투 속에 6 대 3 승리를 따냈고 이튿날 경기는 선발 투수 김일웅이 5이닝을 버티지 못하면서 7 대 5로 패배했다.
이어진 이스라엘, 대만과의 평가전은 대한민국 대표팀이 전부 잡아냈다.
이번 대회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대거 합류시킨 이스라엘 대표팀은 아직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이었고.
천신위가 빠진 대만 대표팀은 LA 올림픽 때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평가전 5승 1패면 기대해 볼 만한 거죠?
└모의고사 잘 봤다고 수능 잘 본다는 보장은 없죠.
└전 모의고사 잘 보고 수능 대박 터졌는데요?
└쿠바 상대로 1패 하긴 했지만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던 듯?
└평가전 띄엄띄엄 봤는데 박유성 선발 출전한 경기 없었죠?
└박유성 포함 해외파 선수들 전원 벤치에서 시작했습니다.
└김하선하고 해외파는 그렇다 쳐도 박유성은 왜 빠진 거죠?
└박유성 아직 프로 데뷔도 안 한 신인 선수입니다. 스프링 캠프 치르다 왔는데 컨디션이 좋을 리가 없죠.
└그런 것치고는 후반에 투입될 때마다 안타 치던데요? ㅋ
└박유성 평가전 6타수 4안타죠?
└6타수 5안타입니다. 올림픽 때 7할 타율을 넘어 8할 타율을 기록 중이죠.
└U-18 야구 월드컵 때 10할 타자였는데 박유성 많이 부진하네요. ㅋㅋ
박유성을 비롯한 해외파 선수들은 경기 후반에 교체 투입되는 식으로 경기 감각을 유지했다.
김하선을 비롯해 체력 관리가 필요한 기정후와 감백호는 강기태 감독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젊은 피인 송현민과 송현민 기준으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박유성은 벤치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유성아. 가서 감독님께 출전시켜 달라고 졸라봐.”
“저는 말빨이 안 먹히니까 형이 좀 말해봐요.”
“말 안 했겠냐? 아까도 화장실 다녀오면서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했는데 간지러우면 때를 밀래.”
“헐. 진짜요?”
“살다 살다 그런 썰렁한 개그는 처음이었어.”
강기태 감독도 박유성과 송현민을 경기 후반에 우선 투입하며 신경을 썼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두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두고 봐라. 나 호주전에서 홈런 3개 친다.”
“저는 일단 선두타자 홈런부터 날릴 겁니다.”
“너 내가 돈 빌려준 거 알지? 잔말 말고 안타 쳐 인마. 내 앞에 밥상 차리라고!”
“빌려간 돈은 다 갚았습니다만?”
“이자 안 줬잖아!”
“계좌 불러요. 은행 이자보다 더 쳐서 줄게요.”
“이자 대신 밥상 차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렵냐?”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그래요.”
6일 연속 진행된 평가전을 끝내고 대한민국 대표팀은 곧바로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하루를 푹 쉬며 현지 적응을 마친 뒤 호주와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B조 개막전 경기를 맞았다.
-대한민국의 스타팅 라인업입니다. 1번 타자 중견수 박유성. 2번 타자 좌익수 민병규. 3번 타자 2루수 송현민. 4번 타자 3루수 김하선. 5번 타자 1루수 박준수. 6번 타자 우익수 기정후. 7번 타자 지명타자 감백호. 8번 타자 포수 박경호. 마지막으로 9번 타순에 유격수 박찬희 선수가 들어갔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베스트 라인업인데요. 오늘 호주 대표팀을 상대로 어떤 경기를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스윽. 스윽.
오랜만에 선두 타자로 나선 박유성은 평소보다 꼼꼼하게 루틴을 실행했다.
그러고는 호주 대표팀 선발 투수인 스티브 코렐의 초구가 몸 쪽으로 날아오자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하는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외야 쪽으로 뻗어 나갔고.
“젠장. 짧다.”
타구의 궤적을 확인한 박유성은 빠르게 1루를 찍고 2루를 돌아 3루까지 파고들었다.
-3루에서 세이프! 대한민국의 슈퍼 루키, 박유성 선수가 경기 시작부터 3루타를 만들어냅니다!
-역시 박유성 선수네요. 이래서 다들 박유성 박유성 하는 겁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에 주자를 내보낸 스티브 코렐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초구에 3루타를 얻어맞은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박유성이 3루에서 리드를 넓히고 있으니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볼!”
칠 만한 공이 들어오지 않자 민병규는 볼넷을 골라 버렸고.
따악!
무사 1, 3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송현민이 3구째 몸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퍼 올리며 박유성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대한민국의 해결사 송현민 선수가 1타점 2루타를 때려냅니다.
그리고 이어진 무사 2, 3루 상황에서.
따악!
김하선이 힘껏 잡아당긴 타구가 도쿄 돔의 펜스 너머로 사라졌다.
-홈런! 쓰리런! 대한민국의 4번 타자 김하선 선수가 중요한 순간에 한 방을 때려냅니다.
-박유성 선수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타자들 방망이에 불이 붙었습니다!
1회에만 타자 일순하며 6점을 올린 대한민국 대표팀은 호주 대표팀을 15 대 0으로 제압하고 기분 좋은 첫 승리를 따냈다.
그리고 중국과 체코를 차례로 대파하며 8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