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199화
25. 스타즈의 신성(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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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캠프를 마치고 돌아온 박유성은 곧바로 영어를 가르쳐 줄 선생님을 구했다.
구단에서 유명한 여성 강사를 추천했지만 박유성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예쁜 선생님 따위 필요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실전 영어입니다. 최소한 흑인들이나 라틴어권 친구들을 상대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의 레벨은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 브리토와 며칠 부대끼면서 박유성은 메이저리그를 간접 체험했다.
“이런 얘기를 하긴 그렇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말이야. 동양인이 가장 서열이 낮아.”
“서열이 낮다고? 나 싸움 잘하는데?”
“노노. 싸움 이야기가 아니야. 동양인은 메이저리그 전체 선수들 중에 소수에 불과해. 게다가 대부분 포스팅을 통해 좋은 조건을 받고 넘어왔잖아? 마이너리그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친구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래서? 수가 적으니까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거야?”
“정확해. 모두와 친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많은 친구를 사귀면 좋아. 특히 나 같은 흑인이나 라틴어 쓰는 친구들과 잘 지내야 해. 그래야 백인들도 함부로 굴지 못해.”
“메이저리그는 여전히 인종 차별이 심하지?”
“인종차별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어. 내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날 모르는 사람들은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지.”
“나도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 미국에 도착해서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젊은 녀석들이 웃으면서 원숭이 찾더라고.”
“그걸 그냥 놔둔 거야? 나 같으면 당장 머리통을 으깨 버렸을 거야.”
“내버려 둬. 걔들은 인생 패배자들이잖아. 아마 나중에 TV에 나온 내 모습을 보고 그럴걸? 얘 지난번에 화장실에서 우리가 놀렸던 걔 아니야? 그러다 주변에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 낙인이 찍히겠지.”
“하하하. 썬 너는 정말 멘탈이 좋은 거 같아. 그래서 야구를 잘하는 건가?”
다니엘 브리토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들은 박유성은 메이저리그를 미리미리 준비하기로 마음먹었고.
박유성의 까다로운 조건을 전달받은 스타즈 구단은 적임자라 생각하는 사람을 붙여주었다.
“김찬혁이라고 합니다.”
“다니엘 에이전트 맞으시죠?”
“하하. 네. 어쩌다 보니까 저한테 연락이 왔더라고요. 제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거친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덕분에 다니엘과도 금방 친해졌고요.”
다른 에이전트였다면 무슨 영어 선생이냐며 화를 냈겠지만.
김찬혁 대표는 김재식 단장의 제안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에이전트라고 해봐야 계약 선수가 다니엘 브리토 한 명뿐이다 보니 부업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들으셨겠지만 저는 실전 영어를 원합니다.”
“네. 메이저리그 스타일로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수업은 언제 언제 하나요?”
“제가 매우 한가해서요. 앞으로 두 달간은 주말 빼고 주 5일로 진행할까 합니다.”
12월 1일을 기점으로 프로야구는 비활동 기간에 접어들었다.
다니엘 브리토도 마무리 캠프가 끝나기가 무섭게 가족들과 함께 고향 집으로 돌아가서 당분간은 김찬혁 대표가 할 일이 없었다.
“다니엘에게 들어보니까 기본적인 회화는 가능하다는데 따로 영어를 배우셨나요?”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습니다. 정식으로 배운 건 따로 없고요.”
정확하게는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 외국인 선수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는 거지만.
세상 진지하게 생긴 김찬혁 대표에게 인생 3회차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인 건 김찬혁 대표가 박유성의 영어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기왕 교육을 시작하게 됐으니까 기본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복습하는 차원에서 말이죠.”
“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김찬혁 대표와 일주일 공부를 해본 박유성은 송광철 대표를 호출했다.
“아저씨. 아직 직원 안 뽑으셨죠?”
“뽑아달라는 사람들은 많은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그럼 김찬혁 대표님 어때요?”
“김찬혁 대표? 너 영어 가르쳐 준다는……?”
“김찬혁 대표님도 다니엘 브리토 말고는 딱히 선수를 맡을 생각이 없다고 하시거든요.”
“흠……. 그런데 김찬혁 대표가 내 밑에서 일을 하려고 할까?”
“이번에 다니엘 잔류 못 했으면 재계약까지만 도와주고 에이전트 그만두려고 했다던데요? 월급쟁이가 편하다면서요.”
“그래? 그럼 내가 한번 만나봐야겠다.”
다니엘 브리토에게서 받는 수수료로 생계를 유지해 왔던 김찬혁 대표는 송광철 대표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김 팀장이 이렇게 반길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빨리 제안할 걸 그랬네요.”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제가 수수료를 많이 받는 편이 아닙니다. 다니엘이야 알아서 잘하는 선수이고 가족들도 워낙에 배려심이 깊어서 가끔 운전기사 해주는 게 전부거든요.”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 해요. 호의로 일하면 나중에 치사해지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난 현민이한테도 남들만큼 뜯어내잖아요.”
“그럼 직원은 저를 포함해서 두 명인가요?”
“김 팀장도 알겠지만 사무실 지키고 운전해 줄 친구들은 많습니다. 김 팀장 같은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거죠. 김 팀장이 왔으니까 이제 우리 에이전시도 금방 자리 잡을 겁니다.”
김찬혁 대표가 팀장으로 송 에이전시에 합류하면서 다니엘 브리토도 소속을 옮겼다.
송광철 대표는 다니엘 브리토가 원한다면 계속해서 김찬혁 팀장과 별도의 계약을 유지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김찬혁 대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사에 들어왔는데 개인 업무를 보고 있을 수는 없죠. 다니엘은 제가 잘 설득하겠습니다.”
다니엘 브리토도 송현민, 박유성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는 사실을 반겼다.
-그러니까 썬과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 된 거지?
“쏭이 아니라 썬이야?”
-쏭은 별다른 친분이 없잖아. 하지만 썬은 달라. 우린 이미 좋은 친구라고. 하하하.
“그보다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는 불참하는 거지?”
올림픽 브레이크 여파로 리그가 3주 가까이 밀렸지만 골든 글러브 시상식은 예년처럼 12월 둘째 주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퇴출을 통보받은 다른 외국인 선수들과 달리 다니엘 브리토는 마무리 캠프까지 소화하고 미국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 고작 시상식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정작 다니엘 브리토의 반응은 달랐다.
-아니. 참석할 거야.
“참석한다고?”
-골든 글러브를 받는 건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무조건 참가할 거야.
0.321의 타율에 38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겨 버린 다니엘 브리토는 골든 글러브 외야 부분 유력 수상 후보였다.
스타즈가 아쉽게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 데다가 외야수 중 최다 득표를 한 작년에 비해 성적이 소폭 하락하긴 했지만 다니엘 브리토를 밀어내고 골든 글러브를 빼앗아 갈 선수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년 시즌은 달랐다.
박유성이 데뷔하는 데다가 랜더스의 민병규가 좌익수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민병규는 지난해 박준수를 밀어내고 1루수 골든 글러브를 차지한 강타자.
<사부열전> 출연 이후 한소정과 공개 연애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매일같이 특훈을 자처할 만큼 외야수 변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썬 말고는 다 해볼 만하지 않아?”
-랜더스의 섹시 가이는 인기가 많잖아. 내가 월등하게 잘해야 할 텐데 솔직히 자신 없어.
2028 시즌 나눔 리그 1루수 부분 골든 글러브는 박준수가 탈 가능성이 컸다.
올림픽 전까지 29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용병 타자들을 제치고 나눔 리그 홈런 단독 1위를 질주하더니 잔여 경기에서는 타격감을 더 끌어올리며 0.333의 타율과 45홈런, 132타점을 기록, 자신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썼다.
라이벌인 민병규조차 박준수가 골든 글러브를 받을 거라 인정했을 정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병규의 시즌 성적이 박준수에 비해 크게 처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0.337의 타율과 39홈런, 119타점이라는 시즌 성적은 다니엘 브리토보다 조금 더 나았다.
정확도만큼은 박준수보다 한 수 위라 평가받는 민병규에 슈퍼 루키 박유성까지 들어왔으니 전체 용병 타자들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 평가받는 다니엘 브리토도 마음을 놓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포기하진 마. 내년 시즌에 스타즈가 우승을 한다면 골든 글러브를 받게 될 거야.”
-오호, 그런 방법이 있었네? 이거 썬에게 맛있는 밥을 사야겠는걸?
골든 글러브 시상식 사흘 전에 한국으로 들어온 다니엘 브리토는 구단에서 제공해 준 집으로 박유성과 송광철 대표를 초대했다.
“어서 와요. 썬.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다니엘 브리토의 아내 에밀리 브리토는 요리를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다니엘 브리토를 만나기 전에 오리올스 파크 근처 피자집에서 일을 했다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달에 한 번씩은 스타즈 선수단에 수제 피자를 보내주곤 했다.
박준수의 말로는 에밀리표 피자를 먹으면 다른 피자는 맛이 없어서 몇 입 못 먹을 정도라고.
그래서 박유성도 내심 기대를 했는데 열 명이 앉아도 될 만한 큼지막한 테이블 위로 못 보던 요리들이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요?”
“걱정하지 마. 썬. 우리 가족은 대식가야. 음식이 남을 일은 없어.”
“어쨌거나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에밀리.”
“고맙긴요. 오히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썬.”
마무리 캠프 전까지만 해도 남편의 포지션 경쟁자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지 에밀리 브리토는 시종일관 웃으며 박유성에게 음식을 권했고.
덕분에 박유성도 양식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에밀리는 나중에 가게를 차려도 되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다니엘이 은퇴를 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레스토랑을 차릴 계획이에요.”
“그때가 되면 꼭 알려줘요. 친구들을 데리고 찾아갈게요.”
“정말이죠? 약속한 거예요?”
식사가 끝나고 거실로 자리를 옮기자 다니엘 브리토의 자녀들이 유니폼을 내밀었다.
“썬. 싸인해 줘요.”
“내 사인? 미안한데 난 아직 데뷔도 하지 못한 루키야. 내 사인은 받아봐야 의미 없을걸?”
“썬이 올림픽에서 뛰는 모습을 봤어요. 썬이 없었다면 올림픽 금메달은 미국이 차지했을 거예요.”
“응. 아니야. 내가 없어도 한국이 우승했어.”
다니엘 브리토를 쏙 빼닮은 노바 브리토를 놀리며 박유성이 등판 쪽에 큼지막하게 사인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이건 특별 제작한 거야?”
“장기 계약할 때 구단에서 선물해 준 거야.”
“스타즈 선수 복지 좋은데?”
“하하. 부러우면 썬 너도 빨리 결혼을 하라고.”
노바 브리토보다 두 살이 어린 엘사 브리토는 부끄럼이 많았다.
테이블 위에 자신의 유니폼을 슬쩍 내려놓고는 에밀리 브리토의 등 뒤에 가서 숨어버렸다.
“꼬마 아가씨. 이름은 알려줘야지?”
“엘사예요.”
“엘사? 내가 아는 그 엘사?”
“맞아. 와이프가 그 애니메이션을 엄청 좋아했거든. 그래서 딸이 태어나자마자 바로 엘사라는 이름을 붙여줬어.”
“내가 보기엔 엘사보다 더 귀여운데?”
엘사 브리토의 유니폼에 사인을 적어 넣은 뒤 박유성은 다니엘 브리토 가족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SNS에 올릴 거니까 웃으라고. 친구.”
다니엘 브리토의 주문대로 박유성은 노바 브리토를 무릎 위에 올리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 올라간 사진은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추천을 받았다.
“썬. 너도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 올 거지?”
“난 못 가지. 아직 신인이잖아.”
“그러지 말고 와서 내가 상 받는 걸 지켜보라고. 그래야 내년에 떨지 않지.”
1회차 시절과 2회차 시절에 골든 글러브는 충분히 받아봤지만.
박유성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무리 캠프에 뒤늦게 합류한 걸 두고 신인 주제에 건방지다는 말들이 나와서 이미지 관리가 필요하던 차였다.
그런데 올 시즌 22승 4패에 평균자책점 2.15의 성적으로 나눔 리그 투수 부분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 랜더스의 로메오 클레멘스가 박유성을 보며 도발을 날렸다.